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카시안은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았다.
어제 펠릭스가 했던 말을 온종일 되새겨보았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고 싶어요.”]
그래,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지. 그런데 펠릭스는, 곧장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만약 누나가 또다시 위험에 처하면, 그때는 제가 구할 거예요. 공작님이 아니라.”]
공작님이 아니라? 허.
‘누가 누구를 지켜? 지가 뭔데?’
카시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도와달라 부탁하던 펠릭스의 눈빛이 평소와 달리 진중하고 대범해서, 카시안은 사실 꽤 놀란 상태였다. 대체 뭘 어떻게 도와달라는 건지. 누굴 지키는 게 애들 장난도 아니고.
아무튼, 마음에 안 들어.
팔걸이에 팔을 올린 채 의자에 기대앉아 차분히 생각했다. ‘누나가 또다시 위험에 처하면-.’이라는 말에 유난히 신경이 거슬렸다.
시아라가 당첨자라는 소문이 이미 제국 전체로 퍼진 듯했다. 민심을 살피러 아델트 시장에 나갔던 알버트 조차 그 소문을 듣고 돌아와 그게 진짜냐고 물었을 정도였으니. 물론 시아라가 그 소문의 주인공이 맞는지 물은 것은 아니었다.
지금 제 눈앞에 보이는 여자처럼 샛노란 금발 머리에 보석처럼 푸른 눈동자의 여자가 당첨자라며 야단법석을 떨어댔다. 그 정도로 그녀의 생김새를 자세히 묘사할 수 있었다면……. 라튼 레트랑, 그 자식이……!
책상에 놓인 종이를 구기려던 카시안이 멈칫했다.
응? 눈앞에 보이는?
“공작니임-. 뭐 하세요?”
“까, 깜짝이야!”
소리소문없이 나타난 시아라가 책상 반대편 아래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책상 위로 양손을 가지런히 올리고, 그 위에 턱을 기댄 채로.
“뭐야. 이게 그렇게 놀랄 일이에요?”
시아라는 토끼 같은 눈망울로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 얼굴을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와서, 카시안이 진정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게 아니라. 방금도 널 생각하고 있었는데 눈앞에 나타났잖아. 꿈인 줄 알고.”
“정말요?”
“응.”
그녀가 반달 모양으로 눈을 접었다.
“뭐 하고 있었어?”
“도서관에서 책 읽었어요. 공부를 좀 해볼까 하고…….”
“좋은 생각이네.”
“그러다가 이게 생각나서요.”
시아라는 노트 한 권을 수줍게 내밀었다.
“이게 뭐야?”
곧바로 앞장을 넘겼다. 첫 페이지에는 소녀와 소년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어릴 적 일기에서 보았던 그림과 조금도 변함없이 삐뚤빼뚤했다.
노란 요정 같은 소녀와 탄 밤 같은 소년.
“최대한 옛날 그림이랑 똑같이 그리고 싶었어요. 그래도 지금이랑 꽤 닮지 않았어요?”
“그러네.”
카시안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일기장이야?”
그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리, 다시 써 봐요. 그동안 떨어져 있던 시간만큼, 서로를 알아갈 수 있도록.”
“으음…. 한번 생각해볼게.”
시아라의 부탁이 너무 귀여워 자꾸만 꼬물꼬물 입꼬리가 올라가려 했다. 카시안은 일부러 무심한 척 답하며 다음 장을 넘겼다.
- 오빠, 오늘도 힘내요! –
‘아 이걸 어떻게 참아.’
세워놓은 일기장 뒤로 귓등까지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고, 카시안이 빙그레 웃었다.
*
시아라가 건넸던 일기장 때문일까. 카시안은 오늘따라 마력이 넘쳐흐르는 기분이었다.
평소 결계를 고치기 위해 들이는 마력의 반도 쓰지 않았음에도 벌써 구역작업이 끝나버렸다.
반면 마르쿠스 린더베르크는, 여유를 부리는 카시안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 부지런히 씨앗을 심었다.
카시안은 팔짱을 끼고 결계를 벽 삼아 기대어 섰다. 그리고는 마르쿠스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저 연둣빛 머리카락은 사라지기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1센티도 변함없이.
