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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맞고 튀었는데 공작님이 집착한다-89화 (89/135)

89.

‘붉은 제복에 갈색 머리카락의 기사.’

펠릭스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던 카시안은 문득, 영상구로 제페토를 감시했던 일이 떠올랐다.

레트랑 백작의 저택을 방문했을 때, 제페토는 곧바로 틸다 레트랑과 마주쳤다. 그때는 제페토의 행적을 좇느라 유심히 살피지 못했지만, 틸다의 옆에는 분명 기사 하나가 서 있었다. 지친 표정의 그 기사는 레트랑 가문과 딱 어울리는 붉은 제복을 입고 있었고, 갈색 머리카락이었다.

시아라의 집 앞에 사람을 보낸 것이 결국 또 레트랑 가문이라니. 사람이 이토록 추잡할 수가 있단 말인가? 도대체 그녀의 인생 어디까지 개입할 생각인 건지. 카시안은 이제 이름만 들어도 지긋지긋한 이 가문을 당장이라도 멸문시켜버리고 싶었다.

라튼 레트랑은 앞으로 평생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할 것이다. 카시안은 라튼의 손등에 걸어 두었던 저주를 풀어줄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레트랑 백작의 행적은 안더스 트리탄에 의해 낱낱이 보고되는 중이었다. 안더스는 꽤 집요한 구석이 있었기에.

그렇다면 틸다 레트랑. 시아라를 찾는 건 이 여자겠군.

카시안은 코웃음 쳤다.

이 여자 때문에 시아라는 아델트로 도망쳤다. 사랑했던 잡화점을 포기해야 했으며, 느닷없이 사라져버린 시아라로 인해 카시안은 한참을 속앓이해야만 했다.

‘그때 그냥 죽였어야 했어.’

시아라가 돈다발을 집어 던졌던 날, 그냥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릴걸. 그러면 이 여자가 이렇게 나대고 있을 리 없을 텐데.

카시안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이제 더는 손 놓고 지켜만 볼 수 없다. 그는 시아라를 위협하는 모든 것을 하나씩 천천히 없앨 생각이었다.

다음 날, 카시안은 아리안을 찾아갔다. 조사해보니 가문조차 없던 아리안을 도와 먹여 살렸던 것이 틸다 레트랑이었다. 어려운 시절을 도왔던 은혜를 쉽게 배반하지 못하겠지. 치사하게 가족으로 협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제일 간편한 방법이기도 했다. 귀찮은 건 딱 질색이었으니.

하지만 상황은 카시안이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쉬웠다. 충분히 시간을 주고 찾아오라 일렀지만, 아리안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초조한 낯빛의 기사는 카시안의 발아래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우스웠다. 이 가문에는 눈곱만큼의 믿음도, 의리도 없다는 것이.

*

요즘 저택의 하녀들 사이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대화 주제가 하나 있었다.

“연무장에 갔더니 웬 잘생긴 남자 하나가 떡하니 눈에 들어오더라고?”

“그래! 웃을 때마다 보조개 생기는 그 남자!”

“분명 처음 봤을 때는 비실비실했는데. 언제 그렇게 덩치가 커졌지?”

“아아…… 너무 멋있어……!”

아무튼……. 그 주인공은 펠릭스였다.

오늘은 꼭 펠릭스를 만나 해야 할 말이 있었기에, 나는 저택 뒤편의 연무장으로 향했다. 하녀들의 수다가 헛소리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펠릭스는 건장한 기사들 틈에서 열심히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멀리서도 그의 이마에 송송 맺힌 땀방울이 보일 정도였으니. 그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느껴졌다. 만나서 대화를 할까 했지만, 막상 저렇게 열심히 훈련 중인 것을 보니 괜히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다음 기회를 노리며 저택으로 돌아갔다.

며칠 내내 보육원 부지에 들러 이것저것 살펴보았던 탓에 오랜만에 가지는 휴식이었다. 나는 응접실에 앉아 낸시에게 천에 수놓는 법을 배웠다. 저주받은 손재주를 노력으로 극복하겠다고 다짐하면서.

“잘 하시고 계세요! 네, 이제 바늘을 그 오른쪽에……. 아니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이요. 지금 이름을 쓰시는 건데 왜 자꾸 뒤로 가세요? 오.른.쪽. 이요!”

