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사진 속 예카틸리나는 아주 맑게 웃고 있었다.
그녀의 다치기 전 얼굴을 처음 보는 나로서는 감회가 퍽 남달랐다. 너무 밝아서, 사실 마음이 조금 아프기도 했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다친 걸까? 그래서 이 가족사진이 마지막인 걸까? 예카틸리나의 양옆에는 나이 든 남녀가 서 있었다. 몇 번이고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정말이지 화목해 보였다.
“카티아. 여기 이 사진 속에……. 부모님이에요?”
내 질문에 약통을 뒤지던 예카틸리나가 다급하게 액자를 빼앗았다.
“이, 이건 안 돼요!”
“훔쳐보려던 건 아니었어요. 그냥 보이길래.”
우물쭈물하던 예카틸리나는 비밀이라도 말하듯 조심스레 말했다.
“제 할머니, 할아버지예요.”
“아.”
“미리 말했듯, 가족들이 다 죽고 나서 여기서 조부모님이랑 같이 살았거든요. 이건 얼굴이 망가지기 전에 찍은 거예요.”
“아……. 지금은 혼자 살아요?”
“네. 두 분 다 오래전에 돌아가셨어요.”
예카틸리나는 액자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나는 오늘 처음으로, 그녀의 눈에서 진실을 보았다.
붕대 탓에 눈과 입술만 내놓은 예카틸리나의 표정을 알아보기란 어려웠다. 나는 그녀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가늠하기 위해 더 오랫동안 눈동자를 들여다보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동안 어떤 이야기를 해도, 예카틸리나의 두 눈이 빛났던 적은 없었다. 아무런 진심이 담겨있지 않았고,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이유 모를 눈물만 흘려대기 바빴다. 그러니 그녀를 향한 신뢰가 생길 리가.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정말로 애처로워 보였으니까.
조부모를 추억하는 예카틸리나의 눈에 진심 어린 애정이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그녀의 등을 토닥거렸다.
*
예카틸리나는 카산드라 부티크의 거울 앞에 서서 한 바퀴 빙 돌아보았다.
푸른색 원피스가 몸의 곡선을 따라 휘감겼다. 어제 시아라가 입고 있던 쉬폰 원피스와 가장 비슷한 디자인이었다. 목에 난 화상 자국이 소름 돋게 징그러웠지만, 이렇게 차려입으니 시아라가 된 것 같았다. 푸른 눈, 푸른 원피스. 물론 머리카락은 거의 없는데다가 연갈색에 가깝지만. 하지만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금발 머리로 바꿀 수 있을 테지. 그 돈은 어쩌면……. 조만간 시아라에게 뜯어낼 수 있을지도?
예카틸리나가 입꼬리를 힘껏 끌어올렸다.
어제 시아라를 병원 앞에서 만날 때까지만 해도, 사실 초조했다. 시아라에게 얼굴 수술비를 내달라 요구하는 것은 아직 무리가 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찌나 경계가 심하던지.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잘 풀리지 않자 짜증이 났다. 이게 다 소피아 엘링턴이 끼어들어서 이렇게 된 거 아닐까? 그 여자가 시아라한테 내 험담을 한 게 분명해! 진료할 때마다 자신을 수상한 사람 취급하던 소피아의 표정이 떠올라서 치가 떨렸다. 소피아. 그 여자는 예전부터 거슬렸어.
진전이 없을 것만 같던 관계는 어제 이후로 달라진 듯 보였다. 예카틸리나의 집을 다녀오고 나서부터, 시아라의 마음이 조금은 열렸음이 분명했으니까. 애초에 시아라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갈 생각을 했다.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해서.
하지만 맹세코 조부모를 이용할 생각은 없었다. 온갖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남들과는 사고방식이 다르다고는 해도, 예카틸리나 그녀에게도 딱 한 가지 그리운 것은 있었으니까. 그게 바로 그녀의 조부모였다.
그러니 그들을 추억하며 시아라 앞에서 눈물짓던 것만큼은 가식이 아니었다. 물론 앞으로는 종종 조부모를 이용하리라 마음먹기는 했지만. 그 뒤에 이어진 시아라의 반응이 사뭇 다정해졌으니.
