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제페토 아르게모나의 만면에 피어난 웃음꽃은 쉬이 사라지는 법을 몰랐다. 그의 앞에 자리한 분홍색 머리카락의 미남자 때문이었다.
안더스 트리탄 후작. 이 남자는 아델트 공작과 다르게 말이 꽤 잘 통했다. 제 아비처럼 재물에 눈이 밝았고, 사리를 분별할 줄 알았다. 무엇보다 제페토의 가치를 알아본다는 점. 그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트리탄 후작 가를 첫 번째 목적지로 정한 것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몇 달 전 알몬트 항구에서 들었던 소문 때문이었다. 트리탄 후작의 누이 엘리나가 아델트 공작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던 그 소문 말이다. 어여쁜 제 귀족 누이가 죽었는데 멀쩡한 사람이라면 가만있을 리 없지.
그 복수의 길을 제페토 자신이 열어준다면! 그보다 더 멋진 순간이 있을까. 그리고, 제페토의 예상은 적중했다. 안더스 트리탄은 아델트 공작에게 꽤 적대적이었으니. 안더스는 아델트 공작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퍽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눈썹을 꿈틀거리며 인상을 쓰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제페토는 그것이 매우 짜릿했다.
오랜만에 받아보는 환대에 제페토는 기세등등했다. 근래 들어 누군가 자신에게 따뜻한 차 한 잔 건넸던 적이 있었던가. 이 비싼 디저트는 또 어떻고! 애초에 여기부터 찾아왔어야 했어. 괜히 아델트를 들쑤셨다가 그 고생이나 하고 말이야! 시꺼먼 지하 감옥에 처박혀 허여멀건 한 수프와 다 부서진 빵 쪼가리나 처먹었던 몇 달간의 노고를 떠올리자 울컥 짜증이 치밀었다.
집무실의 푹신한 소파에 거만하게 앉은 제페토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트리탄 후작님께서 아실지 모르시겠지만. 저는 과거에 발르테르 보육원을 운영했습니다.”
“아버님께 익히 들은 적 있습니다. 다만 이렇게 뵙는 것은 처음이군요. 그보다 몸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 어디 불편한 곳이 있으십니까?”
“아닙니다, 트리탄 후작님. 지금은 제 신세가 꽤나 처량한 탓에 그리 보이겠지만, 저는 본래 사업가 기질이 다분하답니다. 무척 깔끔하고, 점잖은 사람입니다만.”
방금 감옥에서 쫓겨난 탓에 제페토의 행색은 남루했다. 그에 민망해진 제페토가 헛기침하며 핑계를 댔다.
“그래서 트리탄 후작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어떤 도움이 필요하신지요?”
“현재 발르테르 보육원의 소유권을 후작님이 갖고 계신 줄로 압니다만.”
“맞습니다. 한데……. 그것을 어찌 남작님께서 아셨는지요?”
“이거 왜 모른 척입니까? 선대후작님과 제가 함께 보육원 사업을 했던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셨으면서.”
안더스 트리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 소유권을 제게 넘겨주셨으면 좋겠군요.”
“왜죠?”
“그 보육원 부지가 몇 년째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소유권을 다시 제게 넘기시면, 제가 다시 한번 일으켜 보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트리탄 가문도 반드시 득을 보리라 생각합니다만.”
“보육원을 다시 부흥시킨다…….”
안더스 트리탄이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고민 끝에, 그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마침 제가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제 신부에게 좋은 선물이 될 수 있겠군요. 그런데…… 소유권 이전을 위한 돈은 어찌 마련하실 생각입니까?”
“크흠, 그게 중요한 이야기가 될 것 같군요. 저를 믿고 후작님께서 절반만 빌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안더스의 한쪽 눈썹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만……. 그렇다면 나머지 절반은 어쩌실 셈입니까?”
“아, 제가 아는 귀족 투자자가 있는데. 트리탄 후작 가가 이 사업을 돕는다는 것을 안다면 군말 않고 뛰어들 겁니다. 늘 그 순간만 기다려왔으니.”
“그렇군요. 실례지만 그분이 누구신지 제가 알 수 있을까요?”