한참 핀잔을 늘어놓던 낸시가 화장실을 간다며 사라졌다. 나는 툴툴거리며 바느질에 매진했다. 잠시 뒤, 소파에 앉은 내 위로 그림자가 졌다.

“누나.”

씻고 왔는지 말끔한 모습의 펠릭스였다.

“펠릭스? 네가 여긴 말도 없이 어쩐 일이야?”

“아까 연무장에 왔었다며? 단장님이 그러던데.”

“아, 응. 너 진짜 열심히 하고 있나 감시하러 갔지! 놀고 있었으면 유모한테 다 이르려고 했는데 그건 아니더라.”

펠릭스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내 옆에 털썩 앉았다.

“바느질 연습해?”

“응.”

“뭐, 잘했네.”

나는 펠릭스를 홱 쏘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펠릭스는 로지 아줌마와 공범이었다.

“그때도 분명 잘했다고 했잖아!”

“언제?”

“드림캐처 만들었던 날!”

“그건 진짜 좀……. 흐음, 그럼 솔직하게 말해도 돼?”

“잠깐 기다려! 나 마음의 준비 좀 하고.”

“진짜 진짜 잘했었는데. 예술적 감각이 살아있었다니까?”

“…… 됐어.”

그러자 펠릭스가 미소지었다. 양 볼에 여물진 보조개가 유난히 깊었다.

“누나, 나. 요새 엄마가 깨어나서 너무 좋아.”

“나도. 나도 그래.”

“그리고 또……. 누나가 행복해 보여서. 그것도 좋아.”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펠릭스를 쳐다보았다.

“그건 또 무슨 낯간지러운 소리야?”

“사실 아직도 생각해. 누나를 웃게 만드는 게 나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너 때문에도 잘 웃는데?”

“그렇게 말하지 마.”

“응?”

“나 심장 아파.”

심장을 부여잡고 쓰러지는 시늉을 하는 펠릭스를 보며 이번에는 내가 크게 웃었다.

“진짜 나 때문에도 웃네.”

“거봐. 그렇다고 했잖아.”

“누나.”

“응.”

“있잖아.”

“저번에 하고 싶은 걸 생각해 보랬잖아.”

“응! 답이 나왔어?”

나는 자수를 놓고 있던 손수건도 내려놓고 펠릭스에게 집중했다. 그러나 펠릭스는 답지 않게 뜸을 들였다. 한참의 정적이 흐른 뒤에야 천천히 입을 뗐다.

“내가 누나를 지켜줄게.”

“뭐?”

“누나는 내가 지킬 거라고.”

“안 돼!”

단호한 거절에 펠릭스가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지키긴 누굴 지킨다고. 그 말 취소해!”

“…… 응?”

“너 소설책도 안 읽어봤어? 그런 소리 한 사람들 치고 오랫동안 살아남는 애 없다?”

“…… 엥?”

“진짜야! ‘나는 꼭 살아남을 거야!’라던가, ‘금방 돌아갈게!’라던가. ‘내가 지켜줄게.’ 이런 거- 다 마법의 말이야. 이제 곧 죽는다는 마법의 말. 그러니까 취소해.”

펠릭스는 진심으로 황당하다는 듯 토끼 같은 눈망울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나는 내가 지킬게. 그러니까 너는 너를 지켜.”

“…….”

“알겠지? 유모도 분명 그걸 원할 거야. 엄마랑 나를 위해 사는 게 아니라, 너를 위해 사는 거.”

그의 표정이 점점 진지해져 갔다.

“그래서 나는 네가 꼭……. 멋진 기사님이 됐으면 좋겠어. 펠릭스 루크 경. 멋있잖아?”

“펠릭스 루크 경……. 그거야말로 낯간지럽다.”

“여기서 훈련 잘 마치고, 아카데미도 가자. 실은 언제 말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말이야.”

“뭐를?”

“사실 너를 위해서 공작님한테 아카데미 추천서도 받아놨거든.”

“…… 어? 뭐를 받아?”

“추천서. 아쉽게도 헤르본 아카데미는 아니지만 그래도 수도에……!”

내가 말을 마무리 짓기도 전에, 펠릭스는 나를 와락 껴안았다.

