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예카틸리나는 마부가 마차의 문을 열기도 전에 달려들었다. 그 탓에 저만치 밀려난 마부는 당황스러운 기색이었다. 마치 나를 에스코트하는 기사라도 된 것처럼, 예카틸리나는 마차에서 내리는 내 손을 부여잡았다. 마침내 두 발이 땅을 짚었을 때는, 팔짱을 끼며 친한 척을 해댔다.
나는 이 여자의 행동이 부담스러워 죽을 것만 같았다. 저 멀리서부터 마차를 보자마자 뛰쳐나오다니! 여기서 나를 계속 기다린 거야 뭐야? 무슨 스토커도 아니고……!
오늘은 소피아도 없으니 단둘이 놀러 가자고 졸라대는 통에, 나는 편두통이 생기는 듯했다. 게다가 난처함에 어물쩍거리는 내 대답이 마음에 안 든 모양이다. 예카틸리나는 병원 정문에서 울어 재끼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또 나를 향했다. 그러나 이미 이런 상황을 여러 차례 겪어본 나 역시 울컥했다.
“……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내가 뭐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울어요?”
“그, 그렇게 무, 무서운 표정을 하니까……!”
“내가요?”
“네! 시아라야 말로 저한테 왜 그래요?”
“아니, 내가 도대체 뭘…….”
“처음부터 저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셨잖아요!”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정곡을 확 찔린 기분이랄까. 그러자 예카틸리나가 말했다.
“다 알아요. 나를 보는 시아라의 시선이 어땠는지. 얼마나 싸늘했는지 모르죠? 그게 어떻게 친구를 바라보는 눈빛이에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전 그런 적 없어요.”
“거짓말……! 애정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으면서.”
“그거야 아직 서로를 잘 모르니까 그렇죠.”
“그럼 저를 잘 알고 나면 우리 사이도 더 가까워지겠네요? 시아라랑 엘링턴 선생님처럼.”
“그렇다고 이렇게 갑작스러우면……!”
예카틸리나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마차에 올라탔다. 멀뚱히 상황을 지켜보던 마부가 예카틸리나를 끄집어내려 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마부에게 괜찮다고 전했다. 오늘 알버트가 준비해 주었던 마차에 아델트 가문의 문양이 잔뜩 새겨져 있던 데다가, 그것을 알아본 주변의 웅성거림이 더욱 심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상업지구로 가달라 부탁했다.
막무가내인 예카틸리나 덕분에 숨이 턱턱 막혔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마차 내부를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손으로 만지고, 감탄하기 바빴으니까.
“우와……! 저 태어나서 이런 마차 처음 타봐요.”
“저도 익숙하지는 않아요.”
“왜요? 이거 시아라 마차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 저는 시아라가 아델트의 마차를 타고 오길래 벌써 공작 가의 안주인이라도 된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건 아닌가 봐요?”
너무 빠른 결론에 도달한 예카틸리나의 말을 부인하며, 재빠르게 손을 허공에 휘저었다.
“안주인이라뇨. 아니에요.”
“그럼요? 아직 약혼이나 결혼은 아니지만…… 특별한 사이?”
“…… 뭐. 네,”
“세상에-! 제가 어디서 들었는데 말이에요.”
예카틸리나는 긴장감을 높이려는 듯 뜸을 들였다. ‘이걸 정말 물어봐도 되려나?’라는 말을 연달아 덧붙이던 그녀가 물었다. 내가 걱정되어서 못 배기겠다는 말투로.
“아델트 공작님 되게 무서운 분이시라던데……. 시아라는 괜찮았어요?”
“무섭다뇨? 그리고 괜찮냐니, 그게 무슨 말인지.”
“물론 이건 그냥 소문일 뿐이지만.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손찌검을 당한다거나.”
예카틸리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듣기로는 사람도 죽이신다고.”
“네?”
저 말의 저의를 도무지 헤아릴 수 없어 되물었다. 게다가 그녀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달리 쇠로 긁듯 날 서 있어서, 영문을 모르는 내 팔엔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아닌가요?”
“아니에요. 지금 저한테 뒷담화 하시는 거예요? 저 되게 불편한데.”
“어머! 미, 미안해요! 기분 상했나요? 저는 그냥 시아라가 걱정돼서 한 말이에요!”
“카티아. 아델트 공작님은 전혀 그런 분이 아니에요.”
내가 착 가라앉은 어조로 말하자 예카틸리나는 늘 그랬듯 몸을 움츠려다. 그녀는 내 눈치를 살폈다. 나를 응시하는 눈망울이 말하고 있었다. ‘부디 나를 동정해 줘. 가엽게 여겨 줘!’ 너무 속이 빤히 들여다보여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자 그녀가 변명했다.
“그, 그냥 저는 그런 소문을 들으니까 예전에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을 뿐이에요. 미안해요.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요!”
대화를 이어 가봐야 내 손해라는 생각에 창가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소피아가 이 여자에 대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꾸만 말이 바뀌고 거짓말을 늘어놓는 것 같다던.
“카티아. 예전에 겪었다는 일이 뭐였는지 자세하게 얘기해줄래요?”
“…… 제 얼굴에 관한 일 말이죠?”
“네.”
예카틸리나는 우리 집 앞 골목에서 했던 이야기를 다시 했다. 화목한 가정에 들이닥친 도둑. 도둑이 지른 불. 나머지 가족의 죽음. 그리고 망가진 자신의 얼굴까지. 차분히 말을 이어가던 그녀는 이따금 고개를 푹 숙이고 울상을 지었다.
“너무 힘들었겠어요.”
나는 눈물짓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거렸다.
“그런데…… 가족이 전부 몇 명이었다고요? 여섯? 일곱?”
“아……. 그게.”
예카틸리나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갔다.
