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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맞고 튀었는데 공작님이 집착한다-93화 (93/135)

93.

나는 틸다 레트랑 보다도 빠르게 찻집에 도착했다.

다행히 찻집 안에는 손님이 많지 않았다. 알버트와 나는 주인에게 양해를 구해 손님들을 내보냈다. 아무도 나를 모르던 저번과는 달리, 오늘은 아델트 문양이 새겨진 마차를 타고 수도를 돌아다녔지 않은가. 아델트 가문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것도 틸다와의 유치한 싸움으로.

두둑한 돈을 건네받은 주인은 싱글벙글 미소지으며 밖으로 나갔다. 이제 찻집에는 나와 알버트만 덩그러니 남았다.

알버트는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가서 앉았다. ‘큰일이 생기면 제가 꼭 나설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라는 든든한 말을 남겨두고는.

곧이어 틸다 레트랑이 등장했다. 그녀는 내가 앉아 있는 자리를 곁눈질로 살피더니, 조소하며 테이블에 앉았다.

“기억하시나요? 여기 이 자리에서 저한테 돈을 돌려받으셨어요.”

“그걸 잊을 리가 없지. 그날 이후로 내 인생이 꼬였는데!”

“안타깝네요. 저는 꽤 잘 풀렸는데.”

나는 녹차 한 모금을 마시며 방긋 미소지었다.

“그때는 여기저기 호위 기사들이 많았는데……. 오늘은 어째, 한 명도 안 보이네요?”

어깨를 으쓱하며 틸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치기 어린 분노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유난히 추웠던 겨울을 지나 벌써 뜨거운 여름이었다. 수차례 계절이 변한 그 기나긴 시간 동안, 나를 향한 그녀의 태도는 어떤 것도 변하지 않았다.

좀처럼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도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한 걸까. 왜 그렇게 화가 난 거지. 나와 엄마를 모욕한 것도, 아빠를 모함해 가문을 망가뜨린 것도. 그럭저럭 살만했던 내 일상을 파괴한 것도 다 그쪽이면서. 고작 그녀의 잘난 아들과 만났다는 이유로. 내게 돈다발을 얻어맞았다는 이유로 지금 그녀는 내게 분노하는가.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으면서.

나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커다란 한숨을 한 번 내쉬고, 마음을 다잡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여자에게만큼은 절대로 지지 않을 거라고.

“그동안 저를 찾으셨다면서요?”

“잘 아는구나.”

“왜요? 저한테 당하셨던 게 그렇게 억울하셨어요?”

“응. 억울해. 억울해서, 미칠 것 같았지! 감히 하찮은 몰락 귀족의 자식이 나를 농락해?”

“저와 제 엄마를 먼저 모욕했던 건 레트랑 부인이셨어요.”

“애초에 네가 내 아들을 만나지 않았으면 될 일이었지.”

“아아-. 그러니까 그게 다, 제가 주제넘게 아드님과 연애해서 그랬던 거구나. 다시 들어도 놀랍네요.”

틸다는 표독스러운 눈을 가늘게 떴다.

“너를 만난 이후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저를 괴롭힌 이유가 고작 그게 다예요?”

“그래. 너를 싫어하는데 더 많은 이유가 필요해야 하니?”

“하아……. 그래. 싫다는데 어쩔 수 없죠. 그런데……. 저를 찾아서 도대체 뭘 하시려는 건지 모르겠어요. 머리채라도 잡고 흔드시고 싶으셨나요?”

“그건 너무 천박하잖니.”

“…….”

“무릎을 꿇고 싹싹 비는 꼴을 봐야 그나마 마음이 풀리겠구나.”

변태야? 사이코패스야? 물론 정신이 이상한 여자라는 것은 진작에 알아차리기는 했지만. 왜 자꾸 나더러 무릎을 꿇으래. 자기가 먼저 꿇던가. 나는 혀를 내둘렀다.

“저한테 먼저 사과해주세요. 그럼 저도 할게요.”

틸다가 코웃음 쳤다.

“얘야, 다시 말하지만. 나는 네가 정말 싫단다. 너 때문에 인생이 꼬인 기분이라고!”

