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씩씩거리며 집으로 들어선 라튼 레트랑은 곧장 제 엄마를 찾아갔다.
“엄마……! 도대체 저한테 왜 그러시는 거예요?”
“라튼? 집에 왔으면 엄마한테 인사를 먼저 해야 하지 않겠니?”
태평하게 거실 소파에 앉아있던 틸다가 아들을 힐긋 흘겨보았다.
“오랜만에 외출하기에 상태가 좋아졌기를 기대했건만. 왜 또 그리 저기압인 게냐?”
“그걸 지금 몰라서 여쭤보시는 건가요? 그 소문……! 엄마가 낸 거죠? 그쵸?”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하아……! 시아라에 관한 것들 말이에요! 왜! 도대체 왜 그걸 떠벌리고 다니는 거예요! 대체 왜!”
그러나 틸다는 되려 아들을 나무랐다.
“라튼.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엄마 말을 안 듣는 아들이 된 거니?”
표독스럽게 눈을 뜬 틸다 레트랑이 라튼을 향해 종이 한 장을 집어던졌다.
“황실 근위대에서 서한이 왔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또 한 번 입단을 미루면 자격이 박탈된다더구나.”
“…… 네?”
“그게 무슨 소리인지 잘 알고 있겠지? 라튼. 이 엄마가 이렇게 다정하게 말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란다.”
라튼은 입술 안쪽의 여린 살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초조하고 답답했다. 곧 아델트 공작에게 개죽음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황실 근위대가 웬 말이람! 그러나 그 사실을 곧이곧대로 엄마에게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근위대 훈련은 당장 다음 주부터다. 어서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렴.”
주먹을 굳세게 쥐는 라튼을 향해 틸다가 싱긋 웃어 보였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너는 먼 길을 돌아왔잖니? 이제 이 엄마의 행복을 위해 네가 노력해야지.”
제 엄마에게 찍소리 한 번 못한 라튼이 의지를 잃고 돌아섰다.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틸다는 혀를 끌끌 찼다. 아무리 제 아들이라지만, 요새는 꼭 빈 쭉정이처럼 굴지 않던가. 지금으로써는 다른 바쁜 일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했다. 아들이 쓸모를 다할 수 있도록 역할을 정해주는 것. 그게 바로 유능한 엄마가 할 일이었으니까.
라튼이 사라진 거실에는 틸다와 아리안 두 사람이 남았다.
“시아라 그 계집애가 뒷배가 든든한가 봐? 그 집을 찾아갔던 사람들이 전부 벌벌 떨더군!”
아리안은 아까 전 찻집 손님들이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예. 아델트 공작님이 관여된 것 같다고…….”
“괘씸하긴……! 분명 나한테 돈다발을 던졌던 날 데리고 왔던 남자도 아델트 공작이 틀림없어!”
“마님. 다시 말씀드리지만 전 그날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닥쳐!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아리안은 혼란스러웠다. 그 자리에 정말로 다른 누군가가 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왜 그 자신은 기억을 못 하는 거지? 분명 처음 찻집을 열고 들어왔을 때 시아라와 또 한 사람 가면을 쓴……. 가만, 남자! 그 가면 쓴 남자는 어디로 사라졌더라?
과거를 회상하던 아리안의 두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설마……!
그 순간, 온통 새까맣던 남자의 모습이 머릿속에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남자는 시아라와 함께 아주 여유롭게 찻집에 들어왔다. 그 안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아리안을 보며 의기양양하게 미소짓던 남자는, 곧바로 두 손가락을 튕겼다. 그 뒤로는 아무런 기억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아리안이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시아라가 틸다를 향해 돈다발을 던진 다음이 아니었던가.
‘진짜로 마법사였어?’
그가 내 기억을 지운 거야……!
그 자리에 마법사가 있었던 것도 놀라 자빠질 일인데, 그게 혹 틸다의 말처럼 아델트 공작이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아무래도 열 받아서 안 되겠어. 아리안, 이번엔 네가 직접 움직여야겠다.”