“제가 잘 기억해내고 싶은데……. 너무 충격적인 일이라 기억이 드문드문 나요. 그래서 처음이랑 조금 다를지도 몰라요.”
“아……. 아무리 그래도 가족인데 그걸…….”
“지금 저를 의심해서 묻는 거예요?”
“아뇨, 의심 아니고. 저는 제대로 들은 적이 없어서 묻는 거예요.”
“왜 그런 아픈 기억을 떠오르게 해요?”
“제가 그랬나요?”
“네. 송곳으로 막 후벼팠잖아요.”
“…… 미안해요.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미라같이 붕대를 둘둘 감은 예카틸리나의 얼굴 위로 독기를 품은 파란 눈동자가 희번덕거렸다.
“제가 왜 죽지 않고 사는 줄 알아요?”
“…….”
“복수하려고요. 절 이렇게 만든 그 빌어먹을 범인을 만나서 똑같이 돌려줄 거예요.”
그녀의 말에 순간, 불과 얼마 전까지 제페토를 한 방 먹일 방법을 고심하던 내가 겹쳐 보였다.
“그 자식이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아 갔으니까. 저도 다 뺏을 거거든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걸.”
“아. 잘 됐으면 좋겠어요. 힘들었잖아요.”
“위로는 필요 없어요. 다만, 시아라가 저 좀 도와주면 안 될까요?”
“네? 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
“걱정 마요. 당신은 당연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거든요.”
예카틸리나는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으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
나와 예카틸리나는 상업지구에 도착했다.
함께 시간을 보내자고 졸라대던 그녀는, 막상 마차에서 내리니 부담스러워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흘긋흘긋 그녀를 훑기 때문이랴. 아니나 다를까. 얼마 가지 않아 예카틸리나의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손발이 저릿한지 계속 주먹을 폈다 접었다 하고, 조금만 쉬자며 벤치에 주저앉고. 어지러움을 호소하는 그녀는 굉장히 초조해 보였다.
“카티아.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그냥 돌아가죠.”
“아뇨! 여긴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래요. 저……. 사실 이 근처에 우리 집이 있는데. 집에 가서 약을 먹으면 괜찮을 것도 같아요. 혹시 같이 가줄래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벌떡 일어난 예카틸리나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후미진 골목이었다. 그러나 익숙했다. 예전에 선물을 사려다가 잘못 들어섰던 그 골목이었으니. 예카틸리나의 말대로 거리는 한산했다. 그러나 이른 저녁부터, 몇몇 술집에는 이미 술 취한 사람들이 진을 쳤다. 그녀는 멈추지 않고 더욱 안쪽으로 들어갔다.
허름한 술집이 늘어선 골목을 지나자 이번에는 완전 처음 보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 골목에는 사람들의 쾌활한 소리 대신, 폐허가 된 건물이 바람에 삐걱거리는 소리뿐이었다. 공사가 중단된 건물들 위로 아직도 공사 자재들이 쌓여 있었고, 나무토막이나 쇳덩이는 바닥을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어릴 때부터 자란 곳이에요. 불편하겠지만…… 시아라도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요.”
예카틸리나가 눈웃음을 지었다.
“안 불편해요.”
농담이 아니었다. 정말로 익숙했다. 아델트에서 지낸 지난 몇 달을 제외하면 내가 자랐던 곳도 이 분위기와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까.
“어떻게 그래요?”
“뭐가요?”
“아니……. 곱게 자란 귀족 영애가 이런 허름한 골목을 걷는다는 게 말이 되나 싶어서요.”
“누가 그래요? 내가 곱게 자란 귀족 영애라고?”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아델트 공작님을 만났겠어요?”
“…… 카티아. 나는 전형적인 귀족 가문의 아가씨가 아니에요. 그저…….”
“‘운이 좋았다.’ 이 말이죠?”
운……. 그게 틀린 말은 아니니까. 그냥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인생에도 공작님 같은 분이 찾아올까요?”
“그럼요. 얼마든지.”
“부럽다.”
예카틸리나는 나를 빤히 응시했다.
“부러워. 너무 부러워서 미치겠어요.”
“글쎄요. 그렇게 부러워할 만한 사정은 아니었던지라.”
“아뇨. 지금 시아라 모습을 봐요.”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내 시선도 옮겨갔다. 문 닫은 가게 유리창에 나와 예카틸리나의 모습이 비쳤다. 무더운 여름이라 선택했던 푸른색 민소매 원피스가 살짝 불어온 바람결에 흔들렸다. 그러나 예카틸리나는…….
“나는 이렇게 거지같은데. 짜증 나.”
작게 읊조리듯 내뱉었다. 예카틸리나는 목에 난 상처를 가리기 위해 한여름에도 목폴라 셔츠를 입었다. 그것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그 위로는 검은색 스카프를 돌돌 두른 채였다. 나는 민망함에 살짝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그러자 예카틸리나가 아무렇지도 않게 헤벌쭉 웃으며 나를 따라왔다.
“장난이에요.”
“…… 얼마나 더 가야 해요?”
“다 왔어요.”
그녀는 골목 끝에 있는 파란 대문을 열었다. 밖에서 기다리겠다고 했으나 굳이 나를 안으로 안내했다. 나는 찬장에서 약을 꺼내는 예카틸리나를 기다리며 집 한 바퀴를 빙 둘러보았다. 거실과 화장실 하나가 덜렁 있는 아주 작은 단칸방에 그마저도 성한 곳이 없는 집.
옷가지도 물건도 거의 없는 집은 사람의 흔적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눈에 잘 들어왔다. 서랍장 위에 올려있는 흑백 가족사진 하나가. 아주 낡은 사진 속에서, 어린 예카틸리나는 웃고 있었다. 누구보다 밝은 미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