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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맞고 튀었는데 공작님이 집착한다-85화 (85/135)

85.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공작의 표정이 사납게 변했다. 펠릭스는 제 잘못도 아닌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똑바로 말해봐. 누가 시아라를 찾아왔었는지.”

“정확히 누군지는 모르겠어요. 처음 본 사람이었고, 기사였어요.”

“기사라…….”

“까무잡잡한 피부에 붉은색 제복을 걸쳤고, 저보다 어두운 갈색 머리였어요. 그리고 또.”

펠릭스가 입술에 힘을 줬다.

“누나의 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했어요.”

“더 자세히 말해.”

“아델트로 이사 온 것을 수도에서 도망쳤다고 표현했거든요. 그게 좀 이상했어요. 물론 요새 로또 당첨자라고 소문이 났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 치더라도요.”

“보통 사람들은 시아라가 그냥 아델트에 산다고 알고 있을 테니.”

“네. 수도에서 살았다는 것을 안다는 건, 그 전부터 누나를 알고 있던 사람이라는 소리잖아요.”

생각보다 멍청하지는 않네. 카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말로는 어릴 때 인연이라던데 그건 거짓말이 분명할 테죠. 누나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제가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계속했는데도 다 믿었으니까.”

생각에 잠긴 카시안의 두 눈에 그늘이 졌다. 곰곰이 떠올려 보았으나 딱히 떠오르는 이가 없었다.

“분명 어디 귀족 가문에 소속된 기사가 분명해 보였는데. 소속을 물으니 대답하지 않고 돌아갔어요.”

“귀족……. 귀족이라.”

카시안은 손가락으로 집무실 책상 위를 톡톡 두드렸다. 얼마 뒤, 일정하게 울리던 마찰음이 한순간 멈췄다. 붉은 제복에 갈색 머리카락. 분명 본 적이 있었다.

“이만 가 봐.”

“네? 그게 단가요?”

“그럼 뭘 바래?”

“저한테 해주실 말씀이 그게 다예요? 고생했다거나 잘했다거나 뭐 그런 칭찬은 아니더라도.”

그 말에 카시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잘하긴 뭘 잘해? 다른 곳도 아니고 손바닥을 다쳐온 주제에.”

와, 진짜 답이 없다. 답이 없어. 나야말로 대귀족의 갑질을 당하고 있었네. 펠릭스는 혼자 구시렁거렸다. 물론 카시안의 귀에 명확하게 들린 것이 문제였지만.

카시안이 입술을 꿈틀거렸다.

“네, 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

펠릭스가 나가고 얼마 뒤, 마르쿠스가 집무실을 찾았다.

“공작님, 저, 저를 찾으셨다고요?”

“응. 연구는 잘 되고 있나 해서.”

“부족함 없이 지원해 주신 덕분에 좋은 작물을 개발 중입니다. 곧 선보일 예정이에요!”

“다행이군. 필요한 게 있으면 알버트한테 바로 말해.”

“감사합니다.”

안부 인사를 물은 카시안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내가 저번에 부탁했던 일 말이야.”

“부탁이라면…… 마법 말씀이신가요?”

아델트 공작이 긍정했다.

“물론 저야 상관없지만……. 가능하실까요? 마력뿐 아니라 체력 소모가 엄청나실 텐데요.”

“상관없어. 아무래도 회복마법을 미리 배워두는 게 도움 될 것 같아서.”

“그야 물론 그렇지요…….”

“괜찮대도. 요새 들어 점점 마력이 강해지고 있거든.”

공작의 단호한 말투에 마르쿠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 지금 알려드리는 것으로는 그저 상처나 체력을 회복하는 것이 전부일 테지만. 아마 익숙해지시면 금세 상위 마법도 사용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공작님은 습득이 빠르시니까요.”

“그랬으면 좋겠군.”

마르쿠스는 아델트 공작에게 성심성의껏 회복마법을 전수했다.

그로부터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마르쿠스의 목소리에 흥분이 뒤섞였다.

