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예카틸리나는 싱그럽게 웃으며 소피아와 내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뿐 아니라, 내 팔에 팔짱까지 끼며 자연스레 소피아를 등지고 서는 게 아니겠는가.
“두 분 어디 가시나 봐요? 저도 오늘 한가한데. 같이 가도 괜찮을까요?”
그녀의 의도가 불순하든 아니든, 무례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 어쩌죠? 오늘은 제가 좀 바빠서요.”
나는 넌지시 거절 의사를 내비쳤다. 그러나 예카틸리나는 굴하지 않았다.
“왜…… 요? 혹시 제가 싫으세요? 두 분이… 저를 따돌리시는 건가요?”
“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내가 불편해하는 기색을 눈치챘는지 소피아는 예카틸리나의 팔을 당겨 팔짱을 풀어냈다.
“죄송해요, 환자분. 시아라는 오늘 저랑 단둘이 볼일이 있어서요. 아주 개인적이고 중요한 일이라 함께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자 예카틸리나는 화들짝 놀라며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아아…….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주제도 모르고 친한 척을……!”
그녀가 물기 어린 목소리로 사과했다.
“시아라, 혹시……. 제가 허락도 없이 팔을 만져서 불편했던 건가요……? 저는 우리가 친구라고 생각해서요…….”
“아니요, 괜찮아요. 저희는 이만 가 봐도 괜찮을까요?”
“네……. 앞으로는 조심할게요, 정말 미안해요.”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어쩐지 내가 죄를 지은 기분이 들었다. 탐탁지 않은 마음을 구석에 고이 접어두고 이제야 진짜 가려나 했건만. 예카틸리나는 또다시 내 팔을 붙잡았다.
“저기, 시아라……. 이렇게 가버리면 제가 오늘 잠도 못 잘 것 같아서요. 화난 게 아니라면. 한 번만 다정하게 ‘카티아’라고 불러줄 수 있나요?”
“네?”
뚱딴지같은 소리에 눈을 휘둥그레 뜨자 예카틸리나가 가녀린 제 어깨를 바닥으로 톡 떨구며 흐느꼈다.
“역시……. 저 혼자 착각이었나 봐요. 저는 그저 우리가 조금 가까워졌다고 생각해서…….”
그녀가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병원에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전부 우리에게 집중되었다. 붕대를 동여맨 환자 하나를 둘러싸고 서 있는 두 여자. 게다가 그 둘 중 하나는 퍽 날카롭게 생긴 의사였고, 다른 하나는 지금 저 환자의 행동이 마음에 안 드는지 인상을 잔뜩 찌푸린 표정이었으니.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 우리는 명백히 가해자처럼 보였다. 그 탓에 사람들이 아무 잘못도 없는 소피아와 나를 향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환장하겠네, 진짜.’
나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 카티아. 알겠으니 인제 그만 해요. 네?”
“우리가 친구가 맞기는 한 건가요? 다 제 착각이었나요?”
“맞아요, 친구. 분명 저번에 제가 약속했잖아요.”
“그러면, 다음번에는 저를 위한 시간도 있을까요? 힘들 때 돕는 게 친구니까.”
“네, 네. 그렇게 해요. 그러니까 여기서 이러는 것은 정말 그만…….”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었는지 예카틸리나는 눈물을 뚝 그쳤다.
“좋아요. 원하시는 대로 이만 갈게요. 오늘 좋은 시간 보내세요. 내 친구 시아라. 그리고, 소피아 엘링턴 선생님.”
예카틸리나는 우리의 이름을 또박또박 힘주어 말하며 미련 없이 돌아섰다. 멀어지는 예카틸리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소피아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언니. 내가 진짜 환자 뒷담화는 안 하려고 했거든?”
“응?”
“근데 저 환자……. 좀 이상해.”
“너도 그렇게 생각해……?”
“응. 뭐랄까, 좀 음침하다고 해야 할까?”
“흐음……. 아무래도 겪었던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래서 그렇지 않을까?”
소피아는 턱을 매만지며 눈을 날렵하게 떴다.
“그게 이상해. 저 환자분 치료할 때마다 자기가 겪었던 일들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거든. 근데 그게 매번 말이 달라.”