하긴, 뭐 머리뿐인가. 걸치고 있는 옷도 마찬가지였다. 녹색과 노란색이 뒤섞인 체크무늬 셔츠. 몸에 잘 맞는 갈색 바지. 그 위로 매단 검은색 나비넥타이까지.
늘 변함없는 모습에 문득 궁금해져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마르쿠스가 애달픈 목소리로 답했다.
“… 아내가 골라줬으니까요.”
“아, 어쩐지. 셔츠가 정말 마음에 드네.”
침울한 분위기에 카시안은 살짝 당황했지만, 그 말 자체에는 수긍했다. 시아라가 아침마다 옷을 골라준다면, 얼마든지 그 옷만 입을 자신이 있으니까.
그때, 마르쿠스가 씨앗 하나를 땅에 심고 지팡이로 그 땅을 툭툭 두드렸다.
그와 동시에 커다란 줄기가 하늘 높이 쑤욱 자라났다. 그저 한 갈래로 뻗어 나가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거미줄처럼 쭉쭉 갈라져 큼직한 넝쿨이 되었다. 그 단단한 줄기 위로, 샛노란 호박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 크기가 어찌나 튼실한지 한 손으로 들기에는 벅찰 정도였다.
벌써 며칠째 똑같은 광경을 보고 있건만, 카시안은 아직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게다가 날이 갈수록 그 범위가 더욱 넓어져서, 처음보다 적은 횟수로 씨앗을 심더라도 메마른 땅을 순식간에 초록으로 채울 수 있었다.
공작이 마르쿠스의 곁에 다가가 앉으며 호박을 매만졌다.
“그래, 이번 건 뭐지? 호박이랑…….”
“예. 고구마요. 그러니까, 호구마요.”
“뭐?”
“호, 호구마! 호박 고구마!”
어처구니없는 작명 센스에 카시안이 피식,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그러나 마르쿠스는 생각보다 뻔뻔했다. 아델트 공작이 비웃건 말건, 옆에 있던 모종삽으로 땅 아래를 살짝 팠다. 그러자 그 속에서 실한 고구마들이 쏟아져 나왔다. 마르쿠스는 뿌듯한 얼굴로 몇 군데를 더 확인하고는, 다시 흙으로 그 위를 덮었다. 아직 작업해야 할 구역이 한참이나 남았으니 서둘러야만 했다.
찬바람만 불어오던 며칠 전과 달리, 결계 주변도 이제 다시 온화함을 되찾고 있었다.
두 마법사가 게으름피우지 않고 부지런히 일한 덕분이었다.
땅을 파고 씨앗을 심고, 지팡이로 두드리고. 그 지루한 작업을 연거푸 반복하던 마르쿠스가 이마에 송골 맺힌 땀방울을 닦아냈다. 잠시 허리를 펴고 일어나 등 뒤로 펼쳐진 무성한 초록 줄기를 눈에 담았다.
‘씨앗을 심고도 이렇게 뿌듯했던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더라.’
숨어있던 지난 일 년은 그에게 암흑이었다.
만약 알버트가 자신을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마르쿠스는 언제까지고 세상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다.
씨앗 하나에서 두 가지 작물을 키워내는 마르쿠스의 재능.
그것을 처음으로 인정해준 그녀가 곁에 없었으니까.
마르쿠스는 다시 한 번 지팡이로 땅을 토닥거렸다. 그 순간 살랑 불어온 초록 바람이, 마르쿠스를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
어린 시절의 마르쿠스는, 그저 식물에 관심이 많은 평범한 아이였다. 말을 조금 더듬기는 하였으나 착한 성정 덕에 교우관계도 두루두루 좋았다. 그러한 그의 인생이 더는 평범하지 않게 된 것은, 원한 적도 없는 마법이 발현된 열두 살 무렵이었다.
마르쿠스의 재능은 실로 놀라웠다. 그는 어떤 식물이든 키워낼 수 있었다. 물론……. 이조차 그가 원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처음에는 작은 꽃망울에서 꽃을 피워내는 정도였다. 초록색 풋사과는 그의 손이 닿기만 해도 금세 빨갛게 물들었고, 추운 지역에서 자라기 힘들다는 올리브도 마르쿠스의 옆에서 검은빛으로 여물어갔다.
