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그나마 상황을 살피기 어려운 엄마의 방에 시아라를 데려다주고, 펠릭스는 지하창고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아빠가 사용했던 기다란 사냥용 총을 꺼내 들었다. 집을 나간 아빠가 미웠음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에 매일 반지르르하게 닦아놓은 것이었다.
펠릭스는 총을 굳게 쥐고 밖으로 나갔다.
바깥은 여전히 아수라장이었다. 골목의 사람들에게선 일말의 도덕심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중 가장 파렴치한은 시아라의 집 현관 문고리를 부수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지금 저게 말이나 되는 행동이야?’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끼이익. 철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모든 이들의 시선이 펠릭스에게 집중되었다. 펠릭스는 큰 목소리로 외쳤다.
“다들 돌아가세요. 무슨 일인 줄은 모르겠지만, 잘못 찾아오셨어요.”
그러나 시아라의 집 대문 앞에서 망을 보던 몇몇이 짜증스레 되받아쳤다.
“잘못 오긴 뭘 잘못 와! 집주인이랑 친구 사이라는 여인이 여기에 있는데. 아, 너도 여기 사는 여자를 아나 봐?”
남자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펠릭스가 고개를 돌렸다. 아까부터 줄곧 시아라의 친구라고 주장했던 카산드라가 민망한지 하늘을 바라보았다.
“친구는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네.”
“뭐야?”
“게다가 저 아줌마가 이 집에 사는 분을 알건 말건. 그게 이 앞에서 난동을 부릴 합당한 이유가 되지는 않죠.”
“이 어린놈이 자꾸만!”
그때, 다른 남자가 펠릭스의 손에 들린 총을 보며 비웃음 쳤다.
“총? 하, 어이가 없군! 우리가 무슨 잘못을 그리했다고 총까지 꺼내 들고 협박을 해?”
“명백하게 주거 침입 하셨으니까요.”
“주거 침입? 우리가 언제? 저 집 안에 들어가길 했어, 아니면 집주인을 만나기를 했어. 여기서 겨우 초인종이나 누르고 있건만! 고작 정원에 있는 잔디 한 번 밟은 게 다라고?”
남자는 양손을 위로 번쩍 들어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그러한 뻔뻔한 작태에, 펠릭스가 이를 바드득 갈았다.
“여기서 계속 소란 피우시면 쏠 거예요.”
펠릭스는 남자의 다리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그러나 대범했던 말투와는 다르게, 총을 쥔 손이 자꾸만 덜덜 떨렸다. 손바닥 안은 이미 땀으로 흥건했다.
총구 앞에 서 있던 남자 역시 펠릭스가 긴장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는 일부러 가까이 다가갔다.
“어디 한 번 쏴봐!”
“비, 비키세요!”
“너 그거 쏠 줄이나 아냐?”
펠릭스는 마음속으로 최면을 걸었다. 괜찮아, 다 괜찮아. 누나를 위해서, 누나를 위해서.
찰카닥. 노리쇠를 당겨 장전했다. 시선을 정면으로 자세를 낮추자 당황한 남자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여전히 자신은 죄가 없다는 듯, 두 손을 머리 위로 쳐든 채로.
그 모습이 메스꺼웠다. 누나는 지금 저 안에서 겁에 질려있는데!
펑-!
방아쇠를 당겼다.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서.
갑작스레 터진 총성에 놀란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한 걸음씩 뒷걸음질 치던 이들이 어느새 펠릭스를 빙 둘러 원을 그렸다.
“분명 말했어요. 이번에는 위로 안 쏴요. 그러니까 가세요!”
펠릭스가 다시 한 번 총을 장전하려던 찰나,
“이 자식이 어디서!”
누군가가 살금살금 펠릭스의 뒤로 다가와 각목으로 그의 등을 내리쳤다.
“아악!”
펠릭스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장정들은 바닥에 떨어진 장총을 멀리 걷어차 버리고 쓰러진 소년에게 다가갔다.
“이게 지금 누굴 협박해!”
펠릭스에게 주먹질하려 했을 때, 다시 한 번 철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문 뒤로 보이는 여인은 체구가 아주 작았다.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스카프로 얼굴을 가리고 눈만 내놓은 여자를 흘긋 보고, 남자들은 다시 펠릭스를 공격하려 했다.
