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카시안과 나는 마차를 타고 서둘러 상업지구로 향했다. 예카틸리나가 공황상태에 빠졌을 때, 함께 그녀의 집으로 약을 챙기러 간 적이 있었다. 그 기억을 더듬으며 카시안을 이끌었다.
그러고 보면 카시안과 함께 상업지구를 걷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주변을 에둘러보았다. 거리 곳곳에 데이트하는 남녀가 즐비했다. 저들은 하하 호호 웃으며 밝고 화려한 행복의 시간을 보내는데, 우리는 어두컴컴하고 스산한 골목으로 진입했다. 그것이 못내 아쉬워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예카틸리나의 집 앞에 도착해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아무런 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초인종을 눌러봐야 딸깍 소리만 낼 뿐. 이미 오래전 고장 난 것처럼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문고리를 잡고 돌려보았으나 낡은 문이 흔들리며 덜컹거렸다. 그러나 단단히 잠긴 문은 열리지 않았다.
보다 못한 카시안이 손으로 문고리를 쾅, 내리쳤다. 굉음과 함께 그것이 부서졌고, 동시에 문이 열렸다. …… 이거 범죄 아니야? 영지의 주인이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간 것이 걸리기라도 하면……. 그것도 강제로 문을 다 부숴서…….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이, 이래도 괜찮아요?”
“글쎄. 필요하면 벌 받지 뭐.”
카시안은 상관없다는 듯 집 안으로 들어갔다. 바깥에 덩그러니 홀로 남은 내가 재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 역시 안으로 들어섰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예카틸리나는 집에 없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카시안은 주먹 쥔 손에 더욱 힘을 쥐었다. 텅 비어있는 예카틸리나의 집은 척 보기에도 을씨년스러웠다. 그러나 우리가 올 것을 미리 알고 도망쳐서 그렇다기보다는, 저번과 똑같은 풍경이었다. 그때도 이렇게, 사람이 살지 않는 것처럼 황량했다. 그러니 이곳저곳을 뒤져본들 마땅한 것이 나올 리 없었다.
그런데도 카시안은 쥐 잡듯이 곳곳을 수색했다. 옷장 문을 열어 옷에 달린 주머니까지 하나하나 샅샅이 뒤졌다. 몇 벌 있지도 않은 옷이 바닥으로 떨어질 때마다 공중으로 떠오른 먼지가 허공을 부유했다.
나 역시 뭐라도 돕자는 심정으로 집안을 살폈다. 방구석 작은 테이블 위에 뒤집힌 채 올려 있는 액자. 이번에도 그곳에 시선이 머물렀다. 액자가 그대로 남아있는 것으로 확신했다. 예카틸리나가 아직 여기를 떠난 건 아니구나. 하나뿐인 조부모의 사진을 두고 집을 나가지는 않았을 테니.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액자를 뒤집어 살펴보았다. 해맑게 웃고 있는 작은 아이. 푸근한 미소의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이건 뭐지?
크기가 제대로 맞지 않는 액자와 사진 사이에 아주 조그만 쪽지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액자를 열어 그 종이를 꺼내보니 짤막한 안부가 적힌 쪽지였다.
무럭무럭 예쁘게 자라렴. 사랑하는 나의 나스티아. – 카티아가 –
카티아, 그러니까 예카틸리나가 나스티아라는 사람에게 쓴 편지였다. 그런데 왜 보내지도 않고 이렇게 보관했을까? 그것도 소중한 사진이랑 같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내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뭐 이상한 것 좀 찾았어?”
“액자 속에 이런 쪽지가 있었어요.”
카시안은 내가 건넨 것을 읽으며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거 말고는……. 보다시피 아무것도 없었어요.”
쪽지에서 시선을 뗀 카시안도 긍정했다.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릴까요?”
“아니. 이만 가자.”
“왜 예카틸리나를 찾는 건지 말 안 해줄 거예요?”
“…… 나중에 말해줄게. 확실해지면.”
답답하지만…… 생각이 있어 그렇겠지. 나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
예카틸리나는 자신의 집에서 나오는 시아라와 아델트 공작을 목격했다. 무언가 눈치챈 것이 분명해 보였다. 사실 도끼눈을 뜨고 저를 째려보던 낸시를 봤을 때부터 진즉 눈치채고 있었다. 곧 저들이 들이닥치리라는 것을.
‘계획했던 일을 더 빨리 실행해야겠어.’
현관문은 다 부서져 있었다. 공작은 본인이 다녀갔다는 사실을 숨길 마음도 없었던 것이리라. 아무튼, 성질머리가 괴팍하다니까. 혀를 쯧쯧 걷어찼다. 어차피 이 집을 뒤져 가져갈 것도 없었고. 그녀 스스로 챙겨나갈 물건 또한 없었다. 딱 하나 빼고. 예카틸리나는 액자 하나 덜렁 챙겨 미련 없이 집을 나왔다. 이 낡아빠진 집과는 언제든 작별할 준비를 마치고 있었으니.
수도에 도착해 카산드라의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앞으로 제 언니 집을 제집처럼 쓰며 지낼 생각에 퍽 만족스러웠다. 아델트 저택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예카틸리나 본인의 집을 떠올리면 대저택 부럽지 않은 수준이었다. 게다가 곧 있으면 돈이 넝쿨째 들어올 것이 뻔했다. 그녀가 목격했던 무언가가, 앞으로 그녀의 인생을 꽃피게 해줄 테지. 예카틸리나는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푹신한 침대가 깃털처럼 보드라웠다.
“앞으로 이 침대는 내꺼.”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데구르르 굴러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카산드라의 옷장 문을 열었다.
