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제페토는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성난 숨을 씩씩거렸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은 한껏 일그러져있었고, 가늘게 뜬 뱀 눈깔로 계속해서 나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나는 그런 제페토의 모습을 보며 상냥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하면…….
*
지하 감옥에서 제페토가 풀려난 바로 직후, 카시안과 나는 곧장 3층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은 늘 보았던 대로 깔끔하고 어두컴컴했다. 그러나 카시안이 손가락을 한 번 튕기자 책상 위에 투명한 유리구슬 하나가 생겨났다. 뜬금없이 나타난 물체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곧 그 주변으로, 푸른색과 보라색이 뒤섞인 영롱한 빛이 퍼져 흘렀다. 동화 속에 나오던 마녀들이 쓸법한 모양새였다.
“이게 뭐예요?”
“영상구. 제페토를 추적할 수 있어.”
나는 유리구슬을 들여다보았다. 절뚝거리며 저택 정문을 빠져나가는 제페토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마법으로 이런 것도 가능해요?”
“응.”
짧은 카시안의 긍정에 나는 서둘러 내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 어쩐지 목욕할 때마다 풀고 싶더라니. 앞으로는 옷 갈아입을 때도 서랍장에 꼭꼭 숨겨 놓아야겠다고 다짐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수상하게 팔찌를 훑는 나를 눈치챈 카시안이 다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아냐! 맹세코 이걸로 너를 본 적은 없어!”
“네.”
“미치겠네. 진짜야. 내 모든 걸 걸고 그런 적 없다니까?”
카시안은 눈을 똥그랗게 뜨고 펄쩍 뛰었다. 나는 크게 당황한 카시안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당신을 믿는다고 안심시켰다. 그리고서, 우리는 다시 구슬에 집중했다.
그때, 저택의 정문에서 멀어진 제페토가 억지로 토하기 시작했다. 연신 캑캑거리던 남자는 기어코 카시안이 건넸던 추적 장치를 뱉어냈다.
“어떻게 해요! 이러다 놓치면……!”
그러나 발을 동동 구르는 나와 달리 카시안은 태연했다.
“걱정하지 마. 저건 가짜거든.”
“가짜요?”
“응. 지금 버린 건 미끼. 진짜는 내 마법이 따라다니고 있어.”
카시안의 말처럼, 제페토가 추적 장치를 숲속에 내던져버렸음에도 구슬에는 그의 모습이 계속해서 보였다. 그게 너무 신기해서 카시안을 쳐다보자 그가 손바닥을 펼쳤다. 지하 감옥에서 보았던 푸른빛이 카시안의 손바닥 위에서 불꽃처럼 타올랐다. 그러자 영상구에 비치는 제페토의 주변에도 같은 모양의 빛이 반짝거리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빛은 나비처럼 제페토의 등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나는 그제야 안도했다.
“지금 저 사람은 어디로 가는 걸까요?”
구슬을 들여다보던 카시안이 입을 열었다.
“동쪽. 트리탄으로 향하려는군.”
“트리탄이라면…….”
엘리나의 가문이 트리탄 아니었던가. 문득 그녀의 분홍색 머리카락과 음울한 보라색 눈동자가 떠올라 입술에 꾹 힘을 주었다. 카시안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놈이 뭘 하려는지 알 것도 같아.”
카시안이 나와 눈을 마주쳤다.
“보육원. 발르테르 보육원을 되찾으려는 거야.”
“네? 보육원을 되찾는 일이랑 트리탄 가문이 무슨 상관이에요?”
“지금 발르테르 보육원은 안더스 트리탄 후작의 소유거든.”
“그럼 제페토 저 나쁜 놈이 다시 아이들을 미끼로 돈을 벌려는 수작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카시안이 말했다.
“여기에 있어. 얼른 다녀올게.”
“잠깐!”
나는 다급하게 카시안을 붙잡았다.
“같이 가요.”
“안 돼. 위험해.”
“아뇨. 갈래요. 이건 제 일이기도 해요. 제페토에게 갚아주고 싶어요. 제가 당한 만큼 그가 괴로워질 수 있도록.”