그러나 마르쿠스는 힘을 제어하는 법을 몰랐다. 어느 날 두 친구가 씨앗을 심은 화분을 들고 와 그에게 부탁했다.
[“마르쿠스, 이 토마토 나무 좀 키워줘! 너는 엄청 크게 키울 수 있지?”]
[“내 것은 딸기나무야!”]
두 화분을 번갈아 바라보던 마르쿠스가 토마토 씨앗이 심긴 화분의 흙을 꾹 눌렀다. 화분이 너무 작았던 탓에, 나무는 생각보다 작게 자라났다. 친구가 실망한 얼굴을 하자 마르쿠스는 더욱 강하게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나무의 뿌리가 화분을 뚫고 밖으로 뻗어져 나왔다. 순식간에 화분은 두 동강이 나고, 흙과 나무는 바닥으로 쏟아졌다. 그런데도 나무는 자라나고 있었다. 어느새 훌쩍 자신들의 키를 넘겨버리자 친구들은 기겁하며 덜덜 떨었다.
이상한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토마토와 함께 딸기를 상상했기 때문이었을까? 토마토는 딸기와 함께 자랐다. 토마토 나무에서, 갑자기 듬성듬성 딸기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괴, 괴물…! 마르쿠스는 괴물이야…!!”]
친구들은 그대로 도망쳤다.
그 뒤로부터 계속, 하나의 씨앗에서 두 개의 작물이 함께 자랐다. 마르쿠스는 자신이 이런 마법을 발현했다는 것이 창피했다. 식물이 자라날 때마다 자신이 정말 괴물이 된 것 같았다. 돌연변이도 아니고 이 무슨 괴상한 혼종이란 말인가.
성인이 될 때까지, 마르쿠스는 방에 틀어박혀 마법을 제어할 방법을 연구했다. 그런 그의 앞에 나타난 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녀는 그를 괴상하다 탓하는 대신, 그의 능력을 칭찬했다.
[“마르쿠스. 지금은 아무도 너를 이해 못 하지만, 세상의 사람들 모두가 알게 될 거야. 이건 예술이고, 재능이라는 걸 말이야.”]
마르쿠스는 그녀의 지지를 밑거름 삼아 연구에 몰두했다. 사람들이 좀 더 쉽게 농사지을 수 있고,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작물. 그것들을 결합하면 끔찍한 마법도 그녀의 말처럼 빛을 발할 것이 분명했다.
노력의 결실은 잘 익은 열매처럼 나타났다.
헤르본 제국의 황제는 마르쿠스의 씨앗 연구를 인정했다. 마르쿠스는 ‘린더베르크’라는 성과 함께 남작 지위를 하사받았다. 마르쿠스가 어엿한 귀족이 된 뒤, 두 사람은 결혼했다. “작물을 두 개씩 길러내는 너의 재능처럼 아이도 딱 둘을 낳는 게 어때?” 하고 예쁘게 묻던 그녀는, 결혼 후 이 년 만에 유명을 달리했다. 첫 아이를 낳는 도중이었다.
자신의 씨앗들이 빛을 보게 될 거라더니. 정작 그녀와 아이는 빛 한 번 내지 못하고 바람처럼 떠나버렸다. 마르쿠스는 정말로, 세상으로부터 사라지고 싶었다.
그래서 숨어들었다. 아무도 자신을 찾지 못할 정도로, 꼭꼭 숨었다.
결계 속에서 홀로 지내던 그는, 그 공간을 아내가 사랑하던 꽃으로 잔뜩 채웠다. 라일락, 장미, 수선화, 프리지아. 더는 채울 수 없을 정도로, 그 꽃에 저마저도 깔려 죽을 만큼 가득 피워냈다. 그러다 결국엔 밖으로 흘러넘친 생명의 기운을, 마침 그곳을 찾은 알버트가 발견한 것이었다.
그때까지도, 바깥세상으로 나오는 것이 영 탐탁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되살린 초록의 이파리 위로 주황 석양이 내리쬐는 광경은, 마르쿠스의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기도 했다.
금세 눈시울이 붉어진 마르쿠스가 다시 땅 파는 것에 집중했다. 옆에서 아델트 공작이 이만 돌아가자고 재촉했지만, 마르쿠스는 묵묵히 작물을 키워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