집무실에 아무도 없음에도, 제페토는 안더스의 귓가에 대고 조용히 속닥거렸다.
“아아… 그분이…….”
“예. 예전에도 선대후작님과 저랑 함께 일했지요. 제가 설득해서 이 자리에 데려오겠습니다.”
“뭐, 빨라서 좋네요.”
“아무리 그래도 후작님만 하겠습니까. 아델트 공작만 생각하면 제가 정말……!”
“그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군요.”
“아, 아무래도 그렇겠죠.”
“투자자와 함께 다시 방문해주십시오. 필요한 서류를 갖춰 놓겠습니다.”
멋쩍게 뒷머리를 매만지던 제페토가 만족스럽게 일어났다. 아주 마음에 들어! 이렇게 시원시원하니 트리탄 선대후작도 노예 사업에 뛰어들었던 게지! 그 더러운 핏줄이 어디 가겠어?
*
수도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은 제페토는 단꿈에 잠겼다.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하루빨리 모든 것을 되찾을 생각뿐이었다.
절룩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수도 끝자락에 있는 거대한 저택의 초인종을 눌렀다. 제페토의 구질구질한 차림새에 어떤 경호원도 그를 집에 들이려 하지 않았으나, 때마침 지나가던 저택의 안주인이 제페토를 발견했다. 새빨간 머리카락의 그녀는 턱이 빠질 듯 경악했다.
“세상에……! 어쩌다 이런 꼴로……!”
“오랜만이오, 틸다 레트랑 부인.”
“싹 망했다더니, 거지꼴이 돼버렸잖아 정말? 아오. 냄새나! 더러워 죽겠네.”
“몇 해가 지나도록 걸레를 문 부인의 그 입은 변함이 없군요.”
틸다는 기가 차서 짜증스레 대꾸했다.
“너도 그 입은 여전히 살아있군. 도대체 여긴 어쩐 일이야?”
“레트랑 백작님을 만나러 왔습니다만.”
“허, 또 같잖은 사업 이야기나 하려는 거군. 어디 돌아다니지 말고 이 정원에서 기다려. 곧 백작님이 나오실 테니.”
틸다는 냄새나는 제페토를 집 안으로 들이기도 싫다는 듯 손가락으로 코를 콱 막고 안으로 들어갔다. 제페토는 그런 틸다를 보며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짜증나는 여편네, 오만하기 이를 데가 없군. 저 가증스러운 빨간색. 확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정원 테이블에 앉아있기를 한참, 뚱뚱한 체격의 레트랑 백작이 나타났다. 백작은 놀란 눈으로 제페토 아르게모나를 응시했다.
“아니, 자네가 이 헤르본 제국에 있었다니! 왜 이제야 왔는가!”
“그간 일이 많았습니다, 백작님. 근래 안녕하셨는지요?”
“아니, 안녕 못 하네. 이리저리 벌려놓았던 사업 실적들이 요새 들어 영 시원찮아서 아주 걱정일세!”
제페토는 이게 웬 떡이냐 싶어 재빠르게 답했다.
“그래서 제가 백작님을 찾아온 게 아니겠습니까.”
“어디 좋은 소식이 있는가?”
“예. 제가 다시 발르테르 보육원을 일으켜 볼 테니 예전처럼 노예 사업을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나도 그러고야 싶지. 그것만큼 돈 잘 벌리는 일이 어디에 있다고! 세금도 안내고 말이야.”
두 사람은 낄낄거렸다.
“하나 그 길은 다 막히지 않았는가. 자네는 보육원 소유권도 잃었고!”
“제가 오늘 안더스 트리탄 후작을 만나 대화를 끝냈습니다.”
“뭐야?”
“돈만 가져오면 권리를 넘기겠다는 확답을 듣고 오는 길이지요! 게다가 레트랑 백작님과 함께할 거라 이야기를 꺼냈더니 무척 반가워하셨습니다.”
“그게 진짜란 말이지?”
