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이봐!”
“예, 손님.”
제페토의 짜증스러운 부름에 마부가 창가 가까이 다가왔다.
“도대체 왜 멈춰있는 거야!”
“죄송합니다, 손님. 마차 바퀴가 고장이 나서요.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마부는 아까보다는 친절한 말투로 양해를 구했다. 그러나 제페토는 마부를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재수도 없지. 이 상황에 마차가 고장 나다니! 칵, 퉤! 마차 바닥에 침을 뱉고 계속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제페토 아르게모나는 창문 밖에 선 마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검은 망토를 걸치고 있는 마부는 망토에 달린 커다란 후드를 눈 아래까지 깊게 눌러 쓴 채였다. 그제야 무언가 이상한 의문들이 샘솟기 시작했다.
‘이 자식은 왜 얼굴을 죄다 가렸담? 이러니 재수가 옴 붙은 거지!’
가만, 아까 마차를 몰았던 놈이 이놈이었던가? 훨씬 키도 작고 조그만 놈이었던 것 같은데?
제페토는 마부를 유심히 살폈다.
그는 고장 났다던 마차는 고치지도 않고 계속해서 창문 옆에만 서 있었다.
‘아니. 이 새끼가 그냥 멀뚱히 서서 뭐 하는 거야? 마부가 맞기는 한 거야?’
아무래도 수상쩍은 남자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찰나, 마부가 말했다.
“아, 다 됐습니다. 이제야 제대로 움직이네요.”
마부의 말대로 마차 바퀴가 살짝 덜컹거렸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아무리 봐도 정말 정말 이상했다. 말은 마차와 분리되어 옆으로 비켜선 채였고, 이 수상한 마부도 계속 문 옆에만 서 있었으니까. 도대체 뭘 고쳤다는 건데? 아무 짓도 안 했으면서 이건 왜 움직이는 건데?
게다가 이제 와 생각하니 마부의 목소리가 너무 익숙했다. 무언가 잘못된 것을 깨달은 제페토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마부의 눈은 여전히 검은 후드로 가려져 있었으나, 형형한 빛이 검은 천을 꿰뚫고 나오는 듯했다. 제페토는 서릿발을 마주한 것처럼 오한을 느꼈다. 마부가 씩 웃자 제페토가 끌어안고 있던 돈 가방이 마차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내, 내 가방!”
제페토는 가방을 주워들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그러나 가방에 접착제라도 발라놓은 듯, 바닥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 가방을 힘차게 잡아당겼다.
“이게 대체 갑자기 왜 이래!”
악을 쓰며 소리 지르는 제페토를 마부가 하찮게 응시했다. 드디어, 뒤집어썼던 후드를 벗었다. 마부에게 냅다 욕지거리하려던 제페토가 그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들숨을 집어삼켰다. 마부의 정체가, 카시안 폰 아델트 공작이었기 때문이랴.
“히이익……! 고, 공작님이 여긴 왜……?”
아델트 공작은 여전히 입꼬리를 올린 채였다. 제페토는 이제 너무 놀라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공작이 손바닥으로 마차를 두들겼다. 그러자 마차에 작은 불꽃이 일었다. 마차의 아랫부분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길을 목격한 제페토가 창문을 쾅쾅 두드렸다.
“아, 안 돼! 안 된다고!”
“지금 나오면 살 수 있을지도.”
“내, 내 돈이……!”
친절한 카시안이 목숨을 건질 단 하나의 방법을 안내했다. 하지만 제페토는 바닥에 딱 달라붙은 돈 가방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아직도 그것을 챙겨가기 위해 씨름 중이었다.
“이, 이걸 가져가야 해!”
“안타깝네.”
“꺼! 당장 불 끄라고 이 괴물 같은 자식아!”
“잘 가, 이번엔 진짜 지옥이야.”
카시안이 손가락을 튕겼다. 마차는 숲의 내리막길을 미친 듯 구르기 시작했다. 커다란 불길은 순식간에 마차를 집어삼켰다. 뜨거운 열기가 제페토의 목덜미 가까이 다가왔다. 제페토는 가방 안에 든 돈이라도 챙겨 달아나기 위해 가방을 열었다. 다행히 아직 돈은 완전하고, 안전했다.