“이 옷들도 다 내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가장 비싸 보이는 드레스를 골라 입었다. 귀한 옷을 차려입고 공공 마차에 오른 예카틸리나가 도착한 곳은, 틸다 레트랑. 멍청해 보이던 귀부인의 저택이었다.
*
아델트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에서, 카시안은 생각에 잠긴 듯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예카틸리나의 집에서 챙겨 나온 쪽지를 다시 꺼냈다.
사랑하는 나의 나스티아……. 보낸 사람은 카티아. 아무리 읽어보아도 이건 꼭 엄마가 딸에게 보내는 편지 같았다. 혹시 예카틸리나에게 딸이 있는 걸까? 그런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그 정도의 대화를 나눌 만큼 친밀한 사이도 아니었지만.
“아까 그거 보고 있어?”
어느새 눈을 뜬 카시안이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무래도 이상해서요.”
“뭐가?”
“엄마가 딸한테 보내는 편지 같은데. 예카틸리나한테 딸이 있었다면 집에 어린아이 물건 하나 없을 리 없잖아요. 이렇게 사소한 쪽지도 보관할 정도라면.”
“그렇지.”
“그럼 이 나스티아는 누굴까요?”
카시안은 짤막한 편지 내용을 소리 내 읽었다.
“나스티아. …… 나스티아라. 흐음…….”
한참이나 이름을 중얼거리던 카시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젠장. 아나스타샤.”
“네? 뭐 좀 알겠어요?”
“시아라. 아무래도 이 여자 생각보다 더 위험…….”
그때, 빠르게 달리던 마차가 급정지했다. 나는 앞으로 튕겨 나갈 뻔했다. 카시안이 재빠르게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마차 바닥에 곤두박질쳤을 것이 분명했다.
“괜찮아?”
“네. 덕분에요.”
고개를 끄덕이자 카시안이 창문을 열어 마부에게 소리쳤다.
“한스, 이게 위험하게 무슨 짓이지?”
마부가 곧장 문 앞으로 달려왔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그게……. 갑자기 앞에 사람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사람이?”
“네. 그냥 지나가는 것도 아니고. 아예 길 한가운데를 막고 서 있는지라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도대체 사람이 어디서 튀어나왔다는 거야.”
카시안은 인상을 찡그리며 마차 문을 열었다. 짜증스레 앞을 내다본 그 순간, 그의 얼굴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나 역시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초록의 잎이 무성한 숲 한가운데에, 완벽한 대비를 이루는 빨간 머리카락의 사내가 서 있었다.
“…… 라튼?”
나는 곧장 마차에서 내렸다.
혹시 착각일까? 미동도 없이 가만히 서 있는 붉은 머리의 사내를 보며, 나는 눈을 비벼 떴다. 몇 번이나 같은 동작을 반복해보았지만, 길목에서 마차를 막고 서 있는 이는 라튼 레트랑. 그가 확실했다.
“라튼. 위험하게 이게 대체 뭐 하는 거야.”
“…… 시아라.”
“다시는 찾아오지 말랬잖아. 왜 또 여기까지 온 거야? 설마 아직도 분이 안 풀렸니?”
“아니야. 난 그냥……. 네가 오기를 기다렸어. 할 말이 있거든…….”
“하, 날 기다려? 여태 정신 못 차린 거야?”
라튼에게 따질 기세로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카시안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발이 묶여버린 나는 그 자리에서 씩씩거렸다.
“거기서 뭐 하고 있어? 저리 가! 꼴도 보기 싫으니까 내 눈앞에서 제발 좀 사라지라고!”
그때였다. 라튼 레트랑이 난데없이 무릎을 꿇은 것은.
“!”
“안 가. 아니, 못 가.”
“…… 너, 너……! 왜……!”
너무 놀라면 말문이 막힌다더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라튼의 행동에 어떤 말도 잇지 못하고 그저 경악했다. 놀라 벌어진 입은 다물어지지도 않아서, 나는 그냥 턱을 내려놓았다. 그다음은 더욱더 가관이었다.
“…… 미안해.”
갑자기 이사람 왜 이래?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변한다더니, 혹시 어디 아픈 게 아닐까?
사실 며칠 전 제 엄마 틸다를 괴롭혔던 일로 내게 따지러 왔다고 생각했었기에, 나는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시아라…… 정말 미안해…….”
처음이었다. 라튼의 입에서 나온 미안하다는 말이 이토록 진심으로 느껴진 적은. 그러니 내 추측은 갈수록 확실해져 갔다. 맞나 봐. 진짜 어디 아픈 건가 봐!
“너 진짜 왜 그래? 갑자기 찾아와서 도대체……. 라튼, 나 진짜 네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미안해. 내가 너한테 해 줄 말이 이것밖에 없어.”
“그러니까 뭐가 미안하냐니까?”
“…… 그건.”
이유는 말도 안 하고 계속 우물쭈물하는 라튼 때문에 속이 뒤집힐 노릇이었다. 라튼은 그 뒤로도 똑같은 말만 반복했다. 밑도 끝도 없이 ‘미안해.’라는 말만. 처음에는 멀찍이 서 있는 나를 향해 큰 소리로 사과하더니, 점차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를 마주하던 라튼의 얼굴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내 손바닥 위로 얼굴을 묻고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나는 카시안을 올려다보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카시안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러나 그 미소가 즐거워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엉엉 울고 있는 라튼의 표정과 어딘지 모르게 겹쳐 보였다. 이 두 남자는 오늘 내 속을 뒤집어 놓을 생각인 걸까? 왜 이러는 걸까?
“하아……. 알겠으니까 들어가서 얘기해.”
괜스레 싱숭생숭한 마음을 뒤로하고, 다시 마차에 올라탔다. 먼저 출발한 마차가 라튼의 곁을 지나쳤다. 아직도 무릎을 꿇고, 하염없이 울부짖는 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