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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맞고 튀었는데 공작님이 집착한다-76화 (76/135)

76.

‘네 집처럼 편하게 지내.’라던가, ‘여기서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해.’라던가. 요즘 들어 이보다 더 무서운 말이 없었다.

아무리 아델트 저택의 모든 이들이 내게 호의적이라고는 해도, 본디 객식구의 처지란 그런 것 아니겠는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지만 혼자서 눈칫밥을 먹고, 설령 폐를 끼치지는 않을까 조심스레 행동하고.

내 것이라고는 옷가지 몇 벌 뿐인 이 공간이 가끔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도서관으로 달려가 아무 책이나 골라 들고 조용히 읽기 시작했다. 사라락 책장 넘기는 소리가 들리면, 잡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낮에는 일부러 카시안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요즘처럼 바쁜 시기에 카시안의 곁에 있으면 그가 일에 집중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으니. 게다가 일정을 죄다 취소해버렸던 일로 아직껏 뿔이 난 알버트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한가득하였다.

저택의 가신들은 각자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바삐 움직였다. 나는 그 틈에 섞여 조용한 일상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 하루는 평온하고, 더할 나위 없이 아늑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때때로 지루하고 따분하기도 했다.

“아가씨! 손님이 찾아왔어요.”

그러던 와중 낸시가 가뭄에 단비 같은 소식을 전했다.

“손님? 그것도 나를 찾아온 손님이라니?”

‘혹시 펠릭스가 온 걸까?’ 갸우뚱거리는 내 질문에도 낸시는 대답 대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재빨리 일층 응접실로 내려갔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돌아서려는 순간, 병아리같이 조그만 두 아이가 소파 위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다시 앞을 보면 또다시 그 아래로 숨고. 숨바꼭질이라도 하듯 숨었다 튀어나오기를 반복하는 쌍둥이를 보며 그대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흐음……. 너무 어렵다! 도무지 못 찾겠어! 주방에 있으려나?”

내가 밖으로 나가려 하자 그제야 레오가 벌떡 일어섰다.

“우리는 여기에 있지요!”

“언니!”

레오와 레아는 소파 아래로 껑충 뛰어내려 내게 달려왔다.

“세상에…… 너희가 여기는 어떻게……!”

나는 쌍둥이를 부둥켜안았다. 마지막 만남 이후 몇 달 사이에 레아와 레오의 키는 훌쩍 커버렸다. 게다가 퍽 점잖아지기까지 해서, 이제는 꼬마라기보다는 ‘꼬마 어른’의 위용을 내뿜었다. 물론 예의 그 개구쟁이 같은 순간들은 여전했지만.

“집에서 여기까지 어떻게 왔어? 둘이서만 온 거야?”

“마차 타고! 멋쟁이 공작님이 우리를 초대해주셨어!”

“아델트 공작님이?”

레오는 활기차게 웃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레오의 노란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아이는 나를 다시 와락 껴안았다. 그러나 그 옆에 서 있던 레아의 표정은 어쩐지 무거웠다. 나는 무릎을 굽혀 레아와 시선을 맞췄다.

“우리 꼬마 공주님한테 무슨 일이 있었어요? 왜 이렇게 시무룩하지?”

레아는 아무 말 없이 머리를 가로저으며 도리질했다. 그러나 아이의 표정은, 누가 보아도 ‘나 무슨 일 있었어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간 고민하다가 레아를 위해 도서관에 가자고 제안했다. 레아는 누구보다 책 읽는 것을 좋아했으니까. 그러나 아이는 더욱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이제…… 책 안 읽을 거예요.”

“응? 레아야, 그게 무슨 소리야?”

레아는 여전히 말이 없었고, 의기소침한 제 동생을 대신해 레오가 입을 열었다.

“어제 나쁜 이모가 우리 집에 와서 레아한테 뭐라고 했어! 진짜 진짜 나쁜 이모야!”

“나쁜 이모?”

“응! 레아가 박사님이 되겠다고 했더니 그런 건 죽어야 이름을 남기는 거라고 레아를 무시했어!”

“뭐?”

순간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띠용하고 진동이 울렸다. 찬찬히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전말은 이러했다.

한나의 언니 수잔나, 그러니까 아이들이 말하는 이 나쁜 이모는, 이따금씩 쌍둥이의 집에 왔다. 여러 사건으로 한나가 바빴고 펠릭스도 나도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았으니, 한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수잔나는 늘 자신의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 귀족 가에 시집간 그녀는 자기 자식들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리고 사건은, 어제 낮에 일어났다.

수잔나의 여덟 살 난 아들이 레아가 읽고 있던 책을 모조리 찢어버린 것이었다. 레아가 엉엉 울며 돌려놓으라고 하자 수잔나는 되려 쏘아붙였다.

“레아야, 어차피 넌 네가 원하는 것은 될 수 없단다. 예쁘고 말 잘 듣는 숙녀로 자라 이모처럼 귀족이랑 결혼하면 되는데 그따위 책이 다 무슨 소용이니?”

그러면서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고 했다.

“아카데미도 못 가는 애들이 무슨 공부를 한다고. 뻔뻔한 줄 알아야지.”

그 말이 꿈 많은 어린아이의 심장을 후벼 팠다. 정작 뻔뻔한 것은 수잔나 본인이었음에도, 그녀는 사과 한마디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씨이…. 우리 레아는 다 할 수 있는데! 진짜 똑똑한데 그 바보 때문에!”

레오는 악독한 제 이모가 했던 말을 늘어놓으며 씩씩거렸다. 레아는 시무룩한 얼굴로 그 옆에서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주변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헤르본 제국은 꽤 살기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어느 나라나 그러하듯, 그것은 돈 있고 힘 있는 자들에게나 들어맞는 말이었다. 아무런 제약 없이 공부하는 것. 하루하루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평민들에게 그것은 사치였고 오르지 못할 나무였다.