“고마워.”

“펠릭스…….”

“고마워 누나. …… 이 빚을 도대체 어떻게 다 갚지?”

“이거 다 투자야. 나중에 제국 최고의 기사가 되면, 내가 세운 학교에 선생님으로 마음껏 부려먹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펠릭스가 푸스스 웃었다.

“그래. 얼마든지 부려먹어.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다!”

펠릭스의 등을 토닥거리자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러면 나는……. 더욱더 누나를 위해 살 수밖에 없는데.”

작게 한숨을 토해내는 펠리스에게 아니, 그러지 마. 너를 위해 살아. 나는 그렇게 펠릭스를 위로했다. 잠시간 나를 품에 안고 있던 펠릭스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가방을 열었다. 가방 속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는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노란색 프리지아 꽃 한 송이었다. 손으로 대충 꺾어 줄기 끝이 제멋대로였지만, 꽃잎만은 예쁜 색으로 활짝 핀 채였다.

“이게 뭐야?”

“보면 몰라? 누나를 닮은 꽃이잖아.”

멀뚱히 쳐다만 보는 내 손에 펠릭스가 프리지아를 쥐여 주었다.

“있지, 누나. 내가 누나를 처음 본 건, 거지같던 비밀무도회장도, 쌍둥이를 만났던 공원도 아니었어.”

“정말? 그러면?”

“누나가 에벨 가문에 처음 왔을 때. 실은 나도 그때 거기에 있었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진짜?”

“누나는 아파서 맨날 침대에 누워만 있었으니까. 나를 본 적이 없었어. 나는 엄마 옆에 앉아서 누나가 얼른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매일매일 기도했어.”

“…….”

“에벨 가문의 사람들은 모두 나를 아껴줬고, 나는 그때 진심으로 행복했거든.”

펠릭스는 옅게 미소지었다.

“그래서 누나도 얼른 일어나서 행복하길 바랐어.”

“어……?”

내가 행복하길 바랐다니. 생각지도 못한 소리에 눈가가 시큰거렸다.

“내일 누나가 눈을 뜨면 꽃밭을 뛰어다녀야지. 아니야, 누나는 아직 아플 테니까 나무 그늘에 앉아서 책을 읽어야지. 아니면 그림을 그릴까? 그게 뭐든, 누나가 하고 싶다고 하면 다 해야지.”

“펠릭스…….”

“하루하루 생각만 해도 좋았어.”

꽃을 잡은 내 손 위로 펠릭스의 커다란 손이 얹혔다.

“그런데 결국……. 나는 누나가 깨어난 걸 못 보고 집으로 돌아갔거든. 그때부터 누나를 만나기 전까지, 계속 기도했어. 누나는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 노란 꽃을 닮은 누나가, 이렇게 예쁘게 웃었으면 좋겠다고.”

“겨우 내가……. 내가 뭐라고…….”

한 방울 한 방울 뺨을 타고 흘러내리던 눈물이, 기어코 홍수처럼 쏟아졌다.

“왜냐면……. 나는 행복하지 못했거든.”

펠릭스는 바닥으로 고개를 떨궜다. 나는 그런 그의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힘들었구나. 너도 참 많이 아팠구나. 그러자 문득 엘리나의 별장에서 처음 만났던 펠릭스가 떠올랐다. 지친 듯한 얼굴, 희망이 없는 표정. 경멸 어린 눈빛.

“그런데, 이렇게 다시 누나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정말 행복해서, 제일 먼저 죽는대도 괜찮을 것 같아.”

“…….”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나는 정말로, 누나를 지켜주고 싶어.”

펠릭스의 표정이 진지했다.

“언젠가는…… 누나한테 꼭 고맙다고 전하고 싶었어.”

“뭐가 그렇게 고맙다고…….”

“누나 때문에 내가 버텼으니까. 지쳤을 때도 포기하지 않은 건, 기억 속에 자리 잡은 누나 덕분이었으니까.”

“…….”

“고마워.”

“나도……. 나도 고마워.”

그가 내 눈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공작님 때문에 행복해?”

“응.”

“그럼 나는 됐어.”

펠릭스는 나를 한 번 더 안아주고는 곧, 품에서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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