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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맞고 튀었는데 공작님이 집착한다-88화 (88/135)

88.

카산드라 리첸스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루가 고단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애초에 베짱이 같이 놀고먹기를 원하는 그녀가 열심히 일한다고 보람을 느낄 리도 없었다. 카산드라는 매일같이 귀족들의 파티를 찾아다니며 술을 마셨다. 그 탓에 급격히 불어난 몸이 너무도 무거웠다. 지금도 그 몸을 제대로 가누기 힘들 정도로 취해있었지만, 기분만은 좋았다. 특히 오늘은 최근 들어 가장 행복한 날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게 다 빌어먹을 아나스타샤 때문이었다. 다짜고짜 찾아왔던 아나스타샤는 꽤 오랫동안 카산드라의 집에 머물렀다. 카산드라는 그것이 끔찍이도 싫었다. 연기를 일삼는 아나스타샤의 유별난 성격도, 다 망가진 얼굴도, 그 표독스러운 눈빛은 말할 것도 없이! 게다가 얹혀사는 주제에 왜 이리도 제멋대로인지. 집에 왔다가 안 왔다가. 도무지 신경 쓰여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무리 제 동생이라지만 사람 거슬리게 하는데 도가 튼 게 분명했다. 이제는 재수 없는 붕대만 봐도 짜증이 날 정도였으니까!

한데 오늘부터는 알아서 살 곳을 지내보겠다고 하네? 카산드라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아나스타샤가 지내던 방으로 향했다. 깨끗하게 비워진 방을 보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정말이지 오늘은 인생 최고의 날이 분명했다. 부티크에 모처럼 손님이 많았고, 오랜만에 파티에 참석한 테른 백작 부인이 가져온 고급 와인은 최고였으며. 눈엣가시였던 이복동생은 제 발로 기어나갔다.

카산드라는 기분 좋게 침대에 드러누웠다. 슬금슬금 눈이 감기려던 찰나. 현관에서 찌르르 종소리가 울렸다.

“도대체 이 시간에 누구야?”

아무도 올 사람이 없는데. 설마 아나스타샤가 다시 온 건가?

카산드라는 미간을 좁히며 현관문 가까이 갔다.

“누구세요?”

밖에서 대답이 들려왔으나, 너무 술에 취한 탓에 제대로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짜증스레 문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제복을 갖춰 입은 치안대원들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상황파악이 덜된 카산드라가 멀뚱멀뚱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치안대가 여길 왜…….”

“잠시 검문이 있겠다.”

“뭐, 뭐야? 당신들 뭐야?”

“신고가 들어와서 말이지. 카산드라 리첸스, 당신을 탈세 혐의로 체포한다.”

그제야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타, 탈세? 웃기지 마!”

대장으로 보이는 이가 대원들에게 고갯짓했다. 그러자 대원 여럿이 카산드라의 침실로 들어갔다.

“아, 안 돼! 하지 마!!”

카산드라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대원들은 이 잡듯 샅샅이 방을 뒤졌다.

“찾았습니다.”

잠시 후, 치안대원 하나가 옷장 깊은 곳에서 발견한 금고 하나를 꺼내왔다. 카산드라가 그동안 몰래몰래 재산을 은닉해왔던 금고였다. 카산드라는 온몸을 던져 금고를 향해 달려갔다.

“이리 내놔!”

하지만 지나친 과음과 불어난 살 때문에, 도무지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금고를 든 대원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철퍼덕 넘어진 카산드라가 일어나 읍소했다.

“제발 왜 이러는지 알려는 주셔야지요!”

“아까 이유를 말하지 않았는가. 탈세라고.”

“지, 지금 아무런 증거도 없이 여인 혼자 지내는 집을 마구잡이로 뒤지시는 겁니까?”

“증거?”

치안대장이 손을 내밀자 옆에 있던 대원 하나가 장부를 하나 내밀었다.

“여기 버젓이 가짜 장부가 있는데 발뺌할 생각인가?”

