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아델트 공작이 짜증스레 물었다.
“도대체 네가 왜 시아라를 위해 목숨을 거는지 나는 이해가 잘 안 되는데.”
“누나가 저를 살렸으니까요. 저를, 늪에서 꺼냈으니까요.”
“… 됐어. 네 구구절절한 사정은 하나도 안 궁금해. 게다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너를 도울 만큼 내가 한가한 사람이 아니거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녔는데, 역시 안 되는 건가…….’
펠릭스는 체념한 듯 고개를 떨궜다. 그 순간, 팟- 하는 소리와 함께 빛이 번쩍였다. 기묘한 느낌에 고개를 휙 들어 올리자, 역시나. 거만하게 자기를 내려다보는 아델트 공작의 얼굴이 제일 먼저 보였다.
“보다시피.”
공작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손바닥으로 책상 위를 가리켰다. 그제야 펠릭스는, 집무실의 풍경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분명 아무것도 없던 책상 위로 서류 뭉치가 한가득 올려있었고, 태평하게 앉아 꽃이나 말리던 아델트 공작의 한 손에는 만년필이 들린 채였다. 게다가 공작은 차분하게 서류를 읽으며 서명에 몰두하고 있는 게 아니던가. 펠릭스는 놀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에 답이라도 하듯, 카시안은 뻔뻔한 미소를 띠며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바쁘다니까.”
“… 네. 잘 알겠습니다.”
다시 일어선 펠릭스가 집무실을 나서려던 찰나, 근엄한 중저음이 펠릭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지금 내가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지만. 난 이 영지의 주인이거든.”
펠릭스가 뒤돌아 물끄러미 공작을 응시했다. 카시안은 한쪽 다리를 꼬아 앉았다.
“그러니 내 영지에 사는 백성의 안타까운 사연은 모른 체할 수는 없지.”
“…… 네?”
“저택 뒤뜰에 있는 연무장으로 오도록.”
“예? 지금……!”
‘… 요?’ 펠릭스의 물음이 채 닿기도 전에, 아델트 공작이 모습을 감췄다.
‘저번에는 허공에서 튀어나오더니. 이번에는 허공으로 사라져?’
생각할수록 혼란만 늘어났다.
*
펠릭스는 공작의 말대로 저택 뒤 연무장으로 향했다. 제멋대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아델트 공작의 정체를 수상하게 여기면서.
‘뭐지?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펠릭스의 인생에서 마법사를 만날 법한 일이 뭐가 있겠는가. 돈을 벌기 위해 귀족들의 저택을 몇 번 들락날락했던 것을 제외하면, 그의 삶은 지극히 평범했다. 거의 평생을 시장, 병원, 집. 이 세 군데만 오갔으니. 그러니 펠릭스가 지금 이 상황을 손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물론 밖에 나가면, 과거에 제국민들이 마법사들의 은혜를 얼마나 입었는가에 대해 실컷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지천에 깔리기는 했다. 그러나 애초에 남의 대화를 엿듣고 신경 쓰고 싶지는 않았기에, 펠릭스에게 마법사란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러다 문득, 저번에 공작과 함께 나타났던 연두색 머리 남자가 떠올랐다. 그 남자에게 아델트 공작이 했던 말까지 전부.
‘네 마법으로 이 상처들 치료할 수 있지?’라던…. 마법이라니…… 설마…!
그럼 아델트 공작도 마법사인 거야?
그제야 많은 이들이 비(非) 마법사라며 공작을 조롱하던 말들이 기억났다.
‘… 숨기고 있었던 거구나. 왜지? 마법사가 얼마나 좋은데……!’
펠릭스의 머릿속에 불현듯 손바닥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고, 휘황찬란한 마법을 휘두르며, 녹색, 빨간색, 파란색 광선 검이 챙- 챙- 부딪히는 웅장한 장면이 펼쳐졌다.
‘하, 인정하기 싫지만. 좀 멋있어지려고 그러네?’
