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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맞고 튀었는데 공작님이 집착한다-91화 (91/135)

91.

새벽의 열기는 한낮 작열하는 태양보다도 뜨거웠다.

이불 속에서 느껴지는 카시안의 체온에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나는 똑바로 누워 허공을 응시했다. 여전히 꿈꾼 것처럼 정신이 흐리멍텅했다.

“시아라.”

중저음의 나른한 목소리가 나를 부른다.

“으응.”

“나를 보고 자야지.”

베게 대신 베고 있던 카시안의 기다란 팔 위를 굴러 그를 바라보았다. 이불을 더욱 당겨 그의 너른 어깨에 기댔다. 설핏 고개를 들자 입술에 그의 목덜미가 닿았다. 맥이 뛰는 그 지점에 작은 입맞춤을 전했다. 그러자 그의 커다란 손이 내 머릿결을 훑어 내렸다. 그 손길이 부드럽다. 깨질까 조심스러운. 그 감각이 꼭 비단길 걷듯 황홀했다. 나는 카시안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심장 박동을 헤아렸다. 주인을 닮아 차분한 그 진동을 자장가 삼아 눈을 감았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눈꺼풀을 다시 들어 올렸다. 계속해서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 순간이 현실이라는 것을. 이 행복이, 아늑함이. 온몸에 전해지는 온기가 또다시 덧없는 꿈에 지나지 않을까 봐 수차례 멀건 눈을 깜빡거렸다.

손가락으로 더듬더듬 카시안의 얼굴을 훑고 나서야 안심했다. 눈을 감았다가 떠도 사라지지 않음에, 그가 여전히 내 곁에 있음에. 아아-. 이건 꿈이 아니구나. 혹여 눈 감으면 거품이 될까 두려워했던, 그런 꿈이 아니었구나.

참 이상하기도 하지. 가문이 망한 뒤로 누군가 내 곁에서 잠드는 일은 오늘이 처음이건만. 벌써 곁에 없으면 잠을 못 잘 것 같다니.

“오빠.”

“응.”

“… 내일도 같이 있어 주면 안 돼요?”

카시안이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럴게.”

안도한 나는 그제야 깊은 잠에 빠져든다. 몽롱한 의식 사이로 사탕처럼 달콤한 말이 지나갔다.

“사랑해.”

나도.

나도 사랑해요.

*

이른 아침부터 부산스럽게 외출 준비를 했다.

낸시의 도움을 받아 목욕을 마치고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옷장에는 옷가지들이 빈틈없이 빽빽이 걸려있었다. 전부 집에서 저택으로 들어올 때 챙겨온 것들이었다. 그중 장식이 과하지 않고 단정한 베이지색 원피스와 화려한 프릴이 매달린 하얀색 롱 원피스를 꺼내 들었다.

나는 거울 앞에 서서 두 가지 원피스를 몸에 대보았다.

“낸시, 어떤 게 더 괜찮을까?”

“오늘은 화려한 옷을 입으시는 게 어떠세요? 다른 곳도 아니고, 황궁에 가시는 거잖아요!”

“황제 폐하를 뵙는 것도 아니고 그냥 민원사무소에 가는 건데 뭘.”

“그래도. 황궁은 황궁이잖아요.”

“그럴까? 그럼 오랜만에 기분도 낼 겸 이걸로-.”

그때, 방문이 슬쩍 열리더니 카시안이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나는 단정한 거.”

“정말요?”

“응. 너는 그게 더 예뻐.”

낸시를 올려다보자 그녀는 그것도 물론 좋다는 듯 빙그레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도 괜찮아?”

“이미 들어오셨으면서.”

어느새 지척으로 성큼 다가온 카시안이 내 머리를 부스스 헝클어뜨렸다. 낸시가 애써 빗어놓은 머리카락이 다시 삐쭉 빼쭉 날뛰었다. 나는 입술을 앙다물고 카시안을 홱 째려보았다.

“다시 해야 하잖아요!”

“왜, 헝클어진 것도 예쁜데.”

“하……. 진짜. 미워요.”