카시안은 몇 번이나 안 된다며 만류했다. 하지만 내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하아……. 알겠어. 대신 위험한 일은 안 돼.”
“걱정 마요. 옆에 있어 줄 거잖아요. 그죠?”
“그거야 당연하지.”
“거봐. 이렇게 든든한데 뭘요. 그럼 얼른 내려가요!”
서둘러 마차에 오르기 위해 집무실을 빠져나가려는데, 카시안이 내 팔을 붙잡았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 저 사람보다 빨리 트리탄에 가야……!”
“그럴 필요 없어.”
“네?”
“꽉 잡아. 놓치면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카시안이 내 허리를 당겨 자신의 품에 나를 가뒀다. 코끝에 카시안의 머스크 향기가 아스라이 풍겨왔다. 나도,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그렇게 눈을 감았다.
*
주변이 밝아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공간이 변했다. 몸이 공중에 붕- 떠오른다거나, 머리가 뱅글뱅글 돈다거나. 그런 느낌은 하나도 없었다. 그저 화려한 빛이 우리를 감쌌고……! 눈떠보니 트리탄 후작의 집무실이었다.
나는 슬며시 눈을 떴다. 여전히 카시안을 꼭 끌어안은 채로 내가 무사함을 확인했다. 그리고 내 눈앞에, 분홍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보였다. 남자는 우리를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한 모금 머금은 찻물을 차마 삼키지도 못하고, 보랏빛 눈망울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하지만 당황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라, 남자와 나는 멀뚱멀뚱 서로를 응시했다.
이 공간에서 태연한 것은 오직 카시안 뿐이었다. 카시안은 본론부터 꺼냈다. 인사 한마디 없이. 남자는 익숙하다는 듯 나지막이 웃더니 우리를 자리로 안내했다.
“미리 말을 하지. 음식이라도 준비했을 텐데.”
“됐어. 밥은 무슨. 급한 일 때문에 왔어.”
“그렇겠지 별일도 아닌데 네가 이런 식으로 숙녀 분을 데려올 리 없을 테니. 처음 뵙겠습니다. 안더스 트리탄입니다.”
“안녕하세요, 후작님. 시아라입니다.”
안더스 트리탄의 시선이 내게 향하자 다급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나는 그제야 후작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했다. 정말로 제 누이 엘리나 트리탄과 꼭 닮은 얼굴이었다. 순간 엘리나 트리탄이 내게 했던 행동들이 생각나 흠칫했다. 그러나 안더스 트리탄의 표정과 목소리는 실로 온화하고 아름다웠으며, 어떠한 악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누이와는 달리.
“어쩐 일이야? 그것도 텔레포트까지 써서.”
카시안은 안더스에게 유모와 제페토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전했다. 카시안의 말이 끝나자 트리탄 후작의 분위기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니까 지금……. 내 부친이 보육원장과 함께 그런 몹쓸 짓을 저질렀다는 거지?”
“애석하게도.”
“떳떳한 사람이 아닐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어. 아무리 그래도 이건 생각보다도 최악인데.”
안더스는 양 손바닥 위로 얼굴을 묻었다. 무거운 한숨을 쏟아낸 후작이 나와 카시안을 마주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다시 고개를 떨궜다.
“미안해. 레이디께도… 죄송합니다.”
“네가 사과할 일은 아니야.”
“아니. 내 가족이 저지른 일이야. 나도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지. 나는 그만큼 누렸으니.”
“정 미안하다면 그 사과는 받도록 하지.”
“… 지금 내 도움이 필요한 거지?”
“응. 네가 필요해.”
제페토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논의하던 와중, 트리탄 후작의 시종 하나가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후작님을 뵙고 싶다는 남자 하나가 찾아왔습니다.”
“들어오라 해.”
그게 제페토일 것이 분명했기에, 카시안과 나는 집무실 옆방으로 서둘러 자리를 옮겼다. 잠시 후, 제페토가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제페토의 말이 들리지 않으면 어쩌나 염려했으나 쓸모없는 걱정이었다. 그 목소리가 또 어찌나 크던지. 허세 가득한 한 마디 한 마디가 옆방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덕분에 나는 어떠한 수고도 없이, 소파에 앉아 제페토가 하는 말을 염탐할 수 있었다.