아델트 공작을 만나러 가는 펠릭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러나 밭은 숨을 몰아쉬는 펠릭스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카시안 폰 아델트 공작. 그러니까 꿈에 그리던 잘난 마법사가 아니라, 거무죽죽한 갑옷을 걸쳐 입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한 남자였다. 심지어 여기서 보자던 아델트 공작은 보이지도 않았다.
“네가 펠릭스냐?”
“네? 아…… 네, 네! 안녕하세요. 펠릭스 루크입니다.”
“아델트 공작 각하가 이끄시는 기사단의 단장 렌이다. 수련을 원한다고?”
“네!”
기합이 잔뜩 들어간 펠릭스가 목청껏 외쳤다. 비록 이 자리에 아델트 공작은 없었지만, 자신의 부탁을 신경 쓰고 있었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그러니 펠릭스는 이 기회를 잃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좋아. 기합 소리 하나는 마음에 드는군. 합격이다.”
펠릭스는 내심 안도했다. 마주 선 기사단장의 표정이 딱, 귀찮은 일을 떠안았다는 듯 칠색 팔색이었기 때문이었다.
“연무장을 가볍게 백 바퀴만 돌도록 하지.”
“네!…… 네?”
“난 두 번은 말 안 한다. 기한은 해가 지기 전 까지다. 서두르는 게 좋을 거다.”
펠릭스가 고개를 돌려 언덕 너머를 바라보았다. 주황빛 태양이 수평선에 걸려 있었다. 펠릭스는 이를 꽉 깨물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이거 잘 하는 짓 맞는 거겠지?’
그러나 스스로 던진 물음에 답할 기회도 없었다.
*
그 뒤로 며칠 동안은 펠릭스에게 지옥 같은 나날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것들. 숨 한 번 돌릴 틈을 안 주네.’
기사단장 렌은 연무장 중앙에 딱 버티고 서서 끊임없이 “열정! 열정!” 따위의 헛소리를 내뱉었다.
그는 매일같이 연무장 백여 바퀴를 돌게 하고, 쉴 틈도 없이 곧바로 근력운동을 시켰다. 드디어 끝났나 싶었더니 한 손에 목검 하나를 쥐여 주며 볏단에 휘두르게끔 했다. 말이 목검이지, 쇳덩이와 다름없는 무게였다. 심지어는 익숙하지도 않은 검으로 초급 기사 하나랑 대련을 시켜서, 펠릭스는 흠씬 얻어맞고야 말았다.
그 대련 후에 결국, 펠릭스는 완전히 탈진해 버렸다.
이미 어둑한 저녁 무렵이었음에도, 그는 일과처럼 아델트 병원으로 향했다. 몸은 철근처럼 무거웠으나 엄마의 얼굴을 봐야 마음이 편안해질 것 같았다. 겸사겸사 다친 몸도 치료받으면 좋을 테니.
오늘은 엄마가 깨어날까 싶은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지만, 엄마의 상태는 평소와 다른 바가 없었다. 며칠 내리 검을 쥐어 시뻘겋게 부어오른 오른손을 누워있는 엄마의 손 옆에 내려놓았다. 주먹을 쥐나, 손바닥을 펼치나. 엄마의 것이 너무 작았다. 메마르고, 피부는 거칠었다. ‘펠릭스, 내 아들.’하고 부르며 자신의 손을 감싸 쥐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엄마의 손이 오히려 아이만큼 작았다.
펠릭스는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곧장 계단으로 향했다. 그런데, 복도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벽기둥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뜻밖에도 그 주인공은 소피아 엘링턴이었다. 소피아는 복도에 앉아있는 환자들 하나 하나에게 맑은 미소를 보이며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대체 저 여자는 왜 또 여기에 있는 거야?’
부담스럽게.
그녀의 까르르하는 웃음소리가 퍽 낯설었다.
‘내 앞에서는 이상하게 화만 내더니.’
몸도 마음도 피곤해서 그런가. 울컥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펠릭스는 그냥 신경을 꺼버리기로 했다. 자꾸만 거슬리는 이 기분의 정체를 파헤치면, 더욱 울적해질 것이 뻔했다. 그는 자신도 치료받기 위해 일 층 접수대로 내려갔다. 그런데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안내받아 들어간 진료실에 떡하니 앉아있는 여자는, 다름 아닌 소피아 엘링턴이었다.
