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카시안은 지하 감옥으로 향하는 문을 만들었다.
계단 구석에 순식간에 생겨난 마법 문을 보자 지난번 우연히 이곳에 들어갔던 일이 떠올랐다. 그날 이 문을 열고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나는 내 과거를 영원히 묻어두고 살았겠지.
저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카시안과 함께 차디찬 돌바닥에 발을 내디뎠다. 습윤한 지하 감옥은 여전히 섬뜩했다. 기나긴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구역질이 났으며, 가슴이 저몄다. 그리고 그 끝에, 내가 그토록 증오하던 이가 있었다. 나를, 내 가족을 빼앗아간 자가.
그러나 제페토의 몸은 바닥으로 축 늘어져 있었다. 조금씩 꿈틀거리는 팔과 다리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핏기 하나 없이 넋 나간 얼굴에는 표정의 변화조차 없었기에.
“이 사람 왜 이래요?”
“환각 마법에 걸려있어. 지금은 지옥을 여행 중이겠지.”
“그런 것치고는 편안해 보이는데요…….”
“글쎄. 겉으로 보기에 티가 안 날 뿐이지, 환각 속에서는 온몸이 불에 타들어 가고 있어.”
“… 그게 그저 환각이라니. 아쉽네요.”
그 말에 카시안이 곧장 물었다.
“네가 원한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저 쓰레기를 불태워 없앨 수도 있어.”
“아뇨……! 그건 좀…….”
“지금 마법을 풀어줄게. 다만 조심해야 해. 보통의 인간이라면 환각에서 깨어난 뒤에 피해자의 고통을 이해하지만, 저 파렴치한이 그럴 거라 기대하지 않거든.”
카시안은 신물이 나는 말투로 제페토를 노려보았다.
“저 쓰레기는… 변함없이 쓰레기일 거라 확신하지만.”
나는 걱정하지 말라 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시안이 마법수식을 외우고 손을 펼치자 푸른 빛이 제페토에게 옮겨갔다. 기다란 빛은 덩굴처럼 제페토를 옭아맸다. 그러자 시체처럼 창백했던 악인의 얼굴에 핏기가 돌기 시작했다. 드디어, 제페토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하나 아직 어지러운 듯, 몇 차례 세차게 머리를 털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곧 이곳이 현실임을 자각했다. 놀란 제페토의 눈동자가 튀어나올 듯 커졌다.
“끄, 끝났어! 드, 드디어 지옥이 끝났어!”
나는 카시안의 뒤에 서서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고개를 돌린 제페토가 카시안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곧바로 카시안에게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공작님. 잘못, 잘못했습니다! 이제 저를 살려주시려고 하는 건가요? 예? 드디어 저를 용서하시려는 건가요?”
카시안은 입술을 비틀어 끌어올렸다.
“용서? 역겹네. 그 더러운 입에서 용서라는 말이 나오면 안 되지.”
“설마 아, 아직도 화가 나신 건가요? 저는 살려만 주신다면 이 무릎이야 백번 천번도 더 꿇을 수 있습니다.”
“잘 들어. 네가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할 사람은 내가 아니니까. 그마저도 용서란 불가능하지만.”
“예?”
나는 제페토의 앞으로 걸어나갔다. 제페토는 머리를 갸웃거리며 가늘게 뜬 눈으로 찬찬히 나를 훑었다. 이내 그의 동공이 휘둥그레졌다.
“너, 너는!”
“오랜만이네요.”
“네, 네가 여, 여기에 어떻게……!”
“글쎄요. 제가 어떻게 살아있을까요?”
제페토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얼이 나갔다. 지금 이것이 아직도 환각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위해, 자신의 뺨을 여러 차례 때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비웃었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있어서? 그럼 다행 아닌가? 모두가 죽은 줄 알았는데 하나라도 살아남았으니. 감동적이지 않나요?”
“… 이것들이… 저년이 살아있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감히 나를 가지고 논 거야?”
제페토가 카시안을 쏘아보았다.
