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3층 집무실에 카시안과 나, 라튼이 앉아있었다. 언젠가 겪었던 상황과 비슷했다. 그때와 달라진 것은 나를 대하는 라튼 레트랑의 태도였다. 자신이 잘못해놓고도 뻔뻔하게 굴던 저번과는 달리, 오늘은 내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군기가 바짝 들어가 있었으니.
라튼은 아직도 눈물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 사실 다음번에 너와 공작님을 만나면… 내 손에 걸린 저주나 풀어 놓으란 부탁을 하려 했어.”
“저주라니?”
“아델트 공작님이 내 손에 마법을 걸어놨거든.”
처음 듣는 이야기에 카시안을 바라보았다.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지금도 너무 아파. 너랑 같은 공간에 있으니까, 손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고통스러워.”
“그래서, 지금 나한테 그거 풀어달라고 온 거야?”
라튼이 세차게 도리질했다.
“…… 아니라고는 못 해. 당장 해결해 준다면 감사하다고 넙죽 엎드릴 수 있을 만큼 아프거든. 근데…….”
또 울컥하는지 아랫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그 탓에 입술 위로 그의 머리카락처럼 붉은 핏방울이 맺혔다.
“근데 그런 부탁 절대 못 해. 시아라, 꼭 해야 할 말이 있어.”
“질질 끌지 말고 얘기해.”
“그게……. 그러니까 그게 말이야…….”
그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떨궜다.
“우리 엄마가…….”
그 뒤에 라튼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심장을 난도질했다.
“네 어머니를 죽였어.”
더는 손 쓸 새 없이 찢겨 발겨진 것도 모자라 멈춰버렸다. 심장은 뛰는 법을 몰랐고 내 시간은 영원히 정지한 것만 같았다.
“미안해……. 미안해…….”
“…… 어?”
“이 말 말고 너에게 할 말이 없어.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이게 지금 현실이 맞나? 꿈은 아닐까? 나는 머리를 뒤흔들었다.
“라튼…….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시아라…….”
“왜……. 왜 우리 엄마가……. 왜……?”
“…… 미안해.”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응? 알아듣게 얘기해. 장난치지 말고, 응?”
라튼은 또다시 무릎을 꿇었다.
“그러지 마. 네가 그러면 진짜 같잖아. 네 말이 진짜라서 그러는 것 같잖아. 아니라고 해. 그런 거 아니라고 해. 제발. 라튼, 제발 아니라고 해!”
소파에서 일어나 라튼을 향해 다가갔다. 라튼의 양팔을 붙잡고 흔들었다.
“…… 아니잖아. 네 엄마가 그런 거 아니잖아. 그치, 그럴 리 없잖아. 그러면 안 되잖아.”
나는 오열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집무실이 눈물에 잠길 듯, 그렇게 울고 있었다.
“제발 아니라고 하란 말이야…….”
“…… 미안해.”
주먹에 힘을 줘 라튼의 어깨를 때렸다. 한참이나 악을 썼지만 라튼은 내가 원하는 답을 내어주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주르륵 주저앉았다. 어느샌가 내 곁으로 온 카시안이 내 등을 감싸 안았다.
“내가……. 내가 너를 만났던 대가가…… 우리 엄마 목숨이라고…….”
엄마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아니기를 바랐다. 삶이 고달파 사라져버렸다는 것이 너무 믿기 힘들어서. 부디 의도치 않은 사고였길 간절히 바랐다. 어느 쪽이든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죄책감이 덜 했으니까. 그런데 왜……. 엄마 스스로 강에 몸을 던진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도 믿고 싶지 않은 걸까. 왜 라튼의 말이 차라리 거짓이길 바라는 걸까.
참담하고 애통했다.
온몸에서 피가 싹 빠지는 기분이었다. 힘이 없고 눈앞이 아득했다. 카시안과 라튼이 애타게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귓가에 왕왕 울렸다. 소리는 점점 멀어지고, 깊은 바다 속에 빠진 듯 더는 아무것도 선명하지 않았다.