“노, 놀라우십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로 빠를 거라고는 예상 못 했는데!”

“이렇게 하는 게 잘 하고 있는 건가?”

“물론입니다! 이러다가 저도 뛰어넘으시겠어요!”

카시안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고작 한두 번 성공한 거로 야단법석은.”

“진짜입니다. 이렇게 마법을 자유롭게 다루시면서 그동안은 왜 감춰두신 건가요?”

“네가 사라졌던 이유랑 비슷하지.”

“그렇다는 건 공작님도……!”

“근데 나는 찾았거든. 내가 살아야 할 이유. 그러니까 너도 찾아.”

“공작님…….”

“그거 되게 행복하더라고.”

생각지도 못한 카시안의 격려에 마르쿠스의 심장이 징- 울렸다. 그러나 그 감동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으응……? 공작님? 지금 뭐 하시는 건가요!!!”

마르쿠스는 갑작스러운 카시안의 행동에 경악했다. 카시안은 주머니칼을 이용해 자신의 손등을 비롯해 여기저기에 일부러 상처를 내려던 중이었다.

“방금까지 살아야 할 이유를 찾으셨다는 분이 대체 왜 이러세요!”

“직접 해봐야지. 상처를 내봐야 알 거 아니야. 그게 진짜 회복되는지. 내가 너처럼 꽃을 키울 것도 아니고.”

눈앞에 일렬로 늘어선 꽃 화분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파릇파릇한 이파리엔 생명의 기운이 물씬 풍겼다. 카시안의 덕분이었다.

“아,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안 됩니다!”

“어차피 성공할 텐데 왜.”

“저는 생명을 다루는 마법사로서 이런 짓을 결코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마르쿠스는 카시안의 팔목을 붙들고 만류했다. 거의 팔뚝에 매달린 수준이었지만.

“차라리 연무장에 있는 기사들을 치료하십시오!”

그 말에 카시안이 미소지었다. 아, 그래, 그놈이 있었지?

저택 뒤편에 있는 연무장에선 아델트의 건장한 기사들이 훈련 중이었다. 카시안은 자신의 목표물을 찾아 운동장을 기웃거렸다. 그러나 펠릭스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가서 또 놀고 있군.”

이래놓고 칭찬을 바라다니. 벌써 정신 상태가 빠졌단 말이지?

한참을 찾아 헤매던 공작이 드디어 펠릭스를 발견했다. 마구간의 볏단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발로 툭툭 건드려 보았지만 지쳐 곯아떨어진 펠릭스는 꼼짝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네.”

펠릭스의 손바닥 위로 아직도 핏자국이 가득했다. 제대로 치료도 받지 않고 억지로 검을 쥔 탓에 상처가 아물 시간조차 없었으랴. 카시안은 마르쿠스가 알려준 대로 주문을 외웠다. 평소 카시안의 마법과는 다른 초록빛이 부드러운 음악처럼 퍼져 나왔다. 음악은 펠릭스의 손바닥 위에 스며들었다. 점차 핏자국이 사라지고, 그 위로 하얀 새살이 채워졌다. 카시안은 그 경이로운 광경을 묵묵히 감상했다.

펠릭스의 몸에 단 하나의 상처도 더는 남아 있지 않게 되고서야, 카시안은 볏단에서 일어섰다.

“진짜 별거 아니네.”

여전히 세상모르고 잠들어있는 펠릭스를 그대로 내버려 둔 채, 카시안은 뒷짐을 지고 정원을 거닐었다.

*

나는 보육원을 새로이 단장하느라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 드넓은 공간에 쓸 만한 건물이라고는 딱 한 채. 내가 지냈던 곳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오랜 시간 사용하지 않았던데다가, 건물이 노후 된 탓에 부수고 새로 짓는 것이 더 낫겠다고 판단했다. 쾅쾅. 그렇게 며칠 내내 공사를 하던 후에야 나를 가둬두었던 감옥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이제 내 어린 시절은, 아무것도 없는 평평한 흙으로 돌아갔다.

이제는 새싹을 키울 차례였다.

