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펠릭스는 시아라를 천천히 마주했다.
뭐가 그리도 슬픈지. 시아라의 눈에서 보석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바보, 울긴 왜 울어. 행복하게 웃기만 하라니까. 괜스레 자기도 울컥해서, 펠릭스는 입술을 꾹 깨물어야만 했다. 그리고는 일부러 장난스레 말했다.
“울보네 울보. 뭐가 그렇게 서러워. 응?”
주머니를 뒤져 손수건을 꺼냈다. 시아라의 뺨에 맺힌 눈물을 직접 닦아주려던 그가, 허공에서 멈칫했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았으니까. 펠릭스는 손수건을 그냥 시아라의 손에 쥐여 주었다.
“얼른 닦아. 누나 때문에 괜히 나까지 울 뻔했네.”
“…… 안 울었거든.”
“아무튼, 주책이야 진짜. 빨리 닦기나 해, 이 울보야.”
“안 울었다니까. 이게 자꾸 누나한테…….”
시아라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럼 웃어봐.”
“뭐?”
“웃어줘 누나.”
“이렇게 갑자기?”
“그게 뭐 어려운 일인가. 얼마나 쉬운데. 나 하는 거 봐.”
입술을 몇 번이나 꼼지락거리던 펠릭스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누가 보아도 억지로 그린 미소에, 시아라는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녀의 웃음에, 펠릭스의 입꼬리가 이번에야말로 자연스레 올라갔다. 보조개가 움푹 팰 정도로.
이내 펠릭스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나 이제 가볼게.”
“벌써 가려고?”
“응. 오늘 엄마 병원에 가야 해서.”
“아, 나도 곧 찾아뵐게. 유모한테 안부 전해드려 줘.”
알겠어. 고개를 끄덕이며 뒤돌았다. 그러나 잊은 말이 있다는 듯 다시 몸을 돌렸다.
“맞다. 공작님이 괴롭히면 바로 찾아와. 나 이제 칼도 엄청 잘 쓰니까……. 내가 혼내 줄게. 알겠지?”
그 말에 시아라가 푸스스 웃었다.
“왜 웃어? 진짠데! 나 못 믿는 거야?”
“믿지, 엄청 믿어. 알겠어. 너한테 꼭 말할게.”
“이러다 늦겠다. 그럼 누나, 나 간다! 안녕!”
펠릭스는 씩씩하게 걸었다. 자신의 뒷모습을 시아라가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몸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어깨는 당당하게, 허리는 올곧게, 발걸음은 활기차게. 응접실을 나설 때까지 그렇게 걸었다. 그러나 응접실 문이 닫히자마자, 허무해졌다. 입술 사이로 탄식과 비슷한 쓴웃음이 삐져나왔다.
저택 밖에는 소나기가 찾아왔다. 허공에 손을 뻗자 손바닥 위로 빗방울이 톡톡 떨어졌다. 빗방울이 어찌나 굵은지, 손바닥이 다 시큰거렸다.
“예고도 없이 비가 내리네.”
우산도 없는데.
빠른 걸음으로 저택을 빠져나왔다. 빗줄기가 온몸을 적시고, 질퍽거리는 흙탕물은 바짓단을 더럽혔다. 자꾸만 서럽고 쓸쓸해져서, 시원하게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어차피 제 아픔은 빗소리에 묻혀 사라져버릴 테니. 아무도 모르겠지. 정말, 아무도.
펠릭스는 애써보았다. 작은 한숨을 내뱉기도 하고, 스스로 괜찮다고 최면도 걸어보았다. 주먹을 단단하게 틀어쥐기도 했고, 추를 매단 것 같은 발걸음을 재촉해보기도 했다. 무엇 하나 노력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 노력이 무색하게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뒤돌아보고 싶었다. 지금 뒤돌면 응접실 유리창 너머로 그녀가 보일 테니까. 뒤돌까. 한 번만 모른 척하고 다시 뒤돌아볼까. 눈 딱 감고 그래 볼까. 그러나 펠릭스는 그럴 수가 없었다. 뒤돌면 자꾸만 미련이 남을까 봐. 그녀의 옆에서 계속 질척댈까 봐. 자신의 그 마음을 그냥 모른 척했다. 피가 날 정도로 아랫입술을 깨물고. 물안개가 어스레한 그 길을 걸었다.