그때, 카산드라가 기겁했다.
“저 여자예요! 샛노란 금발 머리에 푸른 눈동자! 저 여자가 제 친구…… 이 집주인이라고요!”
그 한마디에, 시아라 주변으로 개떼 같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
내가 미처 상황파악을 하기도 전에, 골목의 사람들은 나를 둘러쌌다.
“제발 한 푼만요, 네?”
“제발요!”
“여기서 당신만 몇 시간 째 기다렸다고요!”
그들의 당당한 태도에 헛웃음이 나왔다.
어쩌라는 거야? 누가 기다리래?
나는 자꾸만 내 옷을 붙잡고 늘어지는 사람들의 손길을 뿌리쳤다. 그리고 펠릭스를 찾았다. 펠릭스는……. 멀지 않은 곳에 쓰러져있었다. 벌써 한 대 맞았는지 그의 등에서 엷은 피가 흘렀다.
펠릭스의 주변에 서 있는 사내들을 힘껏 밀치고, 곧장 그에게 달려가 그를 감싸 안았다.
“펠릭스!”
“… 나오지 말랬잖아……! 들어가! 당장!”
“아, 니가 당첨자야?”
남자 하나가 괴기스럽게 웃었다.
“우린 그냥 돈만 주면 조용히 갈 거라고.”
그 말에 마음이 우물 바닥만큼 가라앉았다. 나는 조용히 일어나 물었다.
“… 저한테 뭐 맡겨두셨나요?”
“뭐?”
“제가 당신들한테 빚진 거라도 있어요? 그거 다 제 돈이에요. 당신들한테 줄 생각 눈곱만큼도 없으니까. 이만 돌아가세요.”
“하아, 이 쪼끄만 것들이 아까부터 자꾸만 돌아가라 말라 하네?”
남자가 손을 높게 쳐들었다.
나는 그 손이 내 얼굴로 날아오기 직전까지 그의 눈을 마주했다. 부릅뜬 두 눈이 시뻘게질 만큼. 마침내 내게 닿기 직전, 그제야 질끈 눈 감았다. 곧이어 퍽-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러나 쓰러진 것은 도리어 내 앞에 있던 남자였다.
옆을 살피자 어느샌가 일어난 펠릭스가 각목을 들고 씩씩거리고 있었다.
“건드리지 말라고!”
그때부터 펠릭스는 우리 곁에 다가오는 사람들을 각목으로 내리쳤다. 겁도 없이 달려들던 잔챙이 같은 놈들은 진작에 픽픽 쓰러졌다.
하지만 이 많은 사람들과 혼자 싸우기는 역부족이었다. 어느새 역전된 상황은 우리에게 불리했으나, 펠릭스는 나를 꼭 감싸 안고 저가 대신 두들겨 맞고 있었다.
말끔했던 펠릭스의 얼굴 위로 새빨간 생채기가 하나둘 생겨났다. 그와 함께, 내 분노 역시 거침없이 치솟았다.
‘안 되겠어.’
나는 펠릭스의 품에서 벗어나 빽 소리를 질렀다.
“야! 이 나쁜 놈들아!!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너네는 안 도와줘!!!!”
갑작스러운 내 목소리에 멈칫한 맞은편 남자에게 다가가 팔찌를 차고 있는 팔을 힘껏 휘둘렀다. 그 한 방에, 남자가 맥없이 쓰러졌다.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나는 오늘 하루 지긋지긋하게 나를 괴롭혀 온 자들의 얼굴을 쭉 살폈다. 내 또래부터 시작해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노인들까지. 그들은 이제야 겁먹은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러나 나를 무서워하는 것과 저들이 반성하는 것은 다른 의미지.
나는 주춤거리는 사람들에게 돌진해 팔을 들어 위협했다. 사실 나도 이런 내가 생소했지만.
“다 덤벼.”
독기 어린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던 그 순간,
저 골목 너머로 그가 보였다. 내 부름을 듣고 날아온, 카시안 폰 아델트가.
