104.
틸다 레트랑은 평소보다도 더욱 화려한 드레스를 꺼내 입었다.
과하다 싶을 정도의 보석들을 온몸에 휘감고, 단단히 고정된 새빨간 머리카락은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솟아올랐다. 덕분에 팔이며 목이며 뻐근하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무게가 주는 고통이야 얼마든지 참아낼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의 눈에 ‘부러움의 대상’으로 보일 수만 있다면 뭔들 못하겠는가. 머리에 커다란 금덩이를 지고 다닐 수도 있었다. 목이 꺾여 죽는 한이 있더라도!
아무튼, 틸다가 오늘따라 외모에 공들이는 이유는 복수를 위해서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의 복수를 도울 동조자와의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서랄까. 흉터로 가득한 예카틸리나의 얼굴을 고쳐주겠다 약속은 했으나 마땅한 의사를 찾기란 어려웠다. 끊임없이 발발했던 전쟁 탓에 흉터를 없애는 치료술이 성행하고 있다고는 해도, 예카틸리나의 경우는 그보다 더욱 복잡했다. 얼굴 전체를 갈아엎어야 했으니. 벌써 몇몇 의사들을 만나 자문해보기는 했다. 그러나 들려오는 답은 전부 불가능이었다.
‘귀찮은 계집애 하나 잘못 만나서 이게 무슨 고생이람!’
하나 여기서 그만두자 할 수도 없었다. 먼저 시아라의 목을 베지 않으면,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는 것은 틸다와 그녀 가문이 되리라. 이제 그녀의 곁에 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성가시지만 복수라는 달콤한 제안을 건넸던 그 여자. 예카틸리나만이 시아라에게 대적할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런 틸다가 찾은 곳은 케네다 백작 부인이 주최하는 다과회였다. 케네다 백작가는 몇 해 전 철도사업에 투자해 큰돈을 만진 가문으로, 최근 수도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백작 부인은 정보에 빠삭한 여자였고, 철도사업의 대성공 역시 그녀가 얻어온 비밀정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케네다 저택 후원에 들어서자 길게 늘어선 테이블 앞에 우아하게 앉아있는 귀부인들이 보였다. 틸다는 조소했다.
‘어디서 고상한 척들이야?’
이 자리에 있는 귀부인들 전부 제국에서 암암리에 열리던 비밀무도회를 뻔질나게 쏘다니는 여자들이었으니. 틸다가 백작 부인을 처음 만난 곳도 물론 그 무도회였다.
‘거기서는 그렇게 더러운 짓거리를 하던 주제에!’
귀부인들의 이중적인 작태에 코웃음 치며, 케네다 백작 부인에게 인사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벌써 다과회가 시작된 모양이군요.”
“레트랑 부인, 오셨군요. 초대장에 답신이 없어 참석하지 않으시는 건가 걱정했답니다.”
“깜빡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 백작님께서 바쁜 한때를 보내고 계시니까요. 저라고 가만히 집에만 있을 수 있나요.”
“아, 그렇죠. 부군께서는 늘 가문의 발전을 위해 힘쓰시니까요. 안부 인사는 이만하면 됐으니 자리에 앉으시겠어요? 다들 부인을 기다렸답니다.”
틸다가 착석하자 맞은편에 있던 에시안 백작 부인이 물었다.
“레트랑 부인. 얼굴이 많이 상하셨네요? 내조하느라 바쁘신가 봅니다.”
귀부인의 눈빛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일렁거렸다. 그러나 부채 뒤에 가려진 입은 울고 있지 않으리라고, 틸다는 확신했다.
“에시안 부인께서 이리도 걱정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안 그래도 요새 근심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거든요.”
“무슨 일이 있으셨나 봐요?”
“이 자리에서 꺼내기에 알맞은 대화 주제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괜히 분위기를 망칠까 싶어…….”
즙을 짜내듯 억지로 눈물까지 글썽거리자 케네다 부인이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부인. 말씀해보세요.”
“그게……. 제가 데리고 있던 하녀 하나가 큰 사고를 당해 얼굴이 다 망가져 버렸답니다.”