레트랑 백작의 얼굴에 커다란 웃음이 맺혔다. 그러나 한편으로, 백작은 의아했다. 과거에 한참이나 안더스 트리탄 후작을 만나 설득해보려 했지만 무참하게 실패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이 거지꼴을 한 자를 보고 소유권을 내놓고 사업을 돕기까지 한다고?
무언가 께름칙했다. 하지만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요새 다른 사업들이 힘들어지려던 찰나라 더욱 마음이 급했다. 게다가 예전만큼 돈을 못 벌어온다고 집에서 자신을 무시하는 부인을 보라지. 보육원을 되찾기만 한다면 명성과 부를 거머쥐는 것은 쉬울 터였으니! 백작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곧바로 승낙했다.
두 남자는 급히 준비된 마차에 올라탔다. 오로지 제 욕심만 그득한 제페토와 그런 그의 말을 아직 완전히 믿지 못하는 백작. 그들은 마차에서 서로를 위하는 척 대화를 나눴으나, 사실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있었다. 저놈은 언젠가 내 뒤통수를 치겠지. 그들의 밑바닥에는 불신이 바탕으로 깔려있었으니. 도착 직전까지 호탕하게 웃으면서도, 두 사람은 서로의 위아래를 훑으며 경계했다.
제페토 아르게모나의 말대로, 트리탄 후작은 두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더스는 분홍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예쁘게 웃었다. 그 미소에, 그제야 두 남자의 마음속에 커다란 신뢰가 싹트기 시작했다. 벌써부터 동지애가 생기는 듯했다.
“기다렸습니다. 그럼 거래를 시작해 볼까요?”
안더스 트리탄은 두 사람에게 계약서를 넘겼다.
“제일 밑에 도장만 찍으시면 됩니다.”
제페토와 레트랑 백작이 계약서를 꼼꼼히 읽으려던 찰나, 안더스가 갑자기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그들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손목시계를 훑었다가 짜증스레 넥타이를 잡아당겼다가. 커다란 한숨을 내쉬는가 하면 자꾸만 책상을 두드려댔다가. 두 남자는 눈치를 보며 힐끔거렸다.
“저…… 혹시 바쁘신 일이 있는지요.”
“아닙니다. 그저 저를 못 믿으시는가 해서.”
“예?”
“계약서를 너무 꼼꼼히 읽으시기에.”
“아, 아닙니다! 후작님을 못 믿다니요! 당장 도장 찍어야지요! 찍겠습니다!”
두 남자는 단번에 도장을 찍고 돈을 건넸다. 천만 드랑. 레트랑 백작에게는 사실 있으나 마나 한 돈이었지만, 제페토에게는 아니었다. 그는 저 돈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안더스 트리탄이 제페토에게 빌려준 천만 드랑까지 합하여 총 이천만 드랑. 그것으로 거래가 성사되었다. 두 사람은 점잖은 척 체면을 차렸지만, 속으로는 온갖 부에 취해 있는 중이었다.
도장 찍힌 계약서를 정갈하게 정리하던 안더스 트리탄이 그제야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이, 이걸로 끝입니까?”
“예. 축하드립니다. 먼 길, 잘 가십시오.”
*
보육원 인수 후 이틀 뒤. 제페토 아르게모나는 발르테르 보육원을 찾아갔다. 많이 녹슬기는 했어도 관리하면 그만일 터. 어쨌든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지 않았는가! 제페토는 흥얼거리며 곧장 원장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좋았던 기분도 잠시, 원장실 가죽 의자에 누군가 뒤돌아 앉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내 자리에 감히 누가 허락도 없이! 그것도 내가 앉기도 전에! 제페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봐! 넌 뭐야! 뭔데 거기에 앉아있어?”
그러자 의자가 빙그르르 돌아갔다. 그곳에는, 금발 머리에 파란 눈의 소녀가 앉아있었다. 창을 통해 들어온 햇빛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눈부시게 빛났다. 제페토는 눈을 찌푸리며 소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너……! 너는……!”
“어머, 또 보네요? 여긴 어쩐 일로?”
제페토는 크게 당황하여 말문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어쩐 일이라니! 내 보육원이니까……!”
시아라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상하네.”
“뭐?”
“여기 제껀데요?”
그제야 제페토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