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훈련을 마친 라튼 레트랑이 황실 연무장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정문을 지나쳐 넓은 도로변으로 나올 때까지도 엄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벌써 이틀 내내 이 앞에서 자신을 기다린데다가, 아침 식사를 하면서 오늘도 마중 나오겠다고 했었는데. 라튼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먼저 집으로 돌아가신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요즘 엄마를 볼 때마다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몇 년이나 옆에서 그녀를 보좌하던 아리안이 갑작스럽게 떠난 일로, 엄마는 적지 않은 상처를 받은 듯했다. 배신자라고 아리안을 욕하면서도 다시 돌아오기만을 내심 바라는 눈치였으니. 다른 기사들을 대동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고 계속 혼자 다니는 것을 보면.
아버지는 신경과민을 앓는 사람처럼 부쩍 짜증이 심해졌다. 가신들이 식사하시라고 한 마디 건넸을 뿐인데도 돌아오는 것은 당장 방에서 나가라는 욕설뿐이었다. 가족들, 특히 엄마와는 말도 섞지 않았고, 스스로 집에서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마치 유령처럼.
라튼은 엄마에게 괜히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본인 역시 자신의 아버지처럼 굴었으니. 생각해 보면 엄마가 잘못한 일도 아니었지 않던가. 잘잘못을 굳이 따지자면…….
옛 연인을 떠올리려던 라튼이 생각하기를 멈췄다. 그녀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려보아야 결국 제 손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랴.
다시 제 엄마를 떠올렸다. 불쌍한 우리 엄마. 얼마나 외로웠을까. 집에 가서 오랜만에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봐야겠어. 그간 엄마와 대화가 부족했음을 반성하며 저택으로 들어섰다.
“나 왔어.”
하지만 누구도 라튼의 귀가를 반기지 않았다. 아니, 아무도 그가 왔음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까. 분주히 돌아다니는 가신들의 낯빛에 당황스러움이 그득 묻어나왔다. 그뿐 아니라, 착 가라앉은 집 안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하녀들은 유난스럽게 엄마의 침실을 왔다 갔다 하고, 기사들은 죄지은 사람처럼 창백한 안색이었다.
“무슨 일이야?”
라튼은 지나가는 하녀 하나를 붙잡고 물었다. 하녀는 화들짝 놀라며 틸다의 침실을 가리켰다.
“마, 마님께서…….”
시선을 피하고 말을 잇지 못하는 하녀의 표정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낀 라튼이 곧장 그 방으로 향했다.
“…… 엄마?”
문을 열자마자 엄마가 보였다. 침대 위에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는 그녀가. 놀란 라튼이 단박에 그녀의 곁으로 달려갔다.
“엄마!”
그나마 다행인 것인지 숨은 붙어 있었다. 그러나 미동도 없이 꿈쩍하지 않았다. 라튼은 곁에 있던 하녀를 향해 언성을 높였다.
“이게 지금 무슨 일이야! 엄마 상태가 왜 이런 거지?”
“네, 네……?”
하녀가 잘근잘근 입술을 씹으며 우물쭈물하자 라튼이 더욱 크게 성을 냈다.
“당장 말하지 못해? 무슨 일이냐고!”
“그, 그게……. 찻집에 쓰러져 계신다고 연락을 받았어요. 저희도 어찌 된 일인지 영문을 몰라 뭐라 말씀을 드려야 할지…….”
“뭐? 어디서 쓰러져? 찻집? 지금 엄마가 난데없이 밖에서 기절했다고 말하는 거야?”
하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사, 사람이 하나 와서는 마님께서 괴, 괴한의 습격을 받았다고 전하고는 사라졌어요. 그게 다예요. 저,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하, 그걸 지금 말이라고. 엄마를 모셔 온 사람이 누구야.”
