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허공에서 펄럭거리는 계약서를 주시하던 제페토 아르게모나가 윽박질렀다.
“여, 여기서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이 보육원이 네 것이라니! 누가 감히 그따위 소리를 해?”
“왜요? 제가 돈 주고 샀는데 그럼 내꺼지. 당신 거겠어요?”
“그게 무슨 소리냐니까! 돈을 주고 산 건 나라고!”
“맞아요. 여기 도장도 쾅 찍으셨고.”
나는 사기계약서에 그가 도장 찍은 부분을 친절히 가리켰다.
“그, 그래! 거기에 분명 내가 도장을 찍었다고!!”
들고 있던 계약서를 손에서 놓아버렸다. 그러자 연약한 종이가 책상 위로 툭, 힘없이 떨어졌다. 나는 책상을 나뒹구는 계약서를 향해 턱짓했다.
“그렇게 못 미더우시면 제대로 읽어보시던가요.”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내 말이 맞기만 하면 넌 곧바로 죽은 목숨일 게다.”
네, 그러시던가요. 나는 비웃었다. 씩씩거리던 제페토가 목발을 짚고 저벅저벅 걸어왔다. 그러나, 계약서를 들여다보는 제페토의 눈동자가 튀어나올 듯 커졌다. 자신만만했던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남은 것은 황망하기 그지없는 메아리뿐이었다.
“이, 이게 지금 뭐야……!”
“아, 혹시 글을 못 읽으세요? 제가 읽어드릴까요?”
“닥쳐! 트리탄 가문은 발르테르 보육원의 소유를 시아라 에벨에게…… 뭐? 시아라 에벨?”
“제가 너무 궁금해서 그러는데. 지금 어디서 놀라신 거예요?”
“…… 뭐, 뭐라고?”
“소유자가 저라는 부분에서? 아니면 제 가문이 에벨이라는 부분에서?”
“니, 니가 어떻게 에벨 가문을 아는 거지?”
“제가 그 집 딸이니까요.”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방긋 미소지었다.
“이, 이따위 쓰레기 같은 조작 문서로 지금 나를 매도하려고 하는 거야? 분명 내 계약서에는 내 이름이 있다고!”
제페토는 자기 겉옷 안주머니에서 꾸깃꾸깃한 계약서를 꺼냈다. 그러나 그 종이에도 여전히,
“…… 시, 시아라 에벨……? 이, 이게 지금 무슨 개수작이야! 난 이딴 계약서에 서명한 적 없어!”
“왜요?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뭐라고?”
“마법 좋아하시잖아요. 그래서 계약서에다 마법 좀 부렸는데?”
“…… 허?”
“그것도 카시안 폰 아델트 공작님께서 손수 마법을 사용하셨답니다. 엄- 청 걱정하셨잖아요? 그분이 저 때문에 마법을 잃었다고.”
제페토는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머리를 뒤흔들었다. 눈을 끔뻑끔뻑 감았다가 뜨고, 입을 뻐끔뻐끔 벌렸다 다물었다. 그러나 정작 그의 입에서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분노한 제페토의 눈동자 흰자위에 점점 시뻘건 핏줄이 돋아났다.
“어머, 무서워라! 많이 놀라셨나 봐요?”
나는 그 모습이 흉측하다는 듯 손가락으로 두 눈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제페토의 온몸이 파들파들 떨리는 것이 보였다.
“어쩐다?”
책상 위로 팔꿈치를 얹어 꽃받침 하듯 턱을 괴고, 선심을 쓰듯 말했다.
“정 필요하시면 뒤뜰에 닭장 정도는 내어드릴게요. 거기에 닭을 다섯 마리 정도 키울 생각이었는데, 제가 양보하죠. 뭐, 여기가 이렇게 넓은데 그쯤이야.”
“네, 네년이 지금 나를 이렇게 농락하고도 무사할 것 같아? 이 배은망덕한 년이!”
“더 필요하세요? 그건 곤란한데.”
“이, 이 미친년이……!”
제페토가 목발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줬다. 그것을 내게 무기처럼 휘두르려는 모습을 보며 나는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위협은커녕 도리어 힘껏 비웃자 남자는 당황해 멈칫했다.
