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태양이 하늘 위로 우뚝 솟은 한낮이었다.
나와 낸시는 함께 정원을 산책하면서, 볕이 잘 드는 테이블에 앉았다. 낸시는 손수건에 바느질을, 나는 종이를 꺼내 들고 그 위에 무엇을 써야 할지 고민했다.
“아가씨는 뭐 하세요?”
“아, 편지를 좀 쓰려고.”
그 말에 낸시가 얼굴을 붉히며 수줍어했다.
“편지… 혹시 공작님께 연애편지요?”
“뭐? 아니야.”
나는 멋쩍게 웃었다.
비록 연애편지는 아니지만…….
나름의 애정을 담아 정갈한 글씨를 또박또박 적어 내려갔다. 한나와 소피아에게.
한나에게는 며칠 전 집 앞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해 사과하고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곧 레스토랑으로 찾아가겠다는 소식을. 소피아에게는 요새 다시 아델트 저택에서 지내고 있으며 너와 함께 보내던 시간이 그립다는 안부편지를.
그렇게 꾹꾹 눌러 쓴 편지를 곱게 접어 저택을 찾은 우체부에게 전달했다.
며칠 사이에 결계를 수리하는 일에도 꽤 많은 진전이 있었는지 카시안의 얼굴도 한층 밝아졌다. 듣자 하니 끝없이 요동치던 곡물 가격도 한결 진정되었다고 했다. 덕분에 아델트 저택에도 이전과 같은 평화가 찾아왔다.
무슨 볼일이 있는 건지 드문드문 저택을 찾아오는 펠릭스로부터, 집 앞의 상황을 전해 들었다. 사건 이후로 배치된 치안대 덕분에 펠릭스 역시 아무 일 없이 지낼 수 있다고 하니. 걱정했던 문제들이 조금씩 풀리자 마음이 놓였다.
‘다행이야.’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 도서관으로 향했다.
나는 그동안 ‘가진 돈을 어떻게 써야 할까?’라는 질문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해왔다. 물론 대단한 일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과거에 내 소원은 그저,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 딱 하나였으니까.
그러나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연인과 친구들이 생기고, 드디어 나를 돌아볼 수 있던 몇 가지 계기를 갖게 된 후. 나는 깨달았다. 나 홀로 잘 살아가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애초에 그러한 것은 가능하지도 않다는 것 또한.
그 결과, 내가 아는 것이 많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언제까지 이 저택에서 지낼지는 모르지만, 머무는 동안에는 공부하기로 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으리으리한 도서관은 봐도 봐도 놀라웠다.
책장에 빽빽하게 꽂힌 책들을 보니 문득, 이 저택에 초대를 받았던 레아와 레오가 도서관 자랑을 했던 것이 떠올랐다. 엄청 크고 책도 많다면서 함께 이곳에 오자던 아이의 목소리가 귓가에 선연히 들리는듯했다.
책장을 죽 훑다가 경영과 보육에 관련된 두툼한 서적을 뽑아 들었다. 어느덧 내 키만큼 차곡차곡 쌓아 올린 책들을 힘차게 끌어안고 걸었다. 하지만 너무 욕심을 부린 탓일까. 높게 쌓인 탑이 위태위태하게 흔들렸다.
‘당장 다 읽지도 못할 거, 무리했나?’
낑낑거리며 자리를 찾아가는데, 갑자기 두 손이 텅 비어버렸다.
“응?”
옆을 돌아보자 어느새 다가온 카시안이 내 책을 전부 들고 있었다.
“이 많은 걸 다 읽을 수나 있겠어?”
정곡을 찔린 물음에 나는 애써 당당하게 답했다.
“당연하죠!”
“시험이라도 봐야겠네.”
‘무슨 그런 무서운 소리를!’ 툴툴거리며 카시안의 뒤를 바짝 쫓아갔다.
“제가 여기 있는 줄은 어떻게 아셨어요?”
“매일매일 여기에서 공부 중이라고 쓰여 있던데.”
카시안이 일기장을 내밀었다.
“어라? 답장 안 해주실 줄 알았는데.”
내가 장난스레 웃자 카시안은 헛기침을 몇 차례 하더니 관심도 없다는 듯 대꾸했다.
“너는 무슨 일기를 그렇게 길게 써. 짧게 쓰라고 짧게.”