갈색 장부……? 카산드라가 세금을 피할 목적으로 적어 두었던 가짜 장부가 확실했다. 그런데 저게 왜…….

“어, 어떻게 그게 거기에……!”

순간, 아나스타샤의 얼굴이 빠르게 지나갔다.

‘아뿔싸! 아나스타샤 이년이 다 일러바쳤구나!’

어쩐지 얌전히 집을 나간다 했더니, 감히 이렇게 뒤통수를 쳐?

카산드라는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포승줄에 묶여 끌려 나왔다. 집 옆 골목에서 지켜보고 있던 아나스타샤가 그제야 모습을 드러냈다. 제 언니의 꼴을 보며 아나스타샤는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렸다.

“무사히 검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너, 너! 네가 이런 거지!”

“응, 맞아. 언니는 아무 걱정도 하지 마. 내가 집 잘 보고 있을게.”

“이런 배신자 같으니라고!”

“그러게 누가 나쁜 짓 하면서 살래?”

카산드라는 술기운에 자꾸만 휘청거렸다. 끌려가면서도 바보 같은 제 언니를 보는 게 아나스타샤는 마냥 즐거웠다. 이제 곧 포상금도 들어올 텐데, 그걸로 오랜만에 비싼 옷이랑 보석부터 사볼까? 아나스타샤는 벙실거리며 웃었다.

*

“왜! 왜 못 잡아 온 건데, 대체 왜!”

“…… 죄송합니다, 마님.”

아리안은 틸다 레트랑에게 고개를 숙였다. 꼿꼿하게 선 틸다의 목울대에 시퍼런 핏발이 섰다.

“방구석에 가만히 처박혀 있을 계집애 하나 못 데려와?”

“그게……. 이제 그 집에 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집에는 당연히 없겠지! 그런 꼴을 당하고도 집에 있겠어? 내가 그년이 아델트 저택에 있을 거라 누누이 말했잖아!”

“…… 그, 그렇지만 저택에서도 쫓겨나 다시 수도로 도망갔다는 말을 듣고 오는 참입니다.”

틸다가 아리안의 정강이를 냅다 걷어찼다.

“…… 윽!”

“수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너 같으면 다시 수도로 오겠어? 제 엄마가 수도에서 죽고 내가 두 눈을 새파랗게 뜨고 있는데?”

아리안은 펠릭스에게 들었던 소식을 전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하지 않기로 했다. 시아라가 도둑이라니. 어쩐지 말하면 말할수록 바보가 되는 것 같았다. 차라리 라튼 레트랑이 아델트 저택에 몰래 들어갔다가 된통 당한 거라는 자신의 추측이 더 그럴듯했다. 그러고 보면 그 애송이의 말을 왜 이토록 신뢰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심지어 누군지도 모르면서. 아리안은 자기가 뭔가에 홀렸었다고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꼴도 보기 싫으니까 나가!”

아리안이 더욱 고개를 조아리며 물러섰다. 틸다 레트랑은 혀를 끌끌 찼다.

“도대체 왜 이렇게들 바보같이 구는 거야! 뭐 하나 일을 제대로 처리하는 놈이 없어.”

남편이고 아들이고. 거기에 믿었던 호위기사까지. 빈 쭉정이들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에 틸다는 크게 한탄했다.

틸다 레트랑이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아리안의 등 뒤로도 다 들려왔다. 아리안은 울컥했다.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더러운 일에 손대야 하는 건지.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시키는 일도 못 하는 주제에 감히 내 돈을 받아가려고 해?”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아리안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러다 이내,

“저 피를 이어받은 자식들이 불쌍하군. 네 자식들은 아비를 보고 배울 것도 없어. 저렇게 무능해서야! 도대체 왜 사는 거야?”

끝없이 이어진 인격 모독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제 자식들을 입에 올리다니. 틸다의 방을 빠져나가려던 아리안이 우뚝 멈췄다.

“왜 그러고 서 있어? 하, 알량한 자존심은 있다는 건가?”