아이들은 작은 학교에 다니면서 기본 교육을 받는 것이 전부였고, 그마저도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부모의 일을 물려받아 시장에서 물건을 팔고는 했다.

말해보아야 입만 아프지만, 귀족의 삶은 달랐다. 귀족 자제들은 여덟 살 무렵부터 아카데미에 들어가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헤르본 아카데미. 레아의 책을 갈기갈기 찢은 수잔나의 아들 또한 그곳에 다녔다.

헤르본 아카데미는 누구에게나 열려있었다. 그러나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터무니없이 비싼 등록금 탓에 귀족이나 부자들만 들어갈 수 있었는걸. 아니면 마법사처럼 특출한 재능을 가져 장학금을 받던가. 그러니 일반 평민들은 꿈도 못 꾸는 일이 분명하다만. 레아를 향한 수잔나의 발언은 조롱이나 다름없지 않던가.

왜 모진 말로 아이들의 꿈을 짓밟을까. 그런 어른을 정말 어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

“언니……. 이모 말이 진짜일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레아야. 얼마든지 할 수 있어.”

“그렇지만…. 난 정말 아카데미도 못 가는걸요. 나도 그쯤은 알아요. 나는 그냥 공부하고 싶은 건데…….”

레아의 말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하자! 까짓것 언니랑 같이 공부해!”

*

“언제 이렇게 여름이 온 거지.”

이번 외출은 라튼 레트랑에게 정말 오랜만인 일이었다. 아델트에서 있었던 사건 이후로 거의 반년을 칩거하다시피 지냈으니. 라튼은 빛 한줄기 들지 않는 동굴에서 벗어난 원시인처럼, 주변을 쉴 새 없이 두리번거렸다.

두리번거림의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온 신경이 예민해진 탓일까, 곳곳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라튼의 귓가에 때려 박혔다. 아델트, 금발 머리, 새파란 눈.

라튼은 그 소문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무슨 연유로 그녀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지. 게다가 어디서부터 그것이 시작되었는지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본인의 엄마겠지.

사실 시아라가 로또에 당첨되고 나서, 한 차례 더 당첨자가 나타났다. 그러나 당첨금이 너무 적었던 탓에 크게 눈길을 끌지 못했다. 그러니 어찌 보면, 역대 최고 금액의 당첨자인 그녀에게 여태껏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했다.

라튼 레트랑은 근처 카페로 들어가 차 한 잔을 시켰다.

그의 옆자리에 앉은 세 남녀도 때마침 시아라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어마어마한 재벌 집 여식이라 돈 무서운 줄 모르고 당첨금을 써댄다거나, 가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큰 손이 되어 가난한 이들을 돕는다던가. 말도 안 되는 소문들을 늘어놓는 중이었다.

라튼 레트랑은 피식 헛웃음을 삼켰다. 거짓말. 맞는 말이 하나도 없잖아. 정작 라튼이 목격했던 그녀는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는데. 돌이켜 보면 시아라가 집 한 채를 산 것 외에 그렇다 할 사치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아, 딱 하나. 그를 대하는 태도를 제외하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던 지난날은 후회로 얼룩져있었다. 공포와 분노는 가라앉고, 그녀를 잃은 상실감이 똬리를 틀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의 이별에 대한 책임은 그녀에게 있었다. 엘리나 트리탄의 낭설을 믿은 본인의 잘못도 있었으나 그것은 이미 시아라가 신뢰를 저버린 이후 아니던가.

라튼은 생각했다.

시아라가 본인의 책임을 인정하고 자신에게 돌아오면, 군말 없이 받아주겠다고. 그러면 그때는 라튼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을 거라고.

라튼 레트랑은 따뜻한 녹차 한 모금을 들이켰다.

그런데 그때, 옆 테이블의 한 여자가 아는 사람이 그녀의 집을 찾아갔다는 말을 했다. 심지어 시아라를 만나기까지 했다는 부분에서 찻잔을 든 라튼의 손이 멈칫했다. 고요한 찻물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갑자기 등장한 아델트 공작으로 인해 상황이 종료되었다는 말에 이르러서였다.

자동반사나 다름없었다. ‘아델트 공작’이라는 단어에 라튼 레트랑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 멍청이들이 지금 어딜 찾아갔다는 거야?’

가라앉았던 짜증이 다시 용솟음쳤다. 집까지 찾아갔다는 건 이미 시아라와 공작도 이 떠들썩한 소문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거잖아! 분명 아델트 공작은 소문의 원흉이 자신이라고 생각할 것이 뻔했다. 반은 맞지만, 반은 틀렸다. 그는 그저 엄마에게만 털어놓았을 뿐이니까!

혹시라도 시아라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이제는 손이 아니라 모가지가 날아갈 것이 확실했다. 라튼은 그제야 그녀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자신의 신변이었지만.

시아라는 무사할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았을까? 갑자기 아델트 공작이 우리 집에 들이닥치면 어쩌지? 가족들 앞에서 공개처형이라도 당하는 건 아닐까? 어쩌지? 정말 어쩌지? 아델트 공작 그 인간이 나를……!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가 던져졌다. 그의 장갑 낀 손이 덜덜 떨리며 요동치던 찻잔에서 흘러넘친 찻물이 라튼의 하얀 바지를 적셨다. 그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거칠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공포로 시작된 진동이 이제 온몸을 덮치기 시작했다. 짜증 나. 이게 다 엄마 때문이잖아!

그리고 아리안은, 그런 라튼 레트랑의 옆에 서서 그 장면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이젠 하다 하다 이따위 철없는 도련님까지 돌봐야 하는 건지.’

제 신세가 퍽 처량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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