그는 그 와중에도 반짝거리는 돈다발을 그러안고 헤벌쭉 웃었다. 마차 문을 거세게 열었다.
이제 문을 열고 빠져나가기만 하면……!
하지만 그때, 한곳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제페토의 품 안에 잔뜩 안고 있던 지폐들이 서로 부딪치며 바스락 소리를 내다 공중으로 흩어졌다.
제페토는 사색이 되어 허공을 올려보았다. 그의 소중한 돈들이 전부…… 나뭇잎으로 변하여 공중에서 날라 다니고 있었다. 그것도 다 메마른 낙엽으로. 생명의 기운을 빼앗긴 낙엽은 모래알처럼 부서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순식간이었다. 제페토 품에 있던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은.
“안 돼……. 안 돼!!!”
가속이 붙은 마차는 쉬지 않고 굴렀다. 그제야 뛰어내리려 했지만 이미 불길이 퍼질 대로 퍼져 뜨거운 마차의 손잡이를 잡기란 쉽지 않았다.
“사, 살려줘. 멈춰. 당장 이거 멈추라고!!!”
그러나 제페토의 외침은 허공을 잠시 맴돌았을 뿐, 메아리조차 되지 못했다. 대신, 절벽에서 떨어진 마차의 쿵- 하는 커다란 울림소리가 숲을 가득 채웠을 뿐이었다. 주변에 앉아있던 새들이 파드득 날갯짓했다. 그뿐이었다. 제페토의 죽음에 놀란 것은.
마차가 추락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카시안이 뒤돌았다.
어떠한 후회도 없었다.
*
계약서를 다시 읽어보던 레트랑 백작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계약 내용이 완전히 뒤바뀌어 있던 것이었다. 도대체 시아라가 누구야? 에벨 가문이 대체 왜 여기에 적혀있는 거고? 그뿐 아니었다. 어째서 이 계약서에 자신과 제페토의 이름이 단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은 것인지, 레트랑 백작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계약서가 아니었던가! 하루 밤낮을 꼬박 고민하던 백작은 그제야 사기를 당했음을 인지했다.
“…… 이 망할 놈들이 감히……!”
레트랑 백작은 곧장 트리탄 후작의 저택을 찾아갔다.
“트리탄 후작님!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가요!”
“아, 레트랑 백작. 따뜻한 차 한 잔 내드릴까요?”
“지, 지금 제가 차나 마시려고 왔겠습니까?”
“그럼 무슨 일로?”
“후작님께서 저한테 사기를 치신 게 분명할 테지요!”
안더스 트리탄이 다리를 꼬고 앉았다. 트리탄 가문 특유의 음울한 보랏빛 눈동자가, 오늘만큼은 유난히 즐거워 보였다.
“그걸 이제야 아셨습니까?”
후작은 시계를 훑어보았다.
“예상보다 늦게 알아차리셨네요.”
“어, 어떻게 감히 제게 이런 짓을……!”
“저는 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도대체 시아라 이 계집애가 누군데 저에게 이따위 사기를 치신 건가요?”
“당신이 평생 사죄해야 할 레이디죠.”
“제가 알지도 못하는 계집에게 왜 사죄를 합니까!”
“그럼 여태 살던 대로 그렇게 살던가. 뭐가 문제기에 저를 찾아왔는지요?”
“다 고소할 겁니다! 당장 황제 폐하께 이 사실을 알리고 후작님의 죄를 묻겠습니다!”
안더스가 제 앞에 놓인 위스키 한 잔을 마셨다. 길쭉한 손가락으로 유리잔을 내려놓는 모습이 무척이나 여유로웠다. 레트랑 백작은 그 모습에 약이 올라 미칠 지경이었다. 지금 나는 이렇게 속이 부글부글 끓는데 저 자식은 왜 이렇게 태연한 거야!
“마침 저도 황제 폐하를 알현하러 갈 일이 있는데. 같이 가는 것이 좋겠군요.”
씩씩거리는 레트랑 백작을 향해 트리탄 후작이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죄를 물어야 할 사람 하나를 알고 있거든요.”
“…… 서, 설마……!”
“아이들을 노예로 거래했고. 그런 쓰레기 같은 짓을 또 하려고 했던. 바로 당신 말입니다.”
“지금 도리어 저를 고소하신다는 겁니까?”