마지막까지 빈정거리는 틸다를 향해 기사가 발걸음을 옮겼다. 틸다는 조금 당황했다. 욕을 먹더라도 늘 무력했던 아리안이었지만, 지금만큼은 달랐으니. 아리안은 겉옷 안주머니에 지니고 다니던 레트랑 가문의 배지를 꺼냈다. 성큼성큼 틸다의 앞으로 걸어가 화장대 위에 탁, 내려놓았다.

“그만두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틸다는 기사의 등에 대고 빽빽 소리 질렀다. 하나 아리안은 홀가분했다. 이걸로 끝이야. 이런 더러운 일도, 지긋지긋한 레트랑 가문도.

그러나 그의 패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당장 자식들을 먹여 살릴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틸다가 말했던 무능한 모습을 보이게 됨이 확실할 테니. 저택의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아리안은 다시 올라가 무릎을 꿇어야 하는가 갈등했다. 생각이 짧았어. 어리석었어. 일평생 검만 휘두르며 살았는데 어디 가서 뭘 하겠다고……!

몇 번이고 다시 돌아갈까 고민하던 아리안은 결국, 레트랑 저택을 빠져나왔다. 이제는 정말 헐벗은 기분이었다. 속이 시끄러워 무슨 생각으로 저택을 나온 건지도 몰랐다.

물끄러미 저택을 응시하고, 골목을 돌았다. 그리고 그때,

“아리안 루엘른.”

처음 보는 남자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아리안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니야. 이 남자랑은 초면이 아니야. 아리안은 움찔했다.

“…… 당신은.”

“아델트의 공작 카시안 폰 아델트다.”

아리안은 한쪽 무릎을 굽혀 예를 갖춰 인사했다.

“…… 또 뵙습니다. 공작 각하.”

“첫 만남이 아니란 걸 아는군.”

아리안은 공작에게 정말 마법을 사용해서 제 기억을 지웠던 건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입을 열기조차 힘들었다. 느껴지는 기세가 어마어마했으므로. 게다가 그런 걸 묻고 따지고 할 시간조차 없었다. 아델트 공작은 허리춤에 찬 검을 꺼내 아리안의 목을 향해 겨눴다. 아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당황한 아리안 역시 칼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손이 움직이지 않음. 무언가에 꽁꽁 묶인 듯, 온몸이 경직되었다. 서리 같은 칼날은 계속해서 제 목과 가까워지는데. 아리안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델트에 왜 왔었는지 말해.”

“!”

“왜 그 집 앞을 서성거렸지?”

“그, 그걸 어떻게…….”

당황하여 말을 더듬는 아리안과는 다르게 아델트 공작은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아델트의 주인이야.”

“…….”

“그녀의 집 앞에서 그녀를 기다릴 수 있는 것 또한 나뿐이고.”

검날의 스산한 느낌이 목을 조이는 듯했다. 아리안은 이 정도의 무력함을 처음 느껴보았다. 정말 우습게도 틸다 레트랑의 명령 정도는 아이들 장난에 불과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방금까지도 그 명령을 거두지 못해 그렇게 갈등했던 그였는데.

“그러니 말해. 왜 거기에 있었지?”

“그건…….”

더 가까워진 칼이 목을 꿰뚫으려던 찰나, 아리안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들려온 것은 칼이 살을 베는 소리가 아니었다. 아델트 공작의 저음이었다. 화가 난 것도, 도리어 침착한 것도 같은 목소리.

“틸다 레트랑을 배신해.”

“…… 네?”

“그럼 살려는 주지. 너의 아내와 아이들까지 전부.”

아리안은 새파랗게 질렸다.

“설마 아내와 아이들까지 추적하신 겁니까?”

“왜 그게 충격이지? 너도 하는 걸 나는 못 할 거라고 생각했나?”

아델트 공작은 검을 거뒀다.

“만일 나를 돕는다면, 너와 네 가족이 틸다 레트랑에게서 벗어나 외국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겠다. 생각이 정리되면 날 찾아오도록.”

피 한 방울 나지 않았지만, 벌써 온몸에 흐르는 피를 쏟아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리안은 고민할 겨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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