[“시아라. 조금 더 친해지고 싶은데……. 혹시 집에 초대해 줄 수 있어요?”]
조금 누그러진 분위기에 예카틸리나가 물었다. 그러나 시아라는 난감한 표정이었다.
[“미안해요. 제가 지금 지내는 곳이 우리 집이 아니라서요. 허락을 받아야 하거든요. 다음번에 다시 이야기하면 안 될까요?”]
‘지가 지금 지낼 곳이 아델트 공작 저택 아니면 또 어디라고.’
그래도 공작에게 말이라도 해보겠다는 거잖아? 예카틸리나는 신나서 한 번 더 빙그르르 돌았다.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아?”
이복 언니 카산드라가 물었다. 그러나 예카틸리나는 흥얼거리느라 듣지 못했다.
“예카틸리나.”
이번에는 들었지만 무시했다. 계속해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카티아.”
“…….”
“이게 진짜……! 아나스타샤!!!”
뭐? 아나스타샤?
그 이름에 예카틸리나의 눈이 뒤집혔다.
“지금 뭐라고 불렀어?”
“그러길래 누가 내 말 무시하래?”
예카틸리나가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지척에 선 그녀의 눈동자가 제 언니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지금 감히 나한테 그 이름을 부른 거야?”
“니, 니가 재깍재깍 대답만 했어도 내가 그 이름을 불렀겠어?”
“한 번만 더 그 이름으로 나 불러봐.”
예카틸리나, 아니 아나스타샤의 눈동자에 살기가 감돌자 카산드라가 몸을 흠칫 떨었다. 그러나 다시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권력이나 돈이나, 모든 우위는 자신에게 있었으니까. 제 미련한 동생이 아니라.
“짜증나니까 연기 그만해. 멀쩡한 네 이름 놔두고 왜 네 모친 이름을 쓰는 거야, 대체?”
“그걸 언니가 알아서 뭐하게?”
“하긴. 니가 이유가 뭐가 있겠니. 제 주인한테 내쫓겨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니는 주제에.”
“…… 한 마디만 더 지껄여 봐.”
“내 말이 틀렸어? 네 얼굴도 다 그 잘난 주인이 그렇게 만든 거잖아!”
“닥쳐……!”
“버림받고 죽을 뻔한 거 살려줬더니. 요새는 살만한가 봐? 자꾸만 기어오르네.”
아나스타샤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당장 그 옷 벗어! 더러워지게 뭐 하는 거야?”
카산드라는 아나스타샤가 시아라인 척하기 위해 입고 있던 원피스를 드세게 벗겼다.
‘주인한테 버림받았다.’ 그 말을 곱씹으며 멍하니 서 있던 아나스타샤의 아랫입술이 덜덜 떨려왔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벌써 두 번이나 버림받았으니.
하나는 엘리나 트리탄에게. 또 하나는, 카시안 폰 아델트 공작에게.
엘리나의 충신이자 아델트 공작 가문의 하녀였던 아나스타샤.
그녀에게 ‘둘 중 누가 더 미워?’라고 묻는다면 당연히 엘리나였다. 아나스타샤는 정말이지 마지막까지 엘리나를 믿었다. 그녀가 자신을 구원해 주리라 믿었다. 평생 하녀로 남을 자신의 인생을 구제해줄 완벽한 주인이라 믿었다. 그러나 엘리나 트리탄은 어떠했던가? 감옥에 갇히자마자 아나스타샤를 멸시하고 조롱하더니, 끝내 독약을 쏟아 부어 제 얼굴을 이렇게 만들지 않았던가!
아나스타샤는 아직도 그 순간만 생각하면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온몸에 전율이 돋고, 피가 거꾸로 쏠리는 기분이었다. 소름 끼치게 뜨거운 감각. 그것은 여전히 고통으로 남아있었다.
아나스타샤의 칼에 맞아 죽어버린 엘리나 트리탄. 그 결말은 당연했다. 나를 배신했으니까. 지옥으로 밀어 넣었으니까! 하지만 배신자가 죽었음에도 도무지 분이 풀리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아프고, 화가 나는데. 모든 것을 다 빼앗겼는데!