“저런.”
“평생 저를 위해 힘쓰던 아이였는데……. 갑자기 그리되어버린 것이 마음이 아파 며칠을 끙끙 앓았지요.”
“마음고생이 심하셨나 봅니다. 하지만 고작 하녀 하나 다친 일에 부인께서 신경을 쓰시다니. 요새 하는 일이 다 잘되니 여유로우신 모양이군요.”
“제 딸 같은 아이였기에……! 죄송합니다. 흐흑. 역시 이런 이야기는 하지 말 걸 그랬어요.”
틸다가 붉어진 눈시울을 훔쳤다.
“아닙니다. 부인께서 워낙 인품이 훌륭하시니 그럴 수도 있죠. 괜찮으시다면 제가 아는 의사를 소개해 드리고 싶군요.”
원하던 답이 나오자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흉이 워낙 심한 터라……. 얼굴 거죽을 전부 갈아야 할 지경입니다. 가능할까요?”
“글쎄요. 찾아가 보세요. 물론 지금은 귀부인들을 상대로 하는 피부미용에 집중하고 있지만. 이래 봬도 꽤 유능한 의사랍니다.”
케네다 부인이 건넨 명함에 틸다는 크게 감동한 척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따님 같다던 그 하녀가 하루빨리 기운을 차렸으면 좋겠군요.”
“감사합니다, 부인.”
사실상 볼 일을 다 마친 그녀가 조금 더 여유로운 자세로 차 한 모금을 마셨다. 그 뒤로 얼마간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귀족들의 연애사 같은 하등 쓸모도 없는 이야기들이 주를 이뤘다. 아니면 남편이나 자식 자랑 같은 것이라던가. 뭐가 됐든 지금의 틸다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주제들이었다. 누군가 저에게 아들의 안부를 묻기라도 할까 봐,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때, 에시안 부인이 입을 열었다.
“그 소문 들으셨어요? 아델트 공작이 곧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요!”
틸다가 놀란 숨을 들이켰다. 그게 뭐가 대단한 일이라는 건지, 나머지 귀부인들은 호들갑을 떨어댔다.
“어머, 그게 정말인가요?”
“네. 듣기로는 벌써 그 레이디가 저택에 들어가 산다더군요.”
“아델트 공이 결혼이라니!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분은 좀처럼 틈이 없으니까요. 대체 어느 가문의 영애일까요?”
“우리가 모를 정도라면, 혹시 이웃 나라의 대귀족은 아닐까요?”
“그러고 보니 하메다 왕국의 공주들이 아델트 공에게 계속 구애를 했다던데. 그분들은 아니겠지요?”
얼토당토않은 추측에 코웃음 치는 것은 틸다 하나였다. 시아라 그 하찮은 게 공작과 결혼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성질나는데, 공주니 대귀족이니 하는 것은 더욱 참을 수 없었다. 고작 몰락 귀족의 여식에게 그런 소문은 사치가 아니던가. 틸다는 머릿속이 꽃밭으로 가득 찬 귀부인들에게 넌지시 덧붙였다.
“그 소문은 제가 잘 압니다.”
“레트랑 부인께서요?”
“그 아이는 몰락한 가문의 영애랍니다.”
“설마요. 그 아델트 공이 어째서 그런 가문의 여자를 만나겠어요?”
“다들 모르셨군요? 그 여자가 제 아들과 결혼하려고 갖은 수를 쓰다가 수도에서 쫓겨났는데, 그새 공작과 붙어먹었더랍니다. 그게 뭐겠어요? 신분 상승을 위해 사기를 쳐서 이뤄낸 거겠죠!”
“에구머니나! 그럼 아델트 공이 그 여자의 꾀에 넘어갔다는 건가요?”
“그런 셈이죠.”
귀부인들이 수군거렸다. 틸다는 과일 차의 향기와 맛을 음미했다. 달콤하고, 상쾌했다. 제 마음처럼!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듯 가벼웠던 그녀의 기분이 순식간에 곤두박질친 것은 케네다 부인이 입을 연 직후였다.