“공작님. 이 아이가 살아있다는 말은 하지 않으셨잖아요?”
“그걸 내가 왜 너한테 말해야 해?”
“그, 그야 저도 아이들의 생사를 걱정한 입장으로써……!”
“그 입 다물어. 앞으로 네 입에서 용서나 걱정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그 이빨을 하나씩 부러뜨려줄 테니.”
카시안이 낮은 목소리로 윽박지르자 제페토가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나 나를 얕잡아 보는 태도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아직도 나를, 어린 시절의 무기력하고 나약한 존재라고 여기는 듯했다. 내게 닿은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나도 지지 않고 제페토를 응시했다. 그렇게 계속 노려봐봐.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나는 오히려 철장 앞으로 한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왜 저를 그리도 괴롭히셨나요?”
“그게 이유가 필요한 일인가?”
“네. 그나마 이유가 있었다면 당신을 이해하려 노력이라도 해볼 테니.”
그러자 제페토가 광기 어린 눈을 부릅뜨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이해. 이해라. 그래 좋아.”
내 코앞에서 철장을 양손에 꽉 쥐더니 세차게 흔들었다. 쾅쾅거리며 쇠 흔들리는 소리로 나를 겁주자, 카시안이 다가와 나를 뒤로 물러서게 했다.
“왜 너를 괴롭혔냐니! 네 친부모가 죽어버렸잖아!”
잠자코 뒤에 서 있던 나는 전혀 예상 밖의 소리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 뭐라고요? 지금 제 친부모라고 하셨어요?”
“그래! 겨우 남작 작위라도 귀족이랍시고 잘 부탁한다며 너를 맡기더군. 그 당시 꽤 큰돈을 받기는 했지. 그땐 좋았는데 말이야.”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었다. 나를 낳아준 부모는 도대체 누구였을까. 왜 나를 버렸을까. 대체 뭐하던 사람들이었을까! 알게 되면 상처받을까 궁금해질 때마다 애써 무시해 왔다. 그런데 도대체 왜……. 왜 이 남자가 그 이야기를……!
“한데 네 부모가 전쟁 통에 죽어버렸지 뭐야?”
“네……?”
“내가 네년을 정성껏 키워봐야 돈이 나올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었지! 그게 내 잘못이야?”
“돈……. 또 돈…….”
“그러니 네가 그런 대우를 받은 것은 내 탓이 아니라고. 널 버리고 간 네 부모를 원망하라고!”
“돈……. 고작 그까짓 돈 때문에 그따위 짓을 했다고……?”
“그래, 돈! 인생에서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게 또 뭐가 있을까!”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게다가 너 때문에 저 멀쩡했던 마법사가 다쳐서 마법을 잃었었지! 네가 절벽에서 추락했던 탓에! 내가 그때 아델트 선대 공작 뵐 낯이 없었다니까? 그러니 널 미워하지 않고 배겨?”
분노를 억누르고 있던 카시안이 천천히 입을 뗐다.
“정말이지 역겨워서 못 들어주겠네.”
축축한 지하 감옥에 카시안의 저음이 더 낮게 가라앉았다.
“제페토. 네가 그토록 바랐던 마법. 그걸로 이제 널 죽여줄게.”
카시안의 주변에서 다시 한번 푸른 빛이 일렁거렸다. 그러나 아까와는 차원이 달랐다.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건 마법이라기보다는, 살기라고. 저 사람은 진짜로 죽는다. 정말 죽겠어. 말려야 해!
“크어억!”
이미 숨통을 조이고 있는 것처럼, 제페토의 눈동자에 시뻘건 핏줄이 돋아났다. 곧 그의 두 다리가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제페토는 캑캑거리며 고통을 호소했다. 그러나 이성을 잃은 카시안은 자비를 몰랐다. 더욱더 강하게, 제페토의 목을 옭아맸다.
“그, 그만! 공작님, 잠깐 멈춰요. 죽이면 안 돼요!”
“…….”
“카시안! 제발, 제발요!”
“시아라, 나는 너를 괴롭게 했던 쓰레기가 살아 숨 쉬는 꼴은 못 보겠어.”