그러니 이제 남은 것은 한 사람, 아델트 공작뿐이었다. 아델트 공작이 엘리나와 자신을 감옥 안에 함께 두지 않았더라면. 너그럽고 자비롭게 선처해줬더라면. 아니지. 애초에 공작이 군말 않고 엘리나 트리탄과의 약혼을 받아들였다면!
그러면 아나스타샤는 두 주인을 모시며 평화롭게 살았겠지?
그런데 모든 게 틀어져 버렸다. 갑작스러운 균열의 이유를 그녀 또한 잘 알았다. 갑자기 등장한 시아라, 그 여자 때문이었다. 시아라가 나타난 이후로 엘리나 트리탄의 불평은 곱절로 늘어만 갔고, 그 여파로 자기는 죽음의 목전까지 경험했으니.
엘리나의 시신을 수습해 가던 날. 트리탄 후작은 아나스타샤 역시 죽었다고 착각했다. 독약으로 얼굴이 죄다 망가지고 눈은 퉁퉁 부어 뜰 수조차 없었으며, 온몸이 경직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트리탄 후작은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거리에 아나스타샤를 버렸다. 쓰레기 버리듯, 아무렇게나. 기절한 아나스타샤는 며칠을 꼬박 버려져 있었다. 그녀는 밭일을 나온 농민에 의해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아나스타샤는 복수의 칼을 갈았다. 복수의 대상은 당연하게도 아델트 공작이었다. 내 인생을 빼앗은 만큼 나도 네 것을 빼앗아 줄게. 목표가 생기자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예카틸리나로 살았다. 그것은 그녀를 버리고 떠났던 모친의 이름이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일자리와 신분을 모두 잃은 아나스타샤는 당장 먹고살기도 벅찼다. 그동안 씀씀이가 컸던 탓에 모아둔 돈도 하나도 없었다. 비록 자존심은 상했지만, 아나스타샤는 제 언니 카산드라를 찾아갔다. 어차피 밑바닥까지 떠밀린 인생. 지킬 자존심이 어디에 있다고.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아무런 교류가 없던 이복동생이 나타나자 카산드라는 기겁했다. 분명 귀족 가문의 하녀로 일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하루아침에 거지꼴이 되어 나타났으니 당연했다. 하기야, 그냥 거지꼴 정도였다면 놀라지도 않았을 테지. 지랄 맞은 아나스타샤의 성격을 여태껏 받아준 귀족이 더 대단할 정도였으니. 카산드라가 놀랐던 것은, 만신창이가 된 얼굴을 하고서도 칼바람 같은 독기를 뿜어댔기 때문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사정사정해서 카산드라에게 빌붙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카산드라가 좋은 정보를 가지고 왔다고 했다. ‘아델트에 로또 당첨자가 사는데, 그 여자가 돈을 나눠주기까지 한 대.’ 두 여자는 함께 돈을 뜯어내기로 계획을 짜고 시아라의 집 앞으로 갔다.
그런데 거기서 아나스타샤가 마주했던 당첨자는, 분명 시아라였다. 물론 시아라는 아나스타샤를 알 리 없었다. 한 번도 본 적도, 들어 본 적도 없을 테지. 고작 하녀를.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시아라를 알았다. 아델트 무도회 당일에, 아델트 공작이 웬 여자를 데려왔다며 저택이 뒤집혔다. 집안의 하녀들은 무도회장으로 달려가 시아라의 얼굴을 구경했다. 아나스타샤 또한 그중 하나였다. 그녀는 금발 머리 여자의 얼굴을 절대 잊을 수 없었다. 엘리나가 수도 없이 말했던 자꾸 거슬리는 여자. 그게 바로 시아라였으니.
그때부터였다. 막연했던 아나스타샤의 복수 계획이 조금씩 구체적으로 변한 것은.
저 여자의 인생을 빼앗아야겠어.
그리고 아델트 공작을 지옥으로 밀어 넣을 거야. 내가 당한 것처럼, 어디 한번 너도 당해 봐.
아나스타샤는 몇 번이고 다짐했던 계획을 다시 되새겼다.
이제 뭘 해야 할까?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뚝, 멈췄다.
아, 그 전에.
자꾸만 거슬리는 사람이 하나 더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