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시아라는 한참을 울부짖다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제 눈앞에서 맥없이 쓰러지는 그녀를 붙잡으려 라튼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아델트 공작이 더 빨랐다. 공작은 시아라의 몸이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 그녀를 품에 안아 들었다.
“손 치워.”
시아라의 어깨 가까이 뻗었던 라튼의 팔이 허공에서 멈췄다. 이대로 보내고 나면 영영 마주칠 일이 없겠지. 네 어머니를 죽인 여자의 자식. 이렇게 끔찍한 나를, 네가 돌아봐 줄 일은 두 번 다시 없겠지. 라튼은 모든 순간을 후회했다. 제 손으로 그녀를 멀어지게 했었던, 자신이 그녀보다 위에서 군림하고 있다 여겼던 그 모든 순간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공작의 품에 안겨 나가는 시아라를 멀거니 바라보는 것 말고는. 저 가녀린 어깨를 쓰다듬어 주고 싶은데. 기운 내라고 두 손을 꼭 잡아주고 싶은데. 당장이라도 달려가 끌어안고 싶은데. 라튼은 가까이 다가갈 자격조차 없었다. 자신이 그토록 믿었던 엄마로 인해 잃은 것은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과 함께 할 인생이었다. 그것 또한 이제야 깨달은 저 스스로가 너무 한심스러워서, 고개 숙여 눈물을 떨구는 것 말고는 정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집무실을 나서던 아델트 공작의 발걸음이 멈췄다.
“네 가문은 그녀가 상처받은 만큼 되돌려 받을 것이다.”
“…… 죄송합니다.”
“끔찍하군. 네 어미도, 아비라는 작자도 전부.”
“용서받을 생각 없습니다.”
“잘됐네. 그녀는 용서할 생각이 없을 테니.”
공작은 무표정한 얼굴로 뒤돌아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라튼이 절망했다. 그의 세상이, 와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카시안은 시아라를 자신의 방 침대에 눕혔다. 생기를 띠었던 양 뺨이 창백했다. 하도 울어 퉁퉁 부은 눈 주변으로 메마른 눈물 자국이 선연했다. “시아라…….” 이름을 불러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가 부를 때면 늘 ‘네?’ 하고 웃어주고는 했는데. 토끼같이 예쁘장한 푸른 눈이라던가, 새초롬하게 벌어졌다 닫히는 입술이라던가. 오늘따라 미동도 없이 고요했다. 그가 애타게 부르는데도.
시아라의 손을 잡고 기도하듯 얼굴을 묻었다. 회복 마법을 사용해 그녀를 깨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는, 난도질당한 그 상처는 누가 치료해 줄 수 있단 말인가. 시아라를 위해 어떤 짓도 할 수 있었지만, 그것만큼은 자신의 힘으로 불가능했다.
이렇게 마음이 다친 그녀를 어쩌지 못하는 날이면, 세상에 자신보다 더 바보 같은 놈이 있을까 생각한다. 웃게 해주겠다고, 행복하게 해준다고 약속했으면서. 지키지도 못하는 바보. 누군가 그 방법을 알려준다면, 주저하지 않고 평생 스승으로 모시리라.
지금 카시안이 할 수 있는 것은 섬뜩한 맹세뿐이었다. 레트랑 가문, 그 역겨운 가문을 세상 가장 불행한 고통 속으로 밀어 넣겠다고. 그녀를 괴롭힌 벌을, 죽어서도 받게 하겠다고.
*
눈앞에 펼쳐진 호수는 은빛으로 반짝거렸다. 저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두 개의 높은 산이 호수를 감싸고 있었다. 그게 꼭 나를 안아주는 것 같아서, 금세 코끝이 시큰해졌다.
나는 호수 한가운데로 풍덩 뛰어들었다. 가볍게 몸이 떠오르자 요란스럽게 물장구를 쳤다.
“옳지, 우리 시아라 잘 하네.”
“엄마랑 아빠도 얼른 들어와요!”
따뜻한 물속을 유영하며 꺄르르 웃자, 엄마도, 아빠도. 나를 따라 환하게 미소 지었다.
“아가씨! 우리 밥 먹고 놀아요.”
유모는 잔뜩 준비해온 샌드위치를 돗자리 위에 펼치며 내게 손짓했다. 나는 유모의 말에 물밑으로 기어 올라갔다. 엄마와 아빠는 동시에 커다란 수건을 들고 와 내 몸 위로 감싸주었다. 어찌나 꽁꽁 싸맸던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펭귄처럼 뒤뚱뒤뚱 걸었다.