안녕, 내 첫사랑. 내 작은 요정아.
*
나는 펠릭스가 선물한 프리지아를 들고 방으로 올라갔다. 잠시 후 노크 소리와 함께, 낸시가 고개를 내밀었다.
“아가씨, 여기 계셨어요? 언제 올라오셨어요?”
“응. 방금 왔어.”
“어머나, 웬 꽃이에요?”
“아, 응. 선물 받았거든. 꽃병 하나만 가져다줄 수 있을까?”
“그럼요.”
낸시는 작은 꽃병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공작님께서 선물하신 거예요? 너무 예쁘다! 아가씨처럼 반짝반짝 노란색이네.”
“아니. 내 동생한테 받았어.”
“어라? 남동생이 있으셨어요? 몰랐는데!”
“친동생은 아닌데…….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만큼 내가 사랑하는 동생.”
“그분도 참 좋은 분이신가 봐요.”
당연하지. 분에 넘치게 좋은 사람이니까. 낸시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꽃병에 꽃을 꽂아두었다.
“꽃이 많아서 더욱 풍성했으면 좋았겠지만. 이것도 나름 로맨틱한데요?”
창가에 세워진 꽃병을 보며 우리는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아 참, 내일 황실에 가실 준비는 다 마치셨나요?”
“응! 진작 다 마쳤지. 알버트 님이 도와주셔서 서류도 꼼꼼하게 챙겼고.”
“장하셔라. 다 잘 될 거예요. 그럼 전 커피라도 한 잔 준비해 올게요. 비도 오고, 분위기가 참 좋아요.”
“고마워.”
방문이 닫혔다. 나는 창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창문 밖을 응시했다. 정원에 핀 색색 꽃들은 싱그럽게 빛났고, 나무에 매달린 커다란 초록 잎은 가지마다 무성했다. 살짝 열어둔 창틈 사이로 비에 젖은 흙내음이 밀려왔으며. 고요한 방은 빗방울 부서지는 소리로 더욱 아늑했다. 나는 빙그레 웃었다. 내 인생에 이런 여름이 또 있었던가. 이토록 완벽하고, 아름다운.
지독히도 외로웠던 시절이 있었다. 나 홀로 세상에 버림받았다 원망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 시절조차,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나의 행복을 바랐다. 모두가…… 내가 어떻게든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고맙게도 그 바람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카시안을, 펠릭스를, 유모를. 온전히 나를 사랑했고 내가 사랑할, 그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했다. 그들이 그렇게 바랐기 때문에.
나는 더이상 외롭지 않다. 아프지도, 슬프지도 않다. 아직도 힘들다 말한다면 그것은 사치고 어리광이었다. 나를 아껴온 그들에 대한 예의 또한 아닐 테지. 그러니 나는 이제 온전한 행복. 오로지 그것을 바라보며 살 준비가 되었다. 나를,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한바탕 쏟아진 비가 조금씩 그치고 있었다. 저 멀리 숲 너머로 무지개가 반짝거렸다. 내 앞날처럼, 예쁘게.
아직 돌아오지 않은 낸시를 기다리며 테이블 위로 뺨을 기댔다. 아까 너무 울었던 탓일까. 꾸벅꾸벅 졸음이 몰려왔다.
*
어깨를 감싸는 포근한 온기에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나는 누군가의 품에 안겨있었다. 어둠 속에서 언뜻 인영이 비쳤으나 캄캄한 탓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향기만큼은 익숙했다. 누군지도 모르면서, 따뜻한 그 향기가 너무도 익숙해서 품을 더욱 파고들었다. 어린아이처럼.
곧, 귓가에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랑하는 내 딸.”
…… 엄마? 엄마야?
그러나 목구멍에 포도 씨가 걸린 듯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딸아.”
…… 엄마!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목청껏 외쳐보았으나 어떠한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다급해져 엄마의 옷자락을 틀어쥐었다. 사라질까 봐. 갑자기 또 사라질까 봐. 엄마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내게 자장가를 불러주며, 상체를 양옆으로 움직였다. 살랑바람 불어오듯, 흔들흔들 천천히. 그 바람에 자꾸만 눈이 감겨왔다. 잠들면 안 되는데. 이렇게 보내면 안 되는데. 어떻게든 두 눈을 부릅뜨고 엄마의 체온을 느끼려 애썼다. 그때, 환한 달빛이 엄마의 얼굴을 비췄다. 어린 시절 내가 보았던, 아름다운 엄마였다.