“그래서… 공작님은 또 딱 한 줄씩 쓰셨다는 거죠?”
“아니야. 나는 바빠서, 이만 가볼게.”
평소와 달리 어색하게 뒷걸음질 치는 카시안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왜 저러시지?’
그렇게 일기장을 펼쳤는데.
오늘은 낸시랑 꽃반지를 만들었어요. 도서관에서 공부를 시작했어요. 알버트랑 렌이랑 함께 밥을 먹었고요. 친구들한테 편지도 썼어요. 보통의 하루를 구구절절 써 내려간 내 일기 밑에 딱 한 마디,
- 좋아해. –
라는 세 글자가 내 마음을 간지럽혔다. 심장에서 옥수수 알알이 터지는 듯이.
- 너의 모든 하루가, 너무 좋아. –
나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카시안을 안아주고 싶었다.
*
소피아에게 편지를 보내고 며칠 뒤, 답장이 왔다.
- 언니, 나 아델트에 있는 병원에서 인턴으로 일할 수 있게 되었어! 당장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할 거야. 아빠 허락을 겨우 받았거든. 보고 싶어. –
세상에! 소피아가 다시 아델트로 오다니!
기뻐서 편지를 들고 방방 뛰었다.
‘당장 다음 주 월요일이라면… 오늘이잖아?’
잘됐다, 소피아도 볼 겸, 유모도 뵐 겸. 병원에 가야겠다!
나는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마차에 올랐다. 목적지인 아델트 종합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유모를 찾아갔다.
병실에 들어가기 전에, 복도를 지나는 간호사에게 유모의 상태와 필요한 치료는 없는지 물었다. 그러나 지금은 안정을 취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답이 들려올 뿐이었다. “그래도 많이 좋아지셨는걸요.”라는 희망찬 말과 함께.
나는 병실 문을 열었다.
유모는 여전히 야윈 채로 병상에 누워있었다. 모순이었지만, 눈을 감고 편히 누워있는 그녀의 표정에서는 고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나는 유모의 손을 꼭 잡고 한참이나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유모의 손끝에 힘이 실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깜짝 놀라 그녀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응시했다. 그러나 유모는 오늘도 눈을 뜨지 않았다. 한참을 아쉬운 듯 서성이다 그녀의 손등에 살짝 입을 맞췄다.
“나 또 올게.”
그 뒤에 만난 소피아는 변함없이 당찼다.
달라진 것이라면 이제 가슴 남짓 내려오는 검은색 머리카락과, 그와 대비되는 하얀 의사가운이었을까. 이제 진짜 의사처럼 느껴지는 그 모습이 새로웠다.
“아버지를 어떻게 설득했대?”
“두 번 다시 머리 안 자르고 주말마다 집에 꼬박꼬박 가기. 그리고 또…….”
“또?”
“라튼 레트랑이랑 끝났다고 말하니까 다른 귀족이랑 선을 보라더라. 그럼 허락하겠다고.”
“뭐……? 그래서 볼 거야?”
“별수 있나. 또 만나는 척이나 해야지 뭐.”
너무 소피아다운 대답에 키득 웃었다.
“언니는? 왜 다시 아델트 저택으로 갔대? 이제 결혼해?”
“아니! 그런 거 아니야!”
“놀라긴. 더 의심스럽게.”
“그, 그냥. 그럴만한 일이 있었거든……. 페, 펠릭스는 만나봤어?”
그 물음에 소피아의 입꼬리가 축 처졌다.
“아직. 그래도, 어머니 병문안 오겠지. 그때 보면 되니까…….”
“소피아 엘링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소피아가 재빨리 일어났다.
“호출이네. 언니, 나 먼저 가볼게. 또 봐.”
“응. 고생해.”
반대편 복도로 바쁘게 뛰어가는 소피아의 뒷모습을 입이 벌어진 것도 모른 채 지켜보았다.
볼일을 마치고 병원 밖으로 나왔다. 이제 확실히 여름인지, 정원에서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여유롭게 걸었다.
화단 한편에 아름답게 핀 분홍 장미의 꽃향기를 담뿍 들이마시려던 그때,
“저기…….”
한 여자가 나를 불러 세웠다.
응? 누가 나를?