라튼의 윽박에 하녀가 손가락으로 복도에 서 있던 루카스를 가리켰다. 루카스는 라튼과 눈을 마주치자 곧바로 시선을 피하고 고개를 숙였다. 라튼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복도로 나갔다.
“네 입으로 직접 말해 봐. 저 하녀가 말한 게 전부 사실이야?”
“…… 네.”
루카스의 눈동자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라튼은 그런 기사의 정강이를 발로 걷어찼다.
“이 쓸모없는 자식. 넌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기사면 기사답게 엄마를 지켰어야 할 거 아니야!”
“마님께서 혼자 외출하고 싶다 하셔서…….”
“닥쳐!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또 한 번 같은 부위에 발길질하며 기사에게 윽박질렀다.
“…… 죄송합니다.”
“당장 말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도대체 어디서 일어난 건지.”
루카스에게 위치를 전해들은 라튼은 곧장 시장으로 향했다.
‘감히 어떤 자식이 시장 한복판에 있는 가게에서 겁도 없이 귀족 부인을 건드려?’
간이 배 밖으로 나왔나. 그 쓰레기 같은 자식! 만나기만 해봐라. 아주 반쯤 죽여 놓을 테니!
찻집에 도착한 라튼이 주인에게 따져 물었다. 그러나 주인은 입에 풀이라도 발라 놓은 것인지 고개만 가로저었다. 모르쇠로 일관하는 주인의 태도에 라튼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말을 타고 급히 달려오느라 땀범벅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을 짜증스럽게 쓸어 넘기며 화를 냈다. 그제야 주인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러나 앵무새 같은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저는 정말 본 게 없습니다. 그때 마침 시장 광장에서 이상한 굉음이 들려서 저와 손님들 모두 밖으로 나갔거든요.”
“하필 그때 전부 밖으로 나갔다고? 그 말을 지금 나더러 믿으라는 거야?”
“진짜입니다. 제가 감히 레트랑 백작 후계자님을 상대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주인은 벌벌 떨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라튼은 화를 삭이려 애쓰며 찻집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손님들은 너무나도 여유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엄마는 오늘 이곳에서 괴한의 습격을 받았다는데! 울컥하는 마음에 자꾸만 입 밖으로 욕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네 말에 거짓이 하나라도 섞여 있는 것이 드러난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으름장을 놓는 라튼을 향해 찻집 주인이 고개를 숙였다.
밖으로 나가는 라튼 레트랑의 뒷모습을 보며, 주인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도 어쩌랴. 아까 자기에게 돈을 쥐여 준 이들은 아델트 공작 가문의 사람들이었는데. 귀족이라고 다 같은 귀족이던가? 돈이 많아 보아야 레트랑 가문은 백작이고, 상대는 공작 가문인걸. 자신이 왜 이런 일에 엮이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이왕 붙어먹을 거면 더 잘 난 곳에 붙어 조용히 몸을 수그리고 있으면 되는 법이었다.
그때, 맞은편에 앉은 손님 하나가 주문을 위해 손을 번쩍 들었다. 주인은 라튼에게 향했던 시선을 거두고 서둘러 주문을 받으러 갔다. 어차피 자신과는 상관도 없는 귀족들의 싸움. 그런 시답잖은 일에 신경 쓸 만큼, 주인은 여유롭지 못했다.
*
결국에는 아무런 수확도 없이 돌아가는 길이 아득했다. 엄마가 저렇게 되었음에도 범인을 찾지 못한다니……! 어쩌지? 엄마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아니면 치안대에 가서 신고라도 해야 하나?
라튼은 자신의 무력함에 절망하며 말 위에서 갈팡질팡했다. 집이 코앞임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역시 지금 신고하고 오는 게 좋겠어.’
말의 고삐를 당겨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려던 그때, 집 앞 골목에서 수상한 기척이 느껴졌다.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라튼은 말에서 내려 천천히 골목을 돌았다.