엄마는 옅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가 너무 희미해 가슴이 아렸다. 나는 엄마 품에 매달려 더욱 깊이 끌어안았다. 여전히 포근했다. 내 예쁜 딸, 우리 아가. 내 볼을 쓰다듬던 엄마의 손이 따뜻했다.
“미안하단다.”
순간 세상이 캄캄해지고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달빛도 별빛도 한 점 없는 암흑이었다.
“엄마? 어딨어. 엄마, 엄마!”
드디어 목구멍에서 목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아무런 답이 없었다. 엄마……! 그저 내 외침만 허공에 메아리쳤다. 그와 동시에 주변 공기가 소름 끼칠 만치 차가워졌다. 나는 온몸을 감싸 안으며 마지막 말을 쥐어 짜냈다.
“가지 마. 제발 가지 마!”
그러나 곧, 나조차도 완전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허억.’ 숨을 들이켜며 침대에서 퉁겨지듯 일어났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꿈……?
방 안에는 벌써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암흑이었던 꿈과 달리, 창문 너머로 노란 달빛이 어스레하게 비쳤다. 무거운 눈을 몇 차례 감았다가 뜨자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방 천장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내 손을 꽉 부여잡은 카시안이 보였다. 카시안은 침대 가까이 의자를 끌고 와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손에 카시안의 온기가 느껴지자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 오빠.”
두어 차례 흔들어 깨우자 카시안이 나른하게 눈을 떴다.
“깼어?”
“왜 여기서 이러고 자…….”
“얼굴 보러 왔는데 테이블에 엎드려서 자고 있길래.”
“그럼 그냥 깨우지.”
“침대로 옮겨주고 가려고 했는데 끙끙거리잖아.”
“아…….”
카시안은 내 이마에 손을 올려 열을 쟀다.
“안 좋은 꿈 꿨어? 열이 좀 있어.”
“아니요. 좋은 꿈이었어요.”
“내 꿈 꿨나 보다.”
능청스러운 말투에 피식 바람 빠지는 웃음이 나왔다.
“아닌데.”
“그럼 그것보다 더 좋은 꿈이 있어?”
“비밀이에요.”
“기다려봐. 약 가져다 달라고 할게. 진짜로 열나.”
나는 일어나려는 카시안을 붙잡았다.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뒤흔들었다.
“하나도 안 아파. 가지 마요.”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이 아가씨가.”
“가지 말고……. 내 옆에 있어 줘요.”
자꾸만 어리광 피우는 나를 카시안이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뽀뽀해주면. 그러면 여기에 있을게.”
“그게 뭐야.”
“싫어?”
“아니, 그게 아니라-. 그건 백번도 더 해줄 수 있단 말이에요.”
가볍게 그의 볼에 입 맞췄다.
“자, 됐죠? 얼른 여기로 와서 앉아요.”
나는 침대의 옆자리를 탕탕 두들겼다.
“안 되겠어. 가야겠다.”
“왜요? 모자라요? 한 번 더 해드릴까요?”
그러자 카시안이 내 이마를 콩, 두드렸다.
“이 위험한 아가씨야.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닌데.”
“그럼요?”
의자에서 일어난 그가 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양팔로 침대를 짚고 나를 그 안에 가두는 탓에 나는 옴짝달싹 못 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이런 거.”
카시안이 조금 더 체중을 싣자 나는 반쯤 뒤로 눕혀졌다.
“이런 건데.”
나른하게 풀린 그의 눈이 한 번의 빗나감도 없이 나를 향했다. 입술은 유난히 붉었고 뺨에 달아오른 열기가 내게도 느껴졌다.
“그럼 뭐. 하면 되죠.”
나는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잡아당겼다. 서로의 입술이 맞닿았고, 눈이 감겼다. 내 머리카락을 옭아맨 카시안의 손가락이 뒷머리를 감싸 쥐었다. 호흡이 가빠지며, 그의 체중이 내 위로 실렸다. 우리는 침대 위로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