“몇 달 전 레트랑 백작 후계자가 시장 한복판에서 웬 레이디에게 얻어맞았다더니. 그 레이디가 부인께서 말씀하신 여자인가 봅니다.”
“…… 네?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는 건지…….”
“제 하인 하나가 그날 시장에 나갔다가 목격했다더군요.”
“제 아들이……. 그년… 아니, 그 애한테 맞았다고요? 그럴 리가요. 아무리 부인께서 알고 계신 것이 많다고는 해도. 설마 그런 낭설을 믿으시는 건 아니시겠죠?”
“레트랑 부인. 저는 많은 이들에게 신뢰를 받고 있답니다.”
케네다 부인의 자신만만한 미소에 틸다가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아, 라튼 레트랑 경은 잘 지내고 있나요? 제 아들 말로는 요새 귀족 모임에도 소식이 없다던데. 레트랑 경도 바쁜가 봅니다. 부인처럼요.”
케네다 부인이 물었다. 여전히 여상스러운 목소리였다. 그러나 틸다는 단번에 눈치챘다.
‘이 여자가 내 상황을 진즉에 알고 있었구나!’
이곳에 들어서던 순간부터 전부 다 알았으면서 나를 조롱했던 게야!
틸다의 시선이 다과회의 참석한 부인들에게 옮겨갔다. 입꼬리를 씰룩거리는 것이, 전부 자기를 비웃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얼굴이 홧홧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에시안 부인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디 그뿐인 줄 아세요? 글쎄! 아델트 공의 저택에서 도둑질하다가 붙잡혔다지 뭐예요! 그 잘난 라튼 레트랑 경이 말이에요!”
이제는 모두가 깔깔거렸다. ‘에이, 그럴 리가요! 부인은 너무 재밌으시다니까.’ 따위의 말을 농담이라고 지껄이면서.
달아올라 터지려는 것이 제 심장인지 얼굴인지. 틸다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이제 더는 이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것쯤은 확실했다. 거칠게 일어서자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틸다는 끝까지 우아함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제 가문을 이리도 염려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일이 많아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더 계셔도 괜찮습니다만.”
“아니요. 서둘러 의사를 찾아가 봐야 하니까요.”
가볍게 눈인사하고 돌아섰다.
“참, 에시안 부인. 어린 정부와 한집살이는 편한지 모르겠습니다.”
“뭐, 뭐라……!”
“아! 이미 부인께서도 호위와 은밀하게 사랑을 나누고 계시다니 마음 다칠 일은 없어 다행입니다. 저도 이 소문은 비밀로 하지요. 그럼 이만.”
“레, 레트랑 부인!”
꽥꽥대는 에시안 부인을 무시하고 후원을 빠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위태롭게 유지하고 있던 옅은 미소 역시 순식간에 사라졌다.
*
며칠 내내 침대에 누워만 있던 나는 다 죽어가는 병아리처럼 골골댔다.
기운을 차리려 노력해보았으나, 뭘 하든 결국에는 엄마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모든 것에 의지를 잃고 누워만 있기를 벌써 사흘째.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일어나 탁자 위에 올려 있는 물 한 모금을 마셨다. 그러자 조금 정신이 드는 듯했다.
저택은 쥐 죽은 것처럼 조용했다. 이렇게 해가 쨍쨍한 한낮이면 하녀들이 이불빨래를 한다며 온 저택을 부산스럽게 누빌 텐데. 발걸음 소리 하나 없이, 무거운 적막만 흘렀다.
왜인지 초조한 마음이 들어 창문을 열었다. 살랑거리는 바람에 풀어헤친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창밖에서 종달새가 지저귀고, 나무를 손질하는 정원사들의 가위질 소리가 리듬감 있게 들려왔다. 나는 그제야 안도했다. 나 홀로 세상과 동떨어져 있지 않음에.
경쾌한 음악을 리듬 삼아 넋 놓고 있을 때, 내 방문 앞에서도 무언가 툭,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불러도 아무 대답이 없자 곧장 문을 열었다. 그러자, 정체 모를 상자 더미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이, 이게 다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