“저도 당신이 싫습니다. 그리고 그게 왜 저 때문이에요? 부인 인생이 망한 건 파렴치한인 부인과, 마마보이 아들. 호구 같은 남편을 두셔서 그런 거죠.”

“…… 무, 뭐라고? 네가 아주, 어른 알기를 우습게 아는구나! 쯧! 부모 없이 자란 티를 이렇게 내다니.”

“그럼 마마보이를 마마보이라고. 호구를 호구라 그러지 뭐라 그래요?”

틸다의 눈동자에 온갖 감정이 가득 들어찼다. 황당함과 당황스러움, 분노와 역정. 하물며 나를 향한 연민까지도 설핏 느껴졌다.

“그러니 두들겨 맞기도 하고, 돈도 손해보고 뭐,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틸다는 내가 한 말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눈을 끔뻑거렸다.

“저는 이제 더 이상 레트랑 가문에 감정 없어요. 어차피 라튼과는 진작에 끝났는데 제가 무슨 미련이 남았겠어요?”

나는 팔짱을 끼고 의자 뒤로 몸을 기댔다.

“다만 마음에 딱 하나 걸렸던 게 있는데. 제가 부인께 갚았던 돈 말이에요. 그게 퍽 아까웠거든요.”

“…….”

“그런데 어차피 백작님께 돈도 다 돌려받았고.”

틸다의 눈이 다시금 가늘어졌다.

“돌려받다니? 지금 그게 무슨 개소리야?”

“어라? 모르셨어요?”

“뭐를! 알아듣게 말해. 당장!!”

“레트랑 백작님께서 돈을 내어주셨어요.”

“도, 돈을 내주다니?”

나는 억척스럽게 입을 가리며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투로 말했다.

“세상에. 부부 사이에 대화가 부족하신가 봐요?”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틸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르륵, 바닥을 긁는 의자 소리가 틸다의 빨간 손톱만큼이나 날카로웠다. 그녀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내 앞으로 다가왔다.

“악독한 년.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틸다가 손을 들어 올려 허공에서 휘둘렀다. 나는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절대 눈감지 않으려 애썼다. 손이 내 뺨을 스치려던 찰나에 한쪽 눈을 살짝 찌푸리기는 했으나, 이만하면 괜찮았다. 하나도 안 무서워, 안 무섭다고. 목걸이에 매달린 보석을 꽉 움켜쥐었다.

그와 동시에.

목걸이에서 푸른빛이 쏟아져 나왔다. 틸다의 손바닥이 내 뺨에 닿기도 전이었다. 퍽-. 둔탁한 마찰음이 들렸으나 그것은 내가 아닌 틸다가 바닥을 구르며 낸 소리였다. 나무줄기처럼 뻗어져 나온 푸른빛은 그녀의 목을 옭아맸다. 그러더니 곧장, 그녀를 구석으로 내동댕이쳤다. 미지의 힘은 틸다를 이리저리 집어던졌다. 컥, 컥. 숨을 토해내던 그녀는 결국 기절하고야 말았다.

그녀가 나뒹구는 꼴을 보며, 나는 큰일을 해낸 듯 양 손바닥을 탈탈 털어냈다.

“별것도 아니면서.”

다시 한번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아침에 있던 일을 회상했다.

*

수도로 떠나기 전, 한참이나 카시안과 실랑이를 벌였다.

“아델트면 몰라. 수도에 혼자 보내기 싫다니까. 그냥 알버트만 보내자, 응?”

“이보세요, 카시안 오라버니. 저 진짜 괜찮다니까요?”

“불안해서 그래.”

“그렇게 걱정돼요?”

“시아라. 네가 조금이라도 다치면…… 나는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다고.”

카시안이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에, 나는 이쯤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뭐……. 마음이 그렇게 불편하면…… 혹시 그런 거 없나?”

내 질문에 카시안은 고개를 들어 나를 마주했다.

“건드리면 전기 오르고 사방팔방 날아다니고. 혼을 쏙 빼놓는 거. 마법으로 그런 거 못 해요?”