“엄마, 이거 한 입 먹어요. 내가 줄게! 아-.”
작은 손으로 샌드위치를 내밀자 엄마는 그것을 크게 베어 물었다. 옆에 있던 아빠가 자기는 안 주냐며 입술을 세모처럼 삐죽거렸다.
“아빠도 줄 거야!”
아빠는 커다란 샌드위치를 한입에 다 넣어버렸다. 나는 또 그게 재미있어서 깔깔거렸다.
“딸, 사랑한단다.”
아빠가 말했다.
“나도, 나도 사랑해요.”
그러자 아빠의 몸이 조금씩 투명해졌다. “아빠?” 놀란 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엄마도 우리 딸 사랑해.”
“나도. 나도 그래요.”
그러자 엄마도 사라져버렸다. 유모는 어느 샌가부터 보이지 않았다.
“다…… 어디 갔어요? 엄마? 아빠? 유모!”
늘 그랬듯, 사라진 사람들은 아무런 답이 없었다. 나는 어느새 다시 은빛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다. 몸이 무거워지며, 점점 물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살려…… 살려주세요. 가지 마요.”
나 여기 있단 말이야. 엄마, 아빠. 제발 다시 와줘요. 네? 혹시 내가 사랑한다고 말해서 그래요? 그래서 나를 떠난 거야? 이제 안 할게. 그러니까 나한테 다시 와주면 안 돼요? 나 좀 구해줘요. 제발요.
윙윙 메아리치는 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나는 그대로 가라앉았다. 그대로 숨이 멎으려던 찰나, 누군가 깊은 수렁 속에서 나를 꺼냈다. 내 뺨을 부드럽게 간지럽히는 느낌에 눈을 떴다.
“…… 오빠?”
어린 카시안이었다. “오빠.” 나는 으앙 울음을 터뜨리며 그의 목에 매달렸다.
“늦어서 미안해.”
카시안이 내 등을 어루만졌다. 그와 동시에, 현실로 돌아왔다.
*
눈을 뜨니 온몸이 땀으로 젖어 축축했다. 몸을 일으켜 세우려다가 갑자기 어지러워 몸을 휘청거렸다. 곁에서 잠들었던 카시안이 기척을 듣고 눈을 떴다.
“일어났어? 괜찮아?”
“네. 좀 어지러운 것만 빼면…….”
“벌써 이틀째 누워 있었어.”
“아…….”
“걱정했어. 혹시라도 잘못될까 봐.”
“…… 오빠도… 알고 있었죠?”
내 물음에 카시안이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해.”
“…… 미리 말해주지. 아니면…… 아예 모르게 해주지.”
“내가…… 잘못했어.”
나는 하염없이 흐느꼈다. 카시안의 잘못이 아닌데, 자꾸만 누구라도 탓하고 싶었다. 제일 못난 사람은 엄마를 원망했던 나였으면서.
“엄마가…….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어떻게 해요. 우리 엄마 불쌍해서 어떻게 해…….”
커다란 손이 나를 끌어안고 울지 말라 말했다. 네가 울면 나도 아프다고. 그러니 제발 슬퍼하지 말라고. 나는 그 뒤로도 몇 번이나 잠들었다 깨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카시안은 내 옆에 있었다.
퉁퉁 부은 눈으로 카시안을 올려다보았다.
“혹시 아직 말 안 한 거 있으면 지금 다 말해줘요.”
“그런 거 없어.”
“있잖아요. …… 예카틸리나. 그 애가 도대체 뭔지, 말 안 했잖아요.”
당황한 카시안이 손사래 쳤다.
“말을 안 하려던 게 아니라……! 괜히 걱정시켰다가 오해였을까 봐.”
“그래도 미리 알고 조심하는 게 더 좋잖아요.”
“…… 하아. 그 여자, 엘리나 트리탄의 밑에서 일했던 여자 같아.”
“네? 예카틸리나가요?”
“응. 내 저택에서 하녀로 일하면서 첩자 노릇을 했어.”
“그런데 왜 저한테……. 엘리나가 죽은 일로 복수라도 하겠다는 걸까요? 자기 주인이 죽어서?”
“아니.”
카시안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예카틸리나 그 애도 엘리나와 함께 죽었거든. 지하 감옥에서.”