“네? 제가요?”
“그래! 그년을 설득해서 데리고 오든 납치를 해서 끌고 오든 내 눈앞에 가져다 놔!”
“그… 그건…….”
아리안은 머뭇거렸다. 여태껏 본인이 시아라에게 직접 위해를 가한 적은 없었다. 시아라의 엄마가 죽을 때도 그 죽음을 방관했을 뿐. 그는 그녀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그러니 아리안 그 자신은 벌 받지 않을 거라 스스로 위안 삼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직접 움직이라니!
갑자기 간담이 서늘해졌다. 손바닥에 땀이 흐르고 숨이 막혔다. 그러나 아리안의 속도 모르고, 제 주인의 고개는 여전히 빳빳했다.
“왜, 못하겠어? 이제는 네놈의 자식들이 어떻게 크든 상관이 없나 봐?”
아리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을 꽁꽁 옭아매는 마법의 밧줄 같은 말. 주인의 입에서 저 소리가 나올 때면 아리안이 할 수 있는 답은 늘 하나였다.
“…… 예. 알겠습니다.”
아리안은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서도 주인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이토록 쉽고 완벽한 복종이 또 있을까. 틸다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
이제 다시는 책을 읽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레아는, 막상 도서관에 가자 고사리 같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출발 신호를 기다리는 달리기 선수처럼, 침을 꼴깍 삼키고 당장이라도 이 넓은 책방을 뛰어다닐 기세였다.
어서 가라고 등허리를 토닥여주자 곧장 달려가 열심히 책을 골라 집었다. 나는 레아를 무릎에 앉히고 아이가 골라온 책을 읽어주었다. 꽤 오랜 시간 버틴 레오는 나와 레아 옆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지루한지 밖으로 나갔다.
짧은 시집 몇 권을 읽고 난 뒤에야 레아는 행복하게 웃었다.
“이제 오빠 찾으러 갈까?”
“네!”
레오는 응접실에서 나무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아이의 옆에는 카시안이 함께였다. 문 앞에서 들려온 인기척에, 카시안은 반달 모양으로 눈꼬리를 접었다.
“왔어?”
“공작님……. 설마 오늘 또 일정 취소하신 거 아니죠?”
“아니야! 새벽부터 일했단 말이야.”
“정말요?”
“응.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내게 머리를 들이밀기에, 내 입에서는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을 쓰담쓰담하자 그제야 그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같이 밥 먹자.”
레아와 레오까지 있으니 모처럼 시끌벅적한 저녁 식사였다. 여름 해가 길어진 덕분에, 저녁나절임에도 아직도 볕이 좋았다. 우리는 정원에 자리한 테이블에 앉았다.
나는 옆자리에 앉은 카시안에게 넌지시 물었다.
“정말 공작님이 아이들 초대한 거예요?”
카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별거 아니야. 그냥, 네가 보고 싶어 할 것 같았거든.”
“그건 또 어떻게 알았을까.”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자 따뜻한 바람이 스쳤다.
디저트까지 다 먹고 나서야 해가 저물었다. 우리는 정원에 돗자리를 깔고 앉았다. 한참을 꽃밭을 뛰놀며 재잘거리던 아이들은, 금세 지쳐 까무룩 잠이 들었다. 나는 내 무릎을 베고 누운 레아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내 등을 맞대고 앉은 카시안은 옆에서 서류를 읽고 있었다. 그 역시 한 손으로는 자신의 무릎을 베고 누운 레오의 머릿결을 간지럽히면서.
노을이 내려앉은 이 저녁은 황홀하고, 평온했다. 딱 한 가지, 옆에서 쉴 새 없이 떠드는 알버트와 낸시만 제외하면.