“네. 뭐가 잘못됐는지요?”
“후작님의 가문이라고 무사할 것 같습니까? 선대 후작님도 함께 하셨던 일입니다. 그러니 후작님도 자유롭지 못하지요!”
그 답이 같잖다는 듯 안더스가 코웃음을 쳤다.
“저는 제 가문이 저질렀던 몰상식한 일에 대해 어떤 것이든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그, 그게 무슨……!”
“그렇지만 당신은 어디까지 내려놓을 수 있죠?”
“내, 내려놓다니 제가 도대체 뭘 내려놓는단 말입니까!”
“당신이 가진 것 전부.”
레트랑 백작의 동공이 휘둥그레 커졌다.
“아이들을 상대로 하는 노예거래는 제국에서 불법입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작위를 박탈당하기 충분한데. 당신은 커다란 죄가 하나 더 있지 않습니까?”
“후작님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나는 하나도 모르겠군요.”
“에벨 백작의 죽음.”
“!”
“그 뒤에 당신이 있었다는 것을 밝히면 과연 작위 박탈로 끝이 나려는지요.”
레트랑 백작이 눈을 질끈 감았다.
“저는 그 결말이 무척이나 궁금한데.”
“…….”
“어디 한번 끝까지 해보시겠습니까?”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트리탄 후작의 말대로, 지금 백작 자신이 가진 어떤 것도 내려놓을 수 없었기에. 그러니 집으로 돌아와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음 또한 당연했다. 이 사기 사건을 폭로해보아야 손해 보는 것은 자신일 테니. 괘씸하고 약 오르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누군가를 붙잡고 원망하고 싶었다. 온갖 분노를 다 토해낼 대상이 필요했다. 하지만 제페토 이 멍청한 자식은 얼마 전부터 보이지도 않았다. 그 등신 같은 걸 또 믿는 게 아니었는데!
‘설마 그놈이 날 해코지하려고 일부러 이런 건가?’
날 엿 먹이고 내 돈을 등쳐먹으려고?
레트랑 백작은 이러다 복장 터져 죽는다는 말을 실감했다. 꼬질꼬질했던 제페토의 얼굴만 떠올려도 뒷골이 팍 당겼고, 수려하게 웃던 안더스 트리탄만 생각하면 화병이 나서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혹시 트리탄 후작이 진짜로 고발하는 거 아니야?’
초조함에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나 레트랑 백작의 근심은 그뿐이 아니었다. 사기 당했다는 것을 자신의 마누라가 알게 되는 날에는……. 이 집에서 자신의 입지가 어디까지 떨어질지 안 봐도 뻔했다.
레트랑 백작은 쥐죽은 듯 조용히 틀어박혀 지냈다. 그런데 자꾸만 트리탄 후작으로부터, 백작의 죄가 낱낱이 적힌 편지가 도착했다.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끊임없이, 하루에 몇 번이고 우체부가 집안을 들락날락했다. 편지에는 이 멍청한 사기 사건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후작의 도발에 백작은 숨통이 조이는 기분이었다. 그는, 미쳐가고 있었다.
하녀들이 식사를 권해도 백작은 마다했다. 여태 쌓아왔던 것을 언제 잃게 될지 모르는데 밥이 넘어갈 리가.
“백작님은 또 안 드신다니?”
“네, 마님. 안색이 편찮아 보이셨어요.”
하녀의 답에 틸다 레트랑이 혀를 끌끌 찼다. 결혼해 출가한 딸까지 늘 네 사람이 앉았던 식탁에 틸다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자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 가는 레트랑 백작을 보며 틸다 레트랑 역시 미칠 노릇이었다.
집구석에 병신이 하나 더 늘어났다.
아들도 모자라 이제 남편까지!
이 가정의 화목이 언제부터 이리도 산산조각이 났던가? 틸다는 답을 알았다. 바로 라튼이 그 계집애를 만났을 때지! 이래서 옛말에 집안에 사람이 잘 못 들어오면 안 된다는 말도 있지 않나.
그녀는 아리안을 불러 압박했다.
“지금 당장 아델트로 가서 시아라 그년을 잡아 와. 당장!”
“…… 예.”
틸다는 눈을 부릅떴다. 이제 때가 왔음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