“그걸로 지금 저 때리시려고요? 어릴 때처럼?”
“잘못한 아이는 벌을 받아야 하니까!”
“근데…… 여기 아델트 공작님이 있으시면 어쩌려고요?”
“…… 뭐, 뭐야?”
제페토 아르게모나가 재빠르게 두리번거렸다.
“안 보이시겠지만, 사실 지금 여기에 숨어계시거든요. 이것도 닭장 소유주께서 좋아하시는 마법으로!”
“거, 거짓말하고 자빠졌네!”
“아이참, 투명망토를 뒤집어쓰고 지금 제 옆에 계세요. 다 듣고 계시는데. 언행에 예의를 갖추시는 게 어떨까요?”
내가 비밀을 말하듯 양손을 모아 소곤소곤 속닥거리며 옆자리를 가리켰다. 제페토의 시선이 그리로 가 닿았다. 정말로, 파란빛이 아른거렸다.
“이번에 저 괴롭히시다가 걸리면 바로 끽. 아시죠?”
“허억……!”
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자 제페토는 화들짝 놀라며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 내, 내가 나가서 이 계약이 다 사기였다는 걸 밝힐 거야! 황실에 고소할 거라고!”
“네. 하세요. 그런데 그 전에……. 관련된 귀족들이 당신을 가만둘까요?”
“뭐가 어쩌고 저째?”
“아니, 그렇잖아요. 트리탄 후작 가문에서는 돈을 빌렸고, 레트락 백작한테는 투자를 받았고. 우리 공작님은 화가 나셨고. 버뮤다 삼각지대야 뭐야.”
“…….”
“어디를 가도 살아남기 힘들겠어요. 쯧, 안타까워라.”
“네, 네가 그러고도 무사할 거 같아? 너야말로 레트랑 백작이 가만둘 것 같냐고! 공작이랑 후작이 너를 돕는다고 세상이 만만해 보이나 보지? 그래 봐야 고작 고아 주제에!!!”
“글쎄요? 고작 고아라기엔……. 저도 이제 뒷배가 좀 든든해서.”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 돈이 필요하시겠어요?”
나는 씩 웃으며 서류 가방 하나를 책상 위에 툭 던졌다. 가방을 열자 차곡차곡 정돈된 돈다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만 드랑이에요.”
“!”
“이걸로 선택하실 수 있겠죠. 트리탄 후작 가로 가서 빌린 돈을 갚거나. 레트랑 백작 가로 가서 이 계약을 없던 일로 하거나.”
“처, 천만 드랑!”
“드릴게요. 저도 남의 돈을 뺏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
그 말과 동시에, 제페토가 이성을 잃은 한 마리 개처럼 돈다발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의 손이 닿기 전에, 나는 돈 가방을 낚아챘다.
“사과 먼저 하세요.”
“뭐?”
“무릎 꿇고 사과부터 하시라고요. 그럼 돈 드릴게요.”
“내가 뭘 사과해!”
“어린 저를 다락에 가둬두고 학대했던 것. 제 친부모님을 모욕하며 저를 차별했던 것. 제 양부모님을 나락에 빠뜨리신 것. 그리고 저를…… 그 어린아이들을…… 팔아넘기려고 했던 것. 전부 다 사과하세요.”
그러나 제페토의 알량한 자존심이 그것만큼은 허락하지 않는 듯했다.
“모, 못 해! 내가 왜! 절대 못 해!”
아직도 이따위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으니. 그의 허리는 석고라도 바른 듯 빳빳이 굳어있었다.
나는 돈 가방에서 돈뭉치 몇 개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제페토의 눈앞에서 돈에 불을 붙였다.
“지금 십만 드랑이 사라졌네요?”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여전히 꼿꼿한 자세에 또 다시 돈에 불을 붙였다.
“이제 이십만 드랑이.”
“…… 허! 가, 가만두지 못해?”
이번에는 큰 액수의 지폐를 꺼내 태우려던 찰나, 바닥으로 목발이 쿵, 떨어졌다. 뒤이어 또다시 쿵,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야말로 제페토의 무릎이었다.