의아하게 뒤돌자 얼굴 전체에 붕대를 칭칭 감고 모자를 푹 눌러쓴 여자가 서 있었다. 여자는 쭈뼛거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그녀의 모습이 어딘지 익숙해서,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디서 봤더라?’
“저, 저번에 골목에서…….”
골목……? 아! 생각났다. 집 앞에 찾아왔던 여자!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하소연까지 했던!
이 여자가 자신의 불행을 이야기할 때, 그 목소리가 하도 작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이 하도 맞장구를 치며 한마디씩 보태는 통에, 그녀의 가슴 아픈 사정이 2층 창문 너머로까지 중계가 됐었지.
“… 네, 한데 무슨 일로 저를?”
나는 방어 태세를 갖추며, 짐짓 날카로운 투로 물었다. 그러자 여자가 손사래를 치며 나를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내비쳤다.
“나, 나쁜 짓을 하려는 게 아니에요!”
나는 가늘게 뜬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럼요?”
“저번에 아가씨 집 앞에서 소란스럽게 했던 거… 사과드리고 싶어서요. 오늘 아가씨를 따라온 것이 아니라, 그저 치료를 받으러 왔다가 우연히 지나가시기에……!”
“사과요?”
“네. 제가 힘든 와중에 소문을 듣고 찾아간 것은 맞지만……. 그래도 아가씨께 손해를 끼쳐 드리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생각이 짧았어요. 죄송해요.”
그녀가 너무 정중하게 사과를 하는 탓에, 도리어 나 역시 고개를 숙여 괜찮다고 말했다.
“아, 아녜요. 소문을 듣고 오셨다니까……. 그거 사실 다 헛소문이거든요.”
“그랬군요……. 사실 상관없어요. 그때는 제가 지푸라기 잡는 심정이었던지라…. 집은 안 망가졌나 몰라요. 어찌나들 과격하던지. 제가 다 깜짝 놀랐다니까요?”
나는 그저 허탈하게 웃었다.
“마지막에 오신 분이 아델트 공작님이셨죠?”
“아, 네. 맞아요.”
“그럼 지금은 저택에 계신가 봐요? 아무래도 그 집은 위험할 테니…….”
그 질문에 나는 침묵했다. 그러자 그녀가 또다시 자기들 탓이라며 사과하기 시작했다. 수없이 괜찮다는 말을 되풀이한 뒤에야 그 말을 멈췄다.
“저기… 실례가 안 된다면 아가씨 성함을 여쭤도 될까요?”
“시아라예요. 그쪽은요?”
“예카틸리나. 편하게 카티아라고 불러주세요.”
붕대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파란 눈이 사르르 접혔다.
“알겠어요, 카티아. 그럼 지금 치료받고 온 길인가 봐요?”
“네. 다행히 제 사정을 알고 도와주시겠다는 분들이 계셔서요.”
“좋은 소식이네요.”
“시아라는 이 병원에 무슨 일로 왔어요? 혹시 어디 아파요?”
“아뇨. 친구 좀 만나러요. 여기서 일하거든요.”
그러자 뭔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아! 아까 소피아 선생님이랑 있는 걸 봤어요. 오늘 절 치료해주신 분이 소피아 선생님이셨거든요.”
“어머, 정말 잘 됐어요. 꼼꼼하고 똑똑한 친구라, 아마 잘 할 거예요.”
“네, 얼굴도 정말 예쁘시고…….”
카티아는 고개를 푹 숙이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제 얼굴은 이렇게 엉망인데…….”
“아, 아니에요! 사정이 있던 거잖아요.”
나는 우리 집 앞에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던 카티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화재로 가족을 전부 잃었다고 했었으니…….
“시아라, 우리 또 볼 수 있을까요? 보다시피 제 얼굴이 이런 탓에… 징그럽다고 다가오는 친구들이 별로 없었거든요. 처음이에요. 이렇게 오래 대화를 나눠 본 적은.”
“네? 아……. 그럼요. 자주 만나면 좋죠.”
“고마워요.”
카티아는 내 손을 잡고 손등을 매만졌다.
그녀의 까칠한 살갗이 내 피부에 닿을 때마다 흠칫 놀랐지만, 나는 애써 미소지었다.
사실 그때 알아차려야했다. 모든 싸이코패스의 첫 단계가 상대의 동정심에 호소하는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