낸시가 괜찮다며 다시 빗질하려 하자 카시안이 그녀의 손에 들린 빗을 뺏어 들었다. 그리고는 구불거리는 내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빗어 내렸다.

“미안해. 잘못했어.”

나는 목을 몇 차례 가다듬고 머리 오른쪽을 가리켰다.

“이쪽이 아직도 좀 문제네요. 미용사님, 좀 더 사랑을 담아서 정리해주시겠어요?”

“그건 추가 비용이 발생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손가락 한 뼘당 뽀뽀 한 번입니다.”

카시안이 제 입술을 가리켰다.

“큼, 큼.”

낸시의 헛기침 소리에 내 눈동자가 데구루루 굴렀다.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에 홍조가 피었다. 다른 사람도 있는데 어쩜 저렇게 뻔뻔하게……!

“저는 이만 나가볼게요. 공작님께서 볼 일을 마치시면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낸시는 조용히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기 직전에 작게 꿍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나는 가볍게 주먹을 쥐고 카시안의 팔을 팡팡 때렸다.

“정말 민망해 죽겠어요!”

“그게 뭐 어떻다고.”

카시안은 싱그럽게 웃었다. 나는 뜨거워진 뺨을 식히려 손 부채질했다.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던 카시안의 미간에 빠르게 주름이 졌다. 한숨을 푹푹 내쉬는 그의 볼이 부풀어 올랐다 홀쭉해지기를 반복했다.

“나도 같이 가고 싶다.”

“괜찮아요. 바쁜데 어쩔 수 없죠.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그래도……. 수도는 아델트보다 위험할지도 모르고.”

“에이. 다른 곳도 아니고 황궁에 가는걸요. 게다가 알버트님이랑 트리탄 후작님도 함께 가시잖아요.”

하지만 카시안은 여전히 안심되지 않는지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또 머리 색깔을 바꿔줄까? 아, 이번에는 다른 사람 눈에 아예 안 보이게 해줄까?”

“학교설립을 허가받으러 가는 건데. 신분을 위장하고 다른 사람 눈에 안 보이게 한다고요?”

나는 피식하고 웃었다.

“걱정되니까. 그냥 알버트만 보내자. 그래, 그게 좋겠어.”

“어떻게 그래요. 내가 해야 할 일인데.”

“…….”

“정말 괜찮다니까요.”

한참이나 실랑이를 이어가던 도중, 알버트가 방문을 두드렸다.

“시아라 아가씨, 이제 출발하셔야 합니다. 준비는 다 마치셨나요?”

“네. 곧 나갈게요!”

알버트와 나는 카시안의 배웅을 받으며 마차에 올랐다.

*

학교법인 설립 허가를 받는 일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카시안과 함께 준비한 서류는 완벽했고, 어려운 용어가 튀어나와 당황할 때마다 트리탄 후작의 도움으로 무사히 처리할 수 있었으니. 허가증을 들고 민원실을 나오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벼웠다.

트리탄 후작을 만나는 것은 이번이 딱 두 번째였다. 게다가 전이나 오늘이나 몇 차례 형식적인 대화만 오갔던 터라 후작과는 그다지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다. 일을 마치고 나서야 안더스 트리탄과 제대로 인사를 나눴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엘리나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과 따위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정말 나를 죽일 기세로 달려들었던 여자 아니었던가. 그러나 그냥 덮어둘 수도 없었다. 좋건 싫건, 앞으로 트리탄 가문과 함께 일을 하게 되었으니.

카시안과 안더스와 함께 보육원 일을 논의하던 날, 보육원 소유권을 넘길 수는 없다는 후작에게 카시안이 물었다. 공동 사업을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한참이나 고민하던 트리탄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시안의 제안에 따라 트리탄 후작은 학교의 이사를, 나는 원장의 직위를 갖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그러니 이제 후작과 나는, 한배를 탄 사이였다.

“후작님. 엘리나 트리탄 영애의 일로 마음이 아프셨으리라 압니다. 제가 감히 후작님께 위로를 전해도 괜찮을까요?”