“펠릭스……?”
“…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소피아는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 믿기지 않는지 눈만 껌뻑거렸다.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 펠릭스가 제 앞에 놓인 의자에 앉을 때까지,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소피아가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펠릭스는 웃통을 훌렁 벗어젖혔다. 그의 돌발행동에 소피아는 비명이 나올 뻔 한 것을 겨우 틀어막았다.
“지, 지금 이게 무슨……!”
“뭐가요?”
“아니, 갑자기 왜 옷을 벗으시는 거예요!”
당황한 소피아와 다르게 펠릭스는 초연했다.
“치료를 받아야 하니까요.”
“… 네?”
펠릭스는 자신의 팔과 등을 가리켰다. 소피아는 그제야 그의 몸 곳곳에 나 있는 시퍼런 멍 자국을 발견했다.
“…….”
그녀는 잠시간 아무 말이 없었다.
“저기요, 엘링턴 의사 선생님?”
“…….”
“하아……. 소피아 엘링턴 씨?”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소피아 엘링턴이 천천히 입을 뗐다. 그러나 잔뜩 화가 난 목소리였다.
“누가 그랬어요?”
“… 네?”
“도대체 이거 누가 그랬냐고요!”
“아니 그냥 운동하다가…….”
소피아는 다시 침묵했다. 그저 펠릭스의 온몸에 붕대를 둘둘 감을 뿐이었다. 어찌나 두툼하게 감싸던지, 기사단장이 걸치고 있던 철갑옷이 안 부러울 지경이었다.
“과잉진료 같은데요.”
“저기요.”
펠릭스는 이 상황이 조금 어색했다.
원래 이 여자가 자신에게 건네던 인사말이란 것이 언행이 살짝 괴팍하고 거친 감이 있긴 했었다. 그러나 이름만큼은, 늘 다정하게 ‘펠릭스.’하고 불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펠릭스는 착 가라앉은 소피아의 목소리가 차디찬 북풍 같았다. 그것도 ‘저기요.’라니. 물론 펠릭스 본인 역시 그녀를 그렇게 부르기는 하나. 그것은 이름을 부르기가 무척 낯간지럽고 쑥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오만 생각으로 넋 놓고 있던 펠릭스를 소피아가 다시 한 번 불렀다. 이번에도 또.
“저기요.”
“네.”
“다음번에도 이렇게 다치면 정말…….”
“…….”
“당신 죽여 버릴 거야.”
“…… 네?”
“내가 먼저 죽일 거야. 진짜로.”
“의사가 그런 말을 해도 되는 건가요……?”
이게 무슨 끔찍한 소리인가 싶어 되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정말이지 태연하게, 아직도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했다.
“당신을 다치게 하는 것도, 아프게 하는 것도. 아껴주고 보듬어주는 것도. 치료해주고 위로해주는 것도. 하물며 사랑마저. 다 내가 할 거예요.”
“…….”
“그러니까… 이렇게 다치지 마요. 나 진짜 가만 안 둬.”
펠릭스는 대답을 망설였다. 이 여자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아무것도 짐작할 수 없었으니까. 저런 말은, 책이나 연극 속에서 서로 좋아죽겠는 남녀 주인공들이나 내뱉을 법한 것 아니었던가. 그러나 소피아의 잿빛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더욱 당돌하게 펠릭스를 마주했다.
“대답해요.”
“…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요.”
“그냥 알겠다고 하면 돼요.”
그럼에도 여전히 아무 말이 없자, 소피아는 입술을 꽉 깨물고 붕대를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마치 코르셋이라도 조이듯이. 나지막이 고통을 신음하던 펠릭스가 항복했다.
“알겠어요! 안 다칠게. 앞으로 안 다칠게요.”
얼음장 같던 진료실에 그제야 평화가 찾아왔다. 펠릭스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소피아 엘링턴, 그녀는 정말로 무서운 여자임이 틀림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