처음부터 나 혼자 보육원을 관리하고 운영하기란 쉽지 않았기에, 내 옆에는 든든한 알버트가 있었다. 적극적인 알버트의 진두지휘에 나는 한시름 걱정을 덜었다.

“아가씨, 여기를 예전처럼 보육원으로 사용할 생각이신가요?”

“음……. 보육원은 맞지만, 보육원뿐 아니라 아이들이 배울 수 있는 공간이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학교처럼 말이군요?”

“네! 학교요. 누구나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좋은 생각이십니다! 부지가 이렇게 넓은데 예전에는 그 공간을 그냥 놀게 뒀더라고요. 아까워라.”

운동장 한 바퀴를 빙 둘러보는 알버트를 따라 나도 시선을 옮겼다. 정말로 이렇게나 넓은데. 내 세상은 왜 그토록 좁았던 걸까. 허망함에 살짝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곧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제 과거의 바보 같던 나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제일 먼저 선생님을 모집해야겠군요.”

“네. 아주 유능한 선생님들로요.”

“유능한 교사들이라…….”

“저는 이 학교를 헤르본 아카데미에 견줄 만큼 커다랗게 키워볼 생각이거든요.”

비록 얼토당토않은 바람일 뿐이더라도, 내 진심이었다. 알버트는 환하게 미소지었다.

“그 여정이 성공할 수 있도록, 아델트 가문이 든든히 돕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제국 각지에 흩어져있는 능력 좋은 마법사들도 불러들여야겠군요!”

“흐음……. 그런데 마법사들이 과연 정체를 밝히고 이곳에서 일하려고 할까요?”

“당연하죠, 아가씨도 참. 세상이 어느 땐데.”

알버트가 뜸을 들였다.

“…… 지금 마법사들 구직난이 아주 심각하거든요.”

“마법사도 먹고살 걱정을 해요?”

“그럼요. 요새는 정체를 밝혀서라도 직업을 구하겠다고 난리에요. 그동안은 제국에서 나온 위로금으로 놀고먹었지만. 이제는 그것도 힘들어지고 있거든요.”

“아, 저는 마법사들은 전부 비밀스러운 존재라고 생각했거든요.”

“물론 아직도 그런 놈들이 있기는 하지만……. 마법사를 모집한다고 하면 아마 구름같이 몰려들 겁니다. 아무튼, 이 일은 제가 전담해서 맡도록 하죠. 그러니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네, 저도 노력해볼게요.”

바빴던 하루 일정을 마친 뒤에 마차에 올라탔다.

“바로 저택으로 가시나요?”

“아뇨. 저는 아델트 병원에 들렀다 갈게요. 유모를 뵙고 가려고요.”

“아, 그러시겠어요? 그럼 공작 각하께 일러두겠습니다.”

“네. 부탁드려요. 늦지 않게 들어갈게요.”

‘펠릭스가 무언가에 몰두해 잘 지내고 있는 걸 알면, 유모도 기뻐하시겠지?’

나는 유모와 수다를 떨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병원으로 향했다.

그러나 병원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누군가가 창문에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시아라!”

“…… 예카틸리나…, 아니지. 카티아?”

내가 이 마차에 타고 있던 것은 어떻게 알았는지. 어디에선가 갑자기 튀어나온 예카틸리나의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내가 여기에 있는 줄은 어떻게 알고?”

“왜 모르겠어요. 이렇게 귀한 마차를 타고 이 병원을 찾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 무슨 일이에요? 설마 여기서 계속 나 기다린 거예요?”

“저랑 만나기로 약속해놓고……. 어디 사는지도 안 알려주고, 언제 만날 건지도 하나도 안 정해줬잖아요.”

“그거야 너무 갑작스러우니까 그랬죠.”

“그럼 지금 같이 가면 되겠네요? 마침 오늘은 소피아 엘링턴 선생님도 퇴근하셨거든요. 우리 둘이. 딱 좋겠다. 그죠?”

예카틸리나가 우악스럽게 팔짱을 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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