두 사람은 요즈음 부쩍 친해져서 수다가 끊임없었다. 주제는 또 어찌나 다양한지. 유행하는 옷차림과 액세서리, 자신들이 먹어 본 음식부터 현재 제국의 유명인사까지.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이나 떠들던 알버트가 카시안에게 물었다.
“맞다. 각하! 안더스 트리탄 후작님이 결혼을 준비 중이시라던데. 알고 계셨나요?”
“응.”
“어쩐지. 요새 핸더슨 그 자식이 들떠 보이더라니.”
처음 듣는 이름에 내가 갸웃거렸다.
“핸더슨이 누구예요?”
“아, 아가씨는 모르시겠군요. 저랑 한 동네서 나고 자란 원수인데, 트리탄 후작님의 비서거든요.”
“아……. 원수. 그러니까 친구란 말이죠?”
“친구라니! 절대 아닙니다! 하여간, 그놈한테 괜히 지는 기분이 들더라니까요?”
알버트가 한숨을 푹푹 내쉬며 신세 한탄했다.
“그래서 감히 여쭤봅니다만.”
“네.”
“두 분은 도대체 언제 결혼하시나요?”
“네?”
훅 들어온 질문에 크게 당황해서, 하마터면 레아의 엉킨 머리카락을 잡아당길 뻔했다.
“아니……. 주변 귀족 분들은 하나둘 짝을 찾아가시는데 우리 각하만 이렇게…….”
그러나 놀란 나와 달리 카시안은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로 조용히 대꾸했다.
“그런 건 내가 알아서 해. 넌 좀 가만히 있어.”
그리고는 다시 서류에 얼굴을 묻었다.
“아무튼, 각하는 눈치가 없으시다니까.”
카시안은 연신 중얼중얼 대는 알버트를 단번에 무시했다. 하나 카시안의 목덜미와 귓등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의 목덜미 한가운데를 손가락으로 콕 찌르자 카시안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게 귀여워 쿡 하고 웃던 그때, 저쪽에서 다급하게 달려오는 펠릭스의 모습이 보였다. 펠릭스의 발걸음은 정확히 우리를, 나를 향해 있었다.
“펠릭스?”
나는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요새 꽤 변한 펠릭스의 태도에 살짝 서운한 마음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펠릭스의 상기된 표정과 어딘가 조급해 보이는 행동은 처음 보는 것이었기에, 그에게서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펠릭스는 밭은 숨을 몰아쉬며 내 코앞까지 다가왔다.
“누나.”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엄마……. 엄마가 일어났어.”
나는 레아를 옆으로 누이고 벌떡 일어섰다.
“뭐? 그게 정말이야?”
“응. 어젯밤에 깨어났어. 오늘 누나 이야기를 했더니……. 누나가 보고 싶대. 그런데 혹시라도 뭐가 잘못될까 봐… 마음이 급해서…….”
“가자. 얼른 가.”
하지만 조급한 나와 달리 이 상황을 모르는 나머지 사람들은 멀뚱히 우리를 지켜볼 뿐이었다. 카시안에게는 펠릭스의 엄마가 내 유모였다고 말한 적이 있기는 했으나, 그 역시 당황스러울 것은 뻔했다.
“유, 유모가……. 저를 키워주셨던 유모가 병원에 계셨는데……. 지금 깨어나셨대요!”
그 말에 카시안은 재빠르게 마차를 대기시키라 명했다. 낸시는 곧장 마부에게 달려갔다.
“나도 같이 갈게.”
“아니에요. 얼른 다녀올게요.”
“날이 벌써 어둡잖아. 위험하니까 같이 가.”
“정말 괜찮은데…….”
“널 돌봐주셨던 분이라며. 인사드려야지. 그리고 저놈도… 마음에 안 들지만 어쨌건 내 밑에……. 됐다, 어서 가지.”
알버트는 쌍둥이의 머리맡에 푹신한 쿠션을 받쳐주며 든든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들은 제가 책임지고 집에 안전히 보낼 테니, 아무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우리 세 사람은 급히 준비된 마차에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