내 물음에 안더스가 천천히 대답했다.

“레이디 시아라.”

“네.”

“저는 제 친구처럼 마법사는 아닙니다만.”

후작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슬픈 미소였다.

“사람 마음을 잘 꿰뚫어 보는 편입니다.”

“아…….”

“제 누이가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누이가 무엇을 원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

“그러니 부디 괘념치 마시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이제 비로소 동업자가 되었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트리탄 이사님.”

“저도 잘 부탁드리죠, 에벨 원장님.”

서로 빙그레 웃어 보이고 작별했다.

이제 다시 아델트로 돌아갈 일만 남았다!

*

틸다 레트랑은 황궁 앞 벤치에 앉았다. 뙤약볕 아래 검은 양산을 쓴 틸다의 얼굴에도 거뭇한 그늘이 드리웠다.

곧 있으면 아들 라튼이 근위대 훈련을 마칠 시간이었다. 단순한 마중일 뿐, 아들이 잘 하고 있나 감시하려는 목적은 절대 절대 아니었다. 물론 라튼의 동의를 구한 적은 없었지만.

근위대원들이 훈련하는 연무장에 외부인은 출입금지였다. 그러니 틸다는 황궁 근처의 벤치에 앉아 아들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 잘난 호위기사 하나 없이 몸을 움직이는 것이 어찌나 오랜 만인지. 그러나 하나도 홀가분하지 않았다. 오히려 속이 시끄러웠다. 아리안이 제멋대로 관둬버린 탓에.

솔직히 말하자면, 집안에 널린 게 용병들이니 적당한 사람으로 갈아치우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아리안만큼 묵묵히 시키는 대로 일을 해왔던 기사도 없지 않았던가. 틸다는 퍽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아리안이 다시 돌아와 무릎 꿇고 빌기만 한다면 다시 받아 줄 생각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가 레트랑 가문의 징표를 내려놓고 저택을 나간 순간부터 계속 그랬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아리안은 돌아오지 않았다. ‘내일까지 딱 하루만 더 기다려주지.’ 양산을 쥔 틸다의 손아귀에 힘이 더욱 들어갔다.

“등신 같은 놈. 잠자코 이 가문을 위해 일하면 평생 먹고 살 텐데. 쯧.”

제 복을 발로 걷어차다니.

하기야, 그놈이 날 떠나면 무얼 할 줄 알겠어? 틸다는 어차피 아리안이 돌아오리라 확신했다.

혀를 쯧쯧 내두르던 그녀가 황궁을 응시했다. 곧 있으면 훈련을 마칠 아들이 나올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때, 온통 황금으로 장식된 마차 한 대가 황궁의 입구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사방에 방패 문양이 그려진 깃발이 꽂힌 마차는, 너무 화려해서 저절로 눈길이 갔다. 틸다는 입이 벌어진 것도 모른 채 그 마차를 한참이나 응시했다.

황궁에 정식 용무가 없던 터라 그녀의 마차는 궁 내부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주변 공터에 세워둔 자신의 마차가 오늘따라 왜 이리도 초라해 보이는지. 사실 레트랑 가문의 마차니 허접할 리 없었다. 게다가 궁에 간다고 꽤 좋은 것을 타고 나왔단 말이다. 그러나 저 황금 마차를 보자마자 자존심이 상하고 말았다. 마차의 화려함에 넋이 나간 틸다의 시선이 깃발에 그려진 문양으로 옮겨갔다. 방패…….

가만, 그러고 보니 저 방패 문양……!

“아델트!”

마차는 어느새 틸다 레트랑의 앞을 지나쳤다. 틸다는 그 안에 탄 사람의 정체를 확인하려 두 눈을 부릅뜨고 마차를 응시했다. 노란색 황금 마차 안에는, 금빛 머리카락의 여자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여자가 틸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

틸다의 동공이 커졌다.

‘그년이다!’

그와 동시에 마차의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멈췄다. 찰나의 정적이 흐른 뒤 마차에서 내린 여자는, 틸다가 그토록 애타게 찾았던. 시아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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