*
틸다 레트랑은 세상에 혼자 버려진 기분이었다.
남편과의 사이는 원래부터 소원했다고 치더라도, 아들 라튼 만큼은 그래서는 안 됐다. 불쌍한 제 어미를 이렇게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지 않은가. 술에 취한 라튼이 모진 말을 내뱉으며 제 방에 있던 물건을 다 집어 던졌던 그 날. 틸다는 세상이 노래지는 기분이었다. 아들에게 버림받은 뒤로, 그녀는 완벽하게 고독했다.
침대에 몸져누운 틸다에게 하녀가 넌지시 말했다.
“마님. 밖에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지금 내가 손님 맞을 때처럼 보이니?”
앙칼진 목소리에 하녀가 우물쭈물하며 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이 쪽지를 꼭 전해 달라 했어요.”
틸다는 짜증스레 종이를 펼쳤다.
- 복수하고 싶으시죠? 도와드릴게요. –
글씨체는 엉성했고 철자도 다 틀렸다. 무슨 이따위 장난을 치는 거람? 열불이 나서 쪽지를 찢으려는데, 마지막 문장이 틸다의 시선을 붙잡았다.
- 부인께서 찾으시는 여자를 잘 알거든요. –
틸다의 눈동자가 형형했다.
“당장 들여보내.”
*
틸다 레트랑은 응접실에 들어선 정체 모를 여인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값비싼 드레스를 걸치고는 있었으나 기품이라고는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도대체 언제 세탁한 건지 모를 누런 붕대는 또 뭐고!
‘설마 이 여자 농간에 속은 건가?’
시아라가 예전에 잡화점에서 일했던 것을 생각하면 딱 수준이 맞아 보이기는 했으나. 지금은 돈 몇 푼 생겼다고 귀족 행세를 하고 있지 않던가. 꼴사납게 시리. 틸다는 서슬 퍼런 눈을 치켜떴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은 여자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레트랑 부인. 예카틸리나라고 합니다.”
“그래. 나를 어떻게 알고 찾아왔지?”
“사실 저는 부인을 모릅니다. 제가 알고 있는 건 시아라, 그 애거든요.”
“나를 알지도 못하면서 복수니 뭐니 그런 말을 왜 떠들었냐는 말이다.”
예카틸리나가 히죽 웃었다.
“아아-. 그거야. 제가 다 봤거든요.”
“뭐를?”
“부인께서 시아라에게 두들겨 맞고 있던 걸요.”
틸다 레트랑이 벌떡 일어섰다.
“지금 뭐, 뭐라 그랬지?”
“죄송해요. 혹시 제가 너무 예의가 없었나요?”
틸다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것을 넘어 말문까지 막혀버렸다. 뭐 이런 계집애가 다 있어?
“제가 귀족이 아니라 예의를 잘 모르거든요.”
“알다마다.”
당장이라도 저 배워먹지 못한 여자를 집 밖으로 내쫓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뭐라던가. 시아라 그년에게 자신이 당했던 것을 목격했다고? 그나마 그 찻집에 아무도 없었던 것을 위안 삼으며 안도하고 있었는데. 목격자가 있었다니! 으드득 이 가는 소리가 응접실에 메아리쳤다.
틸다는 고민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나불거리는 저 여자의 입을 막아버리던가, 이 자리에서 당장 없애버리던가. 아니면 입을 막은 채로 죽여 버리던가! 그러나 뭐가 되었든, 일단은 침착해야만 했다. 그 자리에는 확실히 아무도 없었으니까! 어쩌면 시아라 그 계집애가 보낸 첩자일 수도 있을 테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있지도 않은 일을 내 앞에서 거들먹거리는 저의가 뭐지?”
그러자 예카틸리나가 답했다. 이 상황이 아주 재밌어 미치겠다는, 그런 목소리로.
“부인. 그런 치욕이 모른 척한다고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 이, 이 년이 뚫린 입이라고……!”
“제가 똑똑히 봤거든요. 기절한 부인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다가 구석에 처박히는 모습을요.”