“다들 감옥에 끌려가고 싶은 건가?”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
시아라에게 선물한 팔찌에서 신호가 왔을 때, 카시안은 사실 팔찌의 기능을 의심했다. 무슨 일이 있을 때면 꼭 사용하라고 했건만, 어쩐 일인지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카시안은 이 신호가 뭔가 범상치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들락거리던 시아라의 집 대신, 골목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좌표를 설정했다.
텔레포트로 도착한 곳 주변은 매우 소란스러웠다.
‘이 동네가 왜 이렇게 시끄럽지?’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며 상황파악을 하려던 찰나, 반대편에서 치안대가 오고 있었다. 단번에 카시안을 확인한 치안대장이 그에게 달려왔다.
“아델트 공작 각하.”
“무슨 일이지?”
“이 주변에 소음이 심하다고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 당장 가지.”
불안한 마음에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군중에 둘러싸인 시아라가 보였다. 당장 달려가 그녀가 다친 곳은 없는지 살폈다. 살짝 스친 상처에 카시안이 미간을 좁혔다.
“이게 뭐야. 왜 이래.”
“아뇨, 저는 괜찮아요. 진짜 아무렇지도 않은데… 펠릭스가…….”
시아라의 말에 카시안이 주변을 살피다가, 그 아래 쓰러진 펠릭스를 발견했다. 펠릭스의 얼굴은 엉망진창이었다.
카시안은 입술을 짓씹으며 뒤돌았다.
“다들 끌려가고 싶어?”
시아라와 펠릭스를 계속 공격하던 이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았다. 갑작스레 포진한 치안대 때문에도 그랬고, 함께 나타난 검은 머리 남자가 범상치 않아서도 그랬다. 그에게서는 처음 경험하는 살기가 느껴졌다.
그때, 카시안을 알아본 누군가가 외쳤다.
“헤에엑! 아, 아델트 공작님!”
“뭐, 뭐? 고, 공작? 공작님?”
그 말에 깜짝 놀란 사람들이 카시안을 향해 하나둘 고개 숙였다.
그러나 그들이 얼마나 예의를 차리는가에 관계없이, 카시안의 분노는 이미 극에 달했다.
“남의 집 앞에서 난동, 폭행이라니. 다들 감옥에 가더라도 한 점 아쉬움이 없나 보지?”
“그, 그게 아니라… 요새 먹고 살기가 힘든 차에 소문을 듣고…….”
그러자 누군가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고, 공작님도 아시잖아요! 지금 제국민들이 결계 때문에 일어난 재난으로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근데 저 여자가 돈을 나눠준다길래…!”
카시안이 짜증스레 일갈했다.
“어이가 없군. 당신들이 무슨 권리로 그녀의 돈을 받아?”
“그, 그야… 힘들 때 같이 도우며 살면 좋으니까요……!”
얼토당토않은 말을 무시하며, 아델트의 공작이 대중의 한가운데에 섰다.
“그간 제국민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했던 점 사과하지. 당장 내일부터 공물을 풀겠다.”
“그, 그게 참말입니까?”
“하나, 오늘 이 레이디의 털끝 하나 건드린 놈들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 예?”
“또한, 앞으로 이곳에 와서 난동을 부리는 이들은 평생 지옥 속에서 살게 하겠다고 약속하지.”
그 말에 각목을 비롯한 무기를 쥐고 있던 사람들이 잔뜩 움츠러들었다.
무리에 속해있던 카산드라는 슬금슬금 빠져나갔다. 그러나, 이내 치안대에 가로막혔다.
“너를 이렇게 만든 사람이 누구야.”
카시안이 시아라에게 물었다.
“… 저도 전데… 얘를 이렇게 만든 사람도 골라도 돼요?”
“응.”
시아라는 자기를 비롯해 펠릭스를 때린 이들을 전부 골라냈다. 하나도 빠짐없이.
“끌어내.”
카시안은 치안대에게 눈짓했다.
“저, 저는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억울합니다!”
끌려가는 수많은 이들 중 하나가 호소했다. 그러나 녹초가 된 펠릭스가 있는 힘껏 반박했다.
“저 야비한 남자가 각목으로 저를 뒤에서 내리쳤어요.”
“……!”
“아, 저 남자는 누나를 때리려고 했고요. 저 남자, 아 저 여자도요.”
그 역시, 모든 것을 일러바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