“응? 말이 다르다니?”
“처음에는 다섯 식구가 살다가 화재사고를 당했대. 그러더니 며칠 뒤에는 여섯 식구라고 했다가, 가끔 자기 형제가 몇 명이었는지. 그게 형제였는지 자매였는지도 헛갈려 하더라? 그게 말이 돼?”
“…….”
“그것뿐만이 아니야. 나한테 환자분을 배정해주신 의사 선생님께서는 저 환자분 집에 도둑이 들어 화를 입었다고 했거든.”
“응. 내가 듣기로도 그랬어.”
“근데 또 듣다 보니까 자기 실수로 불이 붙었다고 하고 자꾸만 오락가락해. 아무튼, 좀 께름칙한 부분이 많아서 이상해.”
께름칙한 부분이라…….
그런 점들 때문에 예카틸리나의 곁에 있으면 나도 불편했던 걸까?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네.”
“응. 그러니까 언니도 조심해.”
내가 미간을 좁혀 인상 쓰자 소피아가 애써 방긋 웃었다.
“자자, 우울한 생각은 집어치우고, 우리 오늘 뭐 할까? 오랜만에 놀 생각에 완전 설레!”
*
놀겠다더니. 오랜만에 놀자더니. 이게 어떻게 노는 거야!
소피아와 나는 아델트 중심에 있는 지역 도서관으로 향했다. 저택에서도 매일 도서관에만 앉아있기는 했지만, 가만히 내 고민을 듣던 소피아가 특별한 제안을 했기 때문이었다.
“당장 병원에서 일하게 해줄 수 있는 능력은 없지만. 그래도 같이 공부를 할 수는 있지. 나 공부하는 거 엄청 좋아하거든!”
“뭐? 놀자며!”
“응. 노는 거잖아.”
“너 공부랑 놀이가 뭔지 몰라? 정말 안 되겠네.”
“놀이는 놀이. 공부도 놀이. 됐지? 가자!”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게다가 그냥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엄청 좋아한다는 말이 꽤나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소피아의 두 눈이 초롱초롱 빛나서, 나는 그 제안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지금 내 눈앞에 두툼한 전공 서적 서너 권이 보기 좋게 쌓여있는 이유였다. 나는 재빠르게 책 제목을 눈으로 훑었다. 화학의 기초, 생명공학의 기초, 인체의 신비……. 심지어 수학은… 응용수학……? 으음…… 갑자기 응용으로 간다 이거지?
뭔가 생각할 틈도 없이, 소피아가 깐깐한 목소리로 물었다.
“시아라 학생. 공부할 준비 됐나요?”
“… 네? 하, 학생?”
“저는 유능한 소피아 엘링턴 선생님입니다. 반가워요.”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소피아는 콧잔등 아래로 흘러내린 분홍색 뿔테 안경을 손가락으로 쓱 올려 고쳐 썼다. 소피아의 표정과 말투는 아주 단호하다 못해 차가웠다.
“먼저 화학을 시작하죠.”
“화학…….”
“세상에는 수많은 원소가 존재하지만, 학자들이 그것을 발견한 뒤에는 이름을 붙였어요. 각 원소가 가지는 특징에 따라 순서도 정했지요. 따라해 보세요. 수소, 헬륨, 리튬……, 칼슘…….”
소피아는 노트 위에 약 스무가지 원소 기호들을 거침없이 적어 내려갔다. 내 눈은 종이 위를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정말 아카데미에나 있을 법한 선생님에 빙의한 듯, 소피아는 알찬 내용을 똑 부러지게 설명했다. 그녀의 진지한 수업은 노트 위에 마침표를 찍으며 만년필을 내려놓는 것과 함께 끝이 났다. 소피아는 나를 보며 활짝 웃었다.
“시아라 학생? 뭐해요? 얼른 외우세요.”
“외워? 이걸 다… 요? 지금?”
“네. 이십 분 뒤에 시험 볼 겁니다.”
나는 내적비명을 내지르며 탄식했다.
소피아는 정말이지 칼 같은 사람이었다. 그것도 숫돌에 석석 갈아 아주 날카로운 칼. 1분의 여유도 없이, 예고했던 대로 정확히 이십 분 뒤에 내게 시험지를 건넸다.