틸다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테이블 아래서 양 주먹을 말아 쥐며 파들파들 떨었다.
제 앞에 앉은 귀족 부인의 동공이 파르르 흔들리는 것을 목격한 예카틸리나가 키득거렸다. 역시-. 너무 즐거웠다.
그날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감옥에서 카산드라의 면회를 마친 이후, 더위나 식힐 겸 시장에 있는 찻집에 들어갔다. 그러나 시원한 물을 마시고 아무리 손부채 질을 해본들 한낮 무더위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피부에 난 상처 위로 땀방울이 맺히며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화장실에 가서 물로 씻어낸 뒤 다시 돌아왔을 때, 어찌 된 일인지 손님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방금 전까지는 시끌벅적했는데 말이다. 순식간에 변한 분위기에 구석에 숨어 상황을 살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찻집 한가운데에 앉아있는 게 시아라 아니던가!
곧이어 들어온 귀족부인과 시아라가 대판 싸우기 시작했다. 잔꾀가 많은 예카틸리나는 돌아가는 상황만으로도 두 여자의 관계를 파악했다. 저 귀부인이 시어머니라도 될 뻔했나 보지? 저 여자의 아들을 뻥- 차고 만난 게 아델트 공작인 거고.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가며 재미있는 연극이라도 보듯 두 사람을 관찰했다.
연극의 하이라이트에 이르러 귀부인이 시아라의 따귀를 때리려 했다. 바로 그때, 시아라의 목걸이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귀부인을 바닥으로 내리꽂는 것이 아니겠는가. 널브러진 귀족을 지켜보던 예카틸리나의 만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러나 곧 생각에 잠겼다. 목걸이에서 마법이 발현하다니! 아델트 공작이 마법을 못 쓴다던 소문은 다 거짓이란 말인가? 그녀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마법사는 무슨 수로 이겨야 하지? 또 다른 마법사라도 고용하지 않는 이상 승산이 없어 보였다. 예카틸리나의 미간이 한껏 찌푸려졌다. …… 방법은 천천히 찾아보기로 하고. 일단 시아라한테 함부로 손을 대면 안 되겠어. 저렇게 쓰레기처럼 바닥에 널브러지는 꼴은 당하기 싫으니까.
그날 밤 아델트 저택에서 치료를 받고, 다음 날 시아라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때. 시아라는 보란 듯이 그 푸른색 목걸이를 차고 나타났다. 저 목걸이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던 예카틸리나는 자신을 시험해보려 애쓰는 시아라가 우스웠다. 속으로는 그녀를 조롱하며 더욱 과장되게 행동했다.
저택에서 시아라를 해치지 않았던 이유는 딱 하나였다. 그 상황이 즐거웠다. 그녀가 겁먹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소름 돋게 즐거웠다. 고귀한 귀족이 나를 무서워하다니!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마음껏 즐기다가, 천천히 피 말려 죽게 할 거야. 게다가 지금 시아라가 죽어버리면 내 얼굴은 누가 고쳐줘?
얼굴 가죽을 덧대는 수술을 하는 데 필요한 것은 당연히, 돈이었다. 애초에 시아라에게 뜯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 여자의 경계가 어찌나 심하던지.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빨리 포기하는 것이 나았다. 때마침 적당히 구슬려 먹을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던가. 시아라처럼 돈이 많고, 자신처럼 시아라에게 복수를 꿈꾸는 여자. 미천한 평민에게 제 치부를 들킨 모욕감에 온몸을 바들바들 떠는 이 여자.
틸다 레트랑이 예카틸리나의 새로운 제물이었다.
예카틸리나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며 물었다.
“제가 그 애를 정말로 잘 알고 있답니다.”
“…….”
“아마 제가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텐데요.”
“도움이라니?”
“당연히 복수죠. 부인도 그 애가 행복하게 사는 꼴은 보기 싫잖아요?”
예카틸리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도 마찬가지랍니다.”
“그렇다는 건…….”
“서로 돕고 살자는 말이죠.”
붕대 사이로 보이는 눈이 초승달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