“그래도… 지금은 안 돼요. 아직 알아내야 할 게 많아요!”
카시안은 침묵했다.
“마차에서 죽은 아이들 전부… 함께 자랐던 친구들이잖아요. 도대체 그 뒤에 누가 있었는지 알아내기 전까지 이 사람은 죽으면 안 돼요!”
“이실직고할 때까지 고문하면 죽기 직전에 밝히겠지. 그러고도 남을 놈이니까.”
“물론 그게 제일 좋은 생각이지만……!”
정말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나도 제페토의 얼굴을 힘껏 걷어차고 싶었으니까. 그러나 기절 직전의 제페토를 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그 귀족들이 누군지 밝혀서 함께 잡아야 하니까요. 이 사람을 이용해서 증거를 모아야 해요!”
그 말에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던 제페토가 바닥으로 낙하했다. 제페토는 바닥을 뒹굴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철장 문을 열고 들어간 카시안이 바닥에 쓰러진 제페토의 뺨을 걷어 올렸다. 연달아 네다섯 대를 맞아 오른뺨이 발갛게 부어올랐을 즈음, 제페토가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뜨자마자 뺨 한 대가 더 날아올 기세에, 제페토는 곧바로 무릎을 조아렸다.
“그, 그만! 그만 하세요!”
“너한테 기회를 한 번 더 줄게.”
제페토는 양 손바닥을 맞대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그 장면은 정말이지 눈물겹도록 치가 떨렸다.
“예, 예! 얼마든지 시켜만 주십시오. 살려만 주신다면 다 하겠습니다!”
카시안은 겉옷 주머니에서 알약처럼 생긴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먹어.”
“이게 뭔가요……?”
“널 추적하는 장치.”
“왜 이, 이런 것을…….”
“그럼 내가 널 뭘 믿고 내보내겠어? 삼켜.”
그것을 꿀꺽 삼킨 뒤, 제페토가 물었다. 벼랑에 선 듯한 심정으로, 아주 간절하게.
“제, 제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 마, 맡겨만 주십시오.”
그러나 카시안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필요 없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예?”
“밖에 나가서 평소 너 하던 짓거리대로 하면 된다고.”
“그, 그게 무슨…….”
“내가 시킨다고 뭘 제대로나 하겠어? 뒤통수나 안 치면 다행이지.”
“…….”
“어차피 네가 뭘 하든 다 보이니까. 어디 한번 마음껏 살아 봐.”
그 말에 더욱 오금이 저렸지만, 탈출할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
제페토 아르게모나는 저택 밖으로 나오자마자 삼켰던 추적기를 토해냈다. 다행히도 그 물건은 제 속에서 빠져나와 바닥을 뒹굴었다. 위치 추적이라는 말에 뭐 대단한 게 있는 줄 알았더니. 별거 아니었잖아? 멍청한 놈. 그는 그것을 숲속 저 멀리 집어 던졌다.
“감히 제까짓 것들이 나를 무시하고 겁박해?”
이렇게 된 이상 제페토가 살아남을 방법은 딱 한 가지뿐이었다. 자신과 노예 사업을 했던 귀족들을 찾아가 이 사실을 알리고, 아델트 공작을 먼저 치는 것! 그러면서 제페토 본인은 보육원을 되찾고, 사업도 재개하면 되는 일이었다. 이미 에벨 백작이 이 덫에 걸려 몰락하지 않았던가.
물론 이대로 다시 외국으로 도망치는 방법도 있었지만, 벌써 몇 달에 걸쳐 고문을 당한 터라 그것은 영 성에 차지 않았다. 아델트 공작이 제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꼴을 보아야 속이 시원할 터였으니. 아주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겠어!
“자 그럼 어디를 먼저 가야 하지? 수도? 아! 제국의 동쪽이 좋겠군.”
제페토는 비열하게 웃었다. 그의 다리는 여전히 절뚝거렸지만, 다시 돈을 거머쥘 생각을 하니 힘이 불끈 솟아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