“…… 네?”
“정확히 말하면, 죽은 줄 알았던 거지. 그 여자 얼굴에 입은 화상자국. 전부 독약 때문에 타들어 간 거야.”
나는 경악했다.
“엘리나가 독약을 뿌린 거예요?”
“응. 그 뒤에 엘리나는 예카틸리나의 칼에 맞아 죽었어.”
“그럼 서로 치고받고 싸우다가 그렇게 된 거란 말이에요?”
“응.”
“어떻게 그런 끔찍한…….”
멍청한 짓을…….
“안더스가 엘리나를 데려갈 때 예카틸리나도 함께 데려갔어. 그런데 가는 길에 그 애는 버렸다더군. 죽은 줄로만 알았겠지.”
“그 후에 떠돌다가 치료 시기도 늦었고. 결국에는 그런 꼴이 된 거군요.”
카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그럼 나스티아는…….”
“아나스타샤. 그 하녀의 이름이야. 나스티아는 제 엄마가 불렀던 애칭이었겠지.”
“그 말은, 예카틸리나가 그녀의 엄마 이름?”
“아마도.”
눈을 뜨자마자 듣게 된 충격적인 이야기에, 나는 또 다시 기절했다.
*
라튼 레트랑은 거실에 앉아있는 제 엄마를 무시하고 지나쳤다.
“아들, 이제 왔니? 기사단 훈련이 늦게 끝난 모양이구나.”
“…….”
“밥은 먹은 거야? 이 엄마 걱정시키지 말고 든든히 챙겨 먹어야지.”
라튼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틸다가 짜증스레 말했다.
“네가 왜 이 엄마를 자꾸 서운하게 하는지 모르겠구나.”
울컥. 심장이 아렸다.
“그걸 아직도 모르신다고요?”
“응. 내가 너에게 이런 푸대접이나 받자고 너를 키운 줄 아는 거니?”
“저는 엄마한테 어떤 것도 요구한 적이 없어요. 전부 엄마가 시키는 대로 했지. 그러다 딱 한 번. 제가 감히 바랐던 일이 뭐였는지 아세요?”
틸다가 말해보라는 듯 턱짓했다.
“시아라와 결혼하겠다고 한 것. 그게 제가 꿈꿨던 일이었죠.”
피식 웃는 제 엄마의 얼굴에 라튼의 분노가 부글부글 끓었다.
“제일 후회하는 일이기도 하고요.”
“그렇지. 후회해야지. 그 집안은 우리 집이랑 너무 급이 안 맞았잖아?”
“안 맞죠. 우리 집이 이렇게 쓰레기인 줄은 저도 몰랐으니까.”
“뭐야?”
“엄마는……. 그 애한테 아주 몹쓸 짓을 하셨더라고요.”
“내가? 나는 그 집에 돈을 빌려준 죄 밖에 없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그 애 엄마를 죽였잖아!”
순간, 틸다가 흠칫 놀라며 두 눈을 크게 떴다.
“헛소문을 듣고 왔구나.”
“다 알고 하는 말이니 발뺌할 생각 마세요.”
“…… 아니라고 했잖아!”
“엄마. 그냥…… 시아라한테 사과하세요. 오늘, 아니 내일이라도 좋으니 제발 그냥 싹싹 비세요.”
라튼이 호소했다.
“그 애 앞에 무릎 꿇고. 다 인정하세요. 엄마가 그동안 저질렀던 짓들.”
“허튼소리.”
틸다가 완강히 거부했다.
“…… 아델트 공작도 이 사실을 다 알아요. 그게 무슨 소리인 줄 아시죠?”
“…….”
“우리 가문이 몰락하고, 우리도 다 죽을 거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더더욱 사과하지 않는 편이 좋겠구나.”
“네?”
“그 피도 눈물도 없는 공작이 내가 사과한다고 우리를 용서할 것 같니?”
엄마의 말 같지도 않은 논리에 라튼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의 얼굴이 지쳐 보였다.
“사과해도, 하지 않아도. 어차피 같은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면, 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구나.”
“정말 엄마는……. 마지막까지…….”
더는 대화하기를 포기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틸다는 며칠 전 예카틸리나가 했던 제안을 떠올렸다.
[“제 얼굴을 고쳐주세요. 그럼 제 한 몸 다 바쳐서 부인 편에 설게요.”]
틸다는 그녀가 알려준 주소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제안의 답은 물론, 동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