나는 물었다. 너무 걱정하기에 반쯤 장난으로. 그러나 그 순간, 카시안의 눈망울이 초롱초롱 빛나는 것을 목격했다.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지?”

카시안은 내가 차고 있던 목걸이를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보육원에서 발견한 일기장 속에 들어있던 그의 선물이자, 어머니의 마지막 흔적인 그것을. 푸른 보석 위로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아무렇게나 쓱쓱 선을 그렸다. 정말 대- 충 하는 것 같아 기대도 없이 멀뚱히 지켜만 보고 있었는데.

“됐다.”

“…… 되긴 뭐가 돼요. 장난친 거죠?”

무성의해 보이던 행동에 내가 되묻자 카시안이 피식 웃었다.

“네 목숨 가지고는 장난 안 쳐.”

나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널 건드리는 누구든 팔다리를 못 쓰는 최후를 맞이하게 해줄게.”

오늘 나와 동행하게 될 알버트를 떠올렸다. 그 말인즉슨, 알버트가 날 마차에 태우기 위해 손이라도 잡았다가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거야? 무슨 이런 끔찍한 마법을……!

“저기 공작……. 아니, 오빠?”

“응.”

“혹여 알버트 님이나 트리탄 후작님이 제 몸에 스치기라도 한다면…….”

사르르 눈을 접은 카시안이 싱그럽게 웃었다.

“알버트는 내 가족이잖아.”

똑똑. 때마침 알버트가 방문을 두드렸다.

“시아라 아가씨, 이제 출발하셔야 합니다. 준비는 다 마치셨나요?”

“…… 네! 곧 나갈게요!”

마차에 올라타자 카시안이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

“조심히 다녀와.”

카시안은 또다시 내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허공에서 멈칫했다. 살짝 주먹을 쥔 손이 이마에 콩 닿았다 떨어졌다. ‘지켜줄게, 이 오빠가.’ 이 한 마디를 남겨 놓고는.

그리고…….

걸렸다. 그것도 틸다 레트랑, 마주치면 몇 번이고 더 골려주고 싶었던 그 여자가.

그녀는 넝쿨째 굴러 들어온 호박이요, 새로운 마법 도구를 시험할 첫 제물이었다.

*

마법의 효과는 생각보다도 훨씬 뛰어났다. 그냥 나가떨어진 정도가 아니라 아예 기절을 해버렸으니.

순간 묘한 감정이 들었다. 틸다 레트랑이 저리도 조용했던 적이 있었던가?

아니, 한 번도 없었다. 이번이 딱 세 번째 만남이었지만, 그녀는 나를 상처 주기 위해 매번 독 같은 말만 늘어놓았다. 쓰라린 독에 내가 괴로워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처럼.

한숨을 내쉬자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이제 레트랑 가문과 얽힌 모든 것을 끊어내고 싶었다. 라튼도, 백작도, 틸다도. 정말 지긋지긋했다. 나는 바닥에 널브러진 틸다에게 향했던 관심을 거뒀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알버트가 틸다의 상태를 확인했다.

“잠시 기절한 것일 뿐이니 곧 깨어날 겁니다.”

“…… 네.”

“잘 하셨어요.”

“정말 잘 한 게 맞을까요?”

“그럼요. 아가씨에게 손찌검하려 했잖아요. 게다가 이런 사람들은 말로 해봐야 어차피 자기 잘못 모르거든요.”

“반성할 리 없겠죠?”

“더 날뛰면 날뛰었지 반성할 리 없죠.”

알버트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마시고, 집으로 가실까요?”

“네, 좋아요.”

찻집을 나오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가게 주인이 눈치를 보며 머뭇거렸다. 상황을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어도 범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은 알고 있던 것이리라. 나는 주인에게 돈을 조금 더 쥐여 주며 레트랑 가문에 연락해 여자를 데려갈 것을 부탁했다. 주인은 고개를 숙여 알겠다고 전하고는 곧장 찻집으로 들어갔다.

아델트로 돌아가는 마차가 출발했다. 말츠강 수면 위로 이제야 노을이 지고 있었다. 하루가 무척이나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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