트리탄 후작의 친절에 감동한 그 바보 같은 놈은, 비밀이고 나발이고 아무 말이나 술술 내뱉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함께할 투자자가 누구냐는 질문에는 소리를 낮춰 말하는 탓에, 나는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감이 좋은 쓰레기네.’
트리탄 후작은 계획대로 제페토를 돕겠다 거짓말을 했다.
“크하하하! 역시, 뭘 좀 아시는 분이시라니까.”
목적을 달성한 제페토가 게걸스럽게 웃으며 저택을 빠져나갔다. 창문 밖으로 덩실덩실 몸을 흔들며 걷는 악마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카시안과 함께 다시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를 돕겠다는 사람이 누구였던가요?”
“레트랑 백작이라더군요.”
“…… 네?”
트리탄 후작의 대답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레, 레트랑 백작이라니……. 에이, 설마……. 설마요.”
나는 그럴 리 없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솔직히 믿고 싶지 않았다. 아니, 믿는대도 거짓이길 바랐다. 라튼 레트랑이 아무리 머저리보다 못한 개차반이었대도. 그의 엄마가 뻔뻔하고 악독한 쓰레기였대도. 그의 아빠까지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저 집안 모두가 그토록 갱생 불가라고? 에이, 설마. 사람이면 어떻게 그래. 사람이면. 잘못 들었겠지. 설마……!
그러나 내 마지막 바람은 산산이 조각나듯 부서져 사라졌다. 카시안의 영상구에 보이는 제페토는 수도를 향하고 있었고, 잠시 후 한 저택 앞에서 내렸다. 나도 익히 알고 있는 곳이었다.
커다란 철문 앞에서 내부로 들어가는 것을 차단당한 제페토의 모습은 과거의 나와 다른 바가 없었다.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때, 라튼의 모친 틸다 레트랑이 등장했다. 새빨간 드레스를 차려입은 틸다 레트랑은 내게 모욕을 주던 때와 똑같았다. 그녀는, 오늘도 여전히 표독스러워 보였다.
나는 나지막이 욕을 내뱉었다. 저 일가족이 우리 가족을 괴롭혔던 장본인인 것도 모르고 라튼이랑 몇 년을 연애했다니! 머리가 핑 돌고 분노로 속이 들끓었다. 추억이랄 것도 없는 과거가 송두리째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진짜로 가만 안 둘 거야. 주먹을 쥐고 씩씩거리자 내 사정을 알고 있는 카시안이 그 위로 자신의 손을 얹었다. 괜찮아. 네 옆에 내가 있을게. 그가 나를 위로했다.
“이제 어쩔 셈이지?”
안더스 트리탄이 카시안에게 물었다. 그러자 카시안의 시선은 나를 향했다. 서로의 눈동자가 맞닿자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거렸다.
“트리탄 후작님.”
“네, 레이디 시아라.”
“발르테르 보육원의 소유권. 제가 사겠습니다.”
소파의 등받이에 깊게 앉아있던 트리탄의 몸이 앞으로 숙여졌다.
“시아라님, 비록 제 아버지가 나쁜 일을 저질렀다 하여도, 어느 날 갑자기 오셔서 트리탄 가문 소유의 서류를 내놓으라 하시다니요, 어린 시절 일에 대해선 사과를 드릴 수 있습니다만. 그것은 좀 무리가 있겠군요.”
“.....”
“트리탄, 조건을 말해 봐.”
나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카시안이 그에게 마침내 계약 조건을 물었다.
그리고 두 남자 사이에서 몇 가지 계약조율이 시작되었다. 수차례 논의 끝에, 마침내 나는 그 서류에 내 사인을 할 수 있었다.
그 뒤에 제페토와 레트랑 백작이 도장을 찍은 계약서는…….
사기계약서였다.
내게 모든 것을 양도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일종의 확인서랄까.
그리고 오늘. 제 발로 내 보육원을 찾아온 제페토에게, 나는 그 사기계약서를 펄럭이며 흔들거렸다. 이게 바로, 제페토가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씨근덕거리는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