“거기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라튼의 목소리가 들리자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솟아 나왔다. 그림자의 정체를 살피던 그의 한쪽 눈썹이 찌푸려졌다.
“아리안?”
라튼의 목소리에 아리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아리안을 보며 붉은 머리의 사내가 빈정거렸다.
“네가 여기를 무슨 염치로 찾아온 거지?”
“도련님.”
“그따위 호칭은 집어치워. 누가 너한테 도련님 소리 듣고 싶대? 엄마를 배신한 배신자 주제에.”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됐어. 네 말은 듣고 싶지 않아. 지금 너랑 이러고 있을 시간도 없고.”
“아니요. 꼭 들으셔야만 합니다.”
“됐다고 했잖아!”
“시아라 양에 관련된 일이니까요.”
아리안의 입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나오자 라튼이 흠칫 놀랐다.
“누구?”
“시아라 양이요.”
“네가 뭔데 그 애의 이름을 입에 올려?”
“레트랑 부인께서 시아라 양의 어머니를 죽였습니다.”
아리안은 뜸 들이는 기색도 없이 곧장 본론부터 말했다. 휘둥그레 눈을 뜬 라튼의 얼굴에 황당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제 머리를 세차게 헤집어 털어내며 어처구니없다는 듯 대꾸했다.
“오늘 무슨 날인가? 하루 종일 별 거지같은 소리만 듣고 있네. 누가 누굴 죽였다고?”
“마님께서 시아라 양의 어머니 에벨 부인을…….”
“닥쳐. 닥치라고.”
“…….”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나 할 거면 당장 내 눈앞에서 썩 꺼져. 이게 지금 누구를 살인자로 매도해. 너 미쳤어? 갑자기 정신이 어떻게 된 거야?”
그러나, 라튼의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 아리안은 침착하게 답했다.
“도련님. 저는 거짓말은 안 합니다.”
“너…… 오늘 엄마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알고 이러는 거야? 엄마가 어떤 꼴을 당했는데!”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괴한의 습격을 받고 쓰러졌어. 그것도 수도의 시장에서!”
“…… 예?”
“그래서 안 그래도 힘든데 도대체 너까지 찾아와서 왜 헛소리야. 너는 엄마랑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
“…… 라튼 도련님.”
“아니면 욕 좀 먹고 제 발로 뛰쳐나간 일이 억울하다고 엄마랑 내 사이를 이간질이라도 시키고 싶은 거야?”
“마님께서 험한 일을 당하신 것은 안타까우나. 그것이 제 잘못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이미 레트랑 가문을 떠난 사람이니까요.”
단칼 같은 아리안의 대답에 라튼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피도 눈물도 없는 새끼 같으니라고. 너 같은 것도 가족이랍시고 여태껏 우리 가문 돈으로 먹여 살려준 게 원통하네.”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든 저는 오늘 이 말을 꼭 전해드려야만 합니다. 시아라 양의 어머니가 그리된 것은 마님이 저지른 일이라는 걸요.”
“어디서 그런 소문을 듣고 왔는지도 몰라도 네 말은 안 믿어.”
“소문이나 거짓말이 아닙니다. 제가 그 자리에 있었으니.”
“뭐?”
“저는 본 대로 전할 뿐입니다.”
분노로 길길이 날뛰던 라튼의 표정이 점점 창백하게 굳어갔다.
“도련님은 선택하셔야 합니다.”
“선택이라니.”
“아델트 공작 또한 이 사실을 알고 있거든요.”
“…… 누가?”
라튼의 입이 떡 벌어졌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경직된 양손이 따끔거렸다. 그럴 리 없잖아. 다 헛소리잖아. 저거 다 거짓말이잖아! 아니라고 말해. 당장!
애원하는 눈으로 아리안을 응시했다. 그러나 자신의 바람과는 달리, 아리안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등을 돌렸다. ‘선택이 빠를수록 좋다 하셨습니다.’ 야속하게도 이 한 마디를 남겨놓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