나는 그 시험을 통과하는 것도 모자라, 몇몇 화학 반응에 대한 화학반응식을 적고, 우리 몸속의 내장 기관의 위치, 이름, 역할 등등을 정확하게 그려내야 했다. 그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했는지 수학책을 펼쳐 함께 문제를 풀고, 채점까지 완벽하게 마치고 나서야 도서관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해는 이미 저물어 산마루를 넘은 지 오래였다.
진이 다 빠져 초췌해진 내 얼굴을 보며 소피아가 순진무구하게 물었다.
“어때? 공부 참 쉽지?”
“…….”
“그래도 곧잘 하던데? 다음번에는 물리도 배워볼까?”
“응, 아니야.”
나는 그대로 아델트 저택으로 돌아갔다.
또다시 내 일기장에, 엑스 표시가 달렸다. 이번에는 조금 더 여러 번. 마음을 담아 꾹꾹 눌러 새겨 넣었다. 아주 새빨간 색깔로.
*
펠릭스는 오늘도 어김없이 아델트 공작을 찾아와 괴롭혔다. 처음에는 저택의 정문, 그다음엔 정원, 응접실. 하다못해 이제는 당당하게 집무실까지 입성한 저 불청객을 보며, 카시안은 혀를 내둘렀다. 이게 벌써 며칠 째인지. 이제는 저 갈색 머리 소년이 약속 없이 불쑥 찾아와도 하나도 놀랍지 않았다.
“아델트 공작님, 안녕하세요?”
“어, 왔구나. 왜 또 왔어?”
“왜라뇨. 제 부탁 들어주셔야죠.”
또, 또 저 소리. 카시안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짚었다.
“부탁? 강해지겠다느니 누굴 지키겠다느니 그 헛소리를 아직도 포기 못 한 거야?”
“헛소리 아니에요.”
“가봐. 나 되게 바쁜 사람이야.”
“바쁘기는요. 되게 한가해 보이시는데.”
펠릭스가 집무실 책상 위를 눈짓했다. 그의 눈동자를 따라 아델트 공작도 함께 책상을 내려다보았다. 서류 뭉치 하나 존재하지 않는 깨끗한 책상 위에 늘어져 있던 것은, 색색의 마른 꽃잎들뿐이었다. 카시안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사실, 시아라의 일기장 속에 붙여줄 꽃을 하나하나 정성껏 말리던 중이었다.
‘크흠.’ 헛기침하며 그것들이 보이지 않도록 품에 그러안았다. 애써 말려놓은 꽃잎이 바스락 소리와 함께 으스러졌다. 퍽 아쉬웠지만, 그녀를 닮은 노란 꽃잎만큼은 아직 멀쩡해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꼴이 민망한지 연신 목덜미를 매만졌다. 적어도 저 애송이 앞에서, 티끌 하나 없이 완벽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으니.
“누가 저걸 여기로 보낸 거야, 대체.”
“공작님의 유능한 비서분이요.”
“알버트 그 자식이 진짜…….”
카시안이 이를 바드득 갈며 중얼거렸다. 그때, 아델트 공작 앞에 펠릭스가 무릎을 꿇었다. 갑작스러운 이 상황이 공작은 무척 당황스러웠다.
“뭐 하는 거야 지금? 이것도 알버트가 시켰어?”
“부탁드려요. 한 번만. 도와주세요.”
카시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어나.”
그러나 펠릭스는 끄떡없었다.
“하아. 너 말이야. 누굴 지킨다는 게 무슨 의미인 줄이나 알고 그러는 거야? 그게 애들 장난처럼 내뱉으면 끝인 그런 쉬운 말인 줄 알아?”
“그런 거 아니에요!”
목울대를 세워가며 말을 내뱉는 펠릭스에게서는, 이제 어떠한 긴장이나 떨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장난하는 거 아니에요. 저도 알아요. 그 사람을 위해서 제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거.”
“그걸 아는데 그런 부탁을 해?”
“누나를 위해서 제 목숨을 거는 것쯤은 하나도 아깝지 않거든요.”
“뭐?”
카시안은 울컥 짜증이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