“미, 미안해.”
“뭐가요?”
“너, 너를 하, 학대했던 거!”
“그리고요?”
“네 친부모와 양부모를 무시하고 협박했던 일도…… 도, 돈을 벌기 위해 아이들을 팔아넘겼던 일도 다 미안해!”
“정말 반성하시나요?”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제페토를 노려보았다. 그는 내 눈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그렇대도!”
“그럼 가져가세요.”
“저, 정말?”
“네. 사과하면 드린다고 약속했잖아요.”
제페토는 곧장 책상 위에 올려있는 돈 가방을 챙겨 부리나케 원장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허둥거리는 제페토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끝까지 변하지 않는구나.
창문 밖에 제페토를 기다리는 마차가 세워져 있었다. 나는 마부석에 앉아있던 마부와 눈이 마주쳤다. 안녕, 그에게 무심하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자 마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안녕, 정말 안녕.
멍청하고, 더러운 자식아.
*
제페토 아르게모나는 돈 가방을 품에 끌어안고 서둘러 마차에 올랐다.
“미친년! 이 귀한 돈을 왜 태워?”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나저나 어디로 가야 하지?”
제페토는 지금 거하게 뒤통수를 친 트리탄 후작에게 매우 화가 난 상태였다. 후작이 이미 시아라와 아델트 공작의 편에 섰다는 것이 자명했으니. 그러니 제 주제에 어찌 후작을 찾아가 따질 수 있단 말인가. 억울해. 너무 억울해 미칠 것 같다고! 제페토는 마차의 문을 부술 듯 주먹질했다. 생채기가 난 주먹 위로 붉은 핏방울이 맺혔다. 그 빌어먹을 트리탄 후작 자식……! 기생오라비처럼 생겨서는, 처음부터 사기꾼 관상이라고 딱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렇다고 레트랑 백작을 찾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이 이렇게 틀어져 버린 것을 알면 결말이야 뻔했으니. 제페토는 그 망나니 같은 백작의 성정을 모르지 않았다. 너무 잘 알아서 문제였다. 시아라의 말처럼, 레트랑 백작은 쥐도 새도 모르게 자신을 죽이려 들것이 분명했으므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은 제페토가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그때, 마부가 다가와 물었다.
“손님. 어디로 모실까요?”
잠시간 생각하던 제페토가 빙그레 웃었다. 돈 가방을 더욱 깊이 끌어안으며.
“알몬트. 당장 알몬트 항구로 가게!”
“예. 알겠습니다.”
“가장 빠른 길을 이용해!”
“그렇지만……. 그 길은 내리막이 가파른 곳이라 위험할…….”
“닥치고 하라는 대로 해!! 겨우 마부 주제에 어디 토를 달아?”
제페토는 시아라에게 당한 것을 분풀이하듯 마부에게 쏘아붙였다. 그러나 마부는 고개를 까딱거리며 마부석에 오를 뿐이었다. 자신을 비웃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이 자식이 지금 나를 무시한 거야? 퍽 무례한 태도에 기분이 상한 제페토가 마부의 뒤통수가 뚫어지라 째려보았다. 그러나 품에 안긴 돈 가방을 생각하자 묘하게 기분이 안정되었다.
‘운 좋은 줄 알라고!’
이 돈이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내려서 저 하찮은 마부 자식을 두들겨 팼을 테니.
제페토는 자신의 자비로움을 스스로 칭찬하며 혀를 끌끌 찼다.
마차는 한참이나 달렸다. 어느새 찾아온 정적에 깜빡 잠이 든 제페토가 스르륵 눈을 떴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곧장 돈 가방을 열어 돈이 안전한지 확인했다. 그러고 나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울창한 나무숲에 가려져 햇빛 한줄기 들어오지 않는 사방은 캄캄했고, 스산했다. 제페토의 팔에 알 수 없는 전율이 돋았다. 그는 몸을 치 떨며, 짜증스레 마부를 불렀다.
“이봐!”
“예, 손님.”
제페토의 부름에, 마부가 마차 가까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