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펠릭스와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창밖의 사람들은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들은 굶주린 짐승 무리 같았다. 여전히 시끄럽게 소리를 질러댔으며, 여전히 내 집 주변을 훑으며 탐색했다. 몇몇은 준비해온 모포를 바닥에 깔고 드러눕기 시작했다.
‘미쳤어! 설마 저 앞에서 밤이라도 지새울 작정인 거야?’
입 밖으로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때, 한 남자가 우리 집 대문을 쾅쾅 두드렸다.
“집주인! 여기 집주인 좀 어서 나와 보시오!”
그러나 빈집에 대고 암만 소리쳐본들 원하는 답이 나올 리가. 남자는 실망한 듯 성질을 내며 대문을 걷어찼다.
“아니, 왜 집에 없는 거야! 그 소문이 맞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그런 남자에게 옆에 있던 다른 남자가 다가와 물었다. 나는 그들이 하는 말을 듣기 위해 창문가에 바짝 귀 기울였다.
“당신도 이 집주인이 로또 당첨자라는 소문을 듣고 온 거요?”
“그렇소!”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그런 모양이요. 거짓 소문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멀어서 잘 들리지는 않았으나 중간중간 들렸던 단어들을 종합해보니, 내 생각이 맞는 듯했다. 저 사람들은 지금, 내가 당첨자라는 소문을 듣고 한 몫 얻으러 온 것이 분명했다!
‘으으! 진짜 어떻게 해!’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잡아당겼다. 한바탕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으나 남의 집에 숨어있는 주제에 그럴 수도 없지 않은가. 심란한 마음을 어쩌지도 못하고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을 때, 주방에 내려갔던 펠릭스가 돌아왔다. 내 모습을 본 펠릭스는 들고 있던 쟁반도 바닥에 내버려 둔 채 곧장 다가왔다.
“그러지 마.”
머리카락을 움켜쥔 내 손을 조심스레 감싸 쥐며 내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그 탓에 헝클어졌던 머리카락을 몇 번이고 매만져 정리해주더니, 따뜻한 우유가 담긴 머그잔을 내 양손에 꼭 쥐여 주었다.
내 머리에 닿는 펠릭스의 손길은 머그잔보다도 따뜻했다. 덕분에 불안으로 요동치던 맥박도 차츰 진정되기 시작했다.
“…… 고마워.”
그는 그저 씨익 웃었다.
“저 놈들은 아직도 그러고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 깜짝할 새 늘어난 사람들은 어느새 골목을 가득 메웠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그들은 아무도 없는 집 앞에다 대고 갖은 이유를 들먹이며 제발 얼굴 한 번만 비춰 달라 호소했다. 당장 굶어 죽게 생겼다느니, 내일부터 가게가 망해 문을 닫아야 한다느니. 가족 중 아픈 사람이 있어 치료비 좀 대신 내달라는 사람, 살 집이 없는데 집 좀 구해달라는 사람. 심지어는 그냥 현금으로 자비를 베풀라며 애걸복걸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이전 로또 당첨자 또한 섞여 있었다. 아델트 저택 가신들의 선물을 사러 갔던 날 목격했던, 남의 돈까지 노름으로 탕진했던 그 남자. 주변 사람들에게 삿대질하는 그의 한 손에는 오늘도 어김없이 술병이 들려있었다.
남자는 사람들을 향해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잘 들리지는 않았으나, 남자의 발언을 계기로 소음은 공해 수준이 되어가고 있었다. 자기 자신이 더 불쌍하다고 끊임없이 외치며.
그때, 누군가가 대중 앞에 섰다. 꽤 비싸 보이는 옷을 차려입고 사치스럽게 치장한 여자였다. 그녀의 뒤뚱거리는 자태는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여자가 뭐라 한마디 하자, 질서 없이 고래고래 소리치던 사람들이 갑자기 한 줄로 섰다.
그러더니 그 줄의 제일 앞에 있던 사람부터, 자신이 왜 불행한가에 대해 열심히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들만의 불행 베틀, 그 막이 올랐다.
*
다 망해가는 수도 부띠끄의 주인 카산드라 리첸스.
그녀가 오늘 시아라의 집을 찾았을 때, 처음에는 사실 당황스러웠다.
틸다 레트랑에게 시아라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후 소문을 퍼뜨린 장본인이, 바로 카산드라 그녀였으니까. 비록 그 놀라운 사실을 여기저기 나불거리기는 했으나. 이렇게까지 사람이 몰릴 줄이야!
‘젠장. 이러다가 내 몫도 못 챙기는 거 아니야?’
그 생각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뒤쪽으로 포진한 사람 중 자신이 알음알음 아는 얼굴도 보였다. 수도에서 찻집을 운영하는 여자라던가, 목공일을 하는 남자라던가.
‘참나, 저 인간들은 먹고 살만 하면서 여길 왜 왔담? 공짜로 한몫 챙겨보려고 다들 정신이 나갔군.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선수 치지 않으면 다 뺏기겠어!’
카산드라는 무리 앞에 섰다.
“제가 이 집주인의 사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주 친한 친구거든요.”
그렇게 딱 두 마디를 던졌을 뿐이었다. 그 순간, 수많은 사람이 자신 앞에 머리를 조아리기 시작했다.
카산드라는 심장이 짜릿짜릿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옷 한 벌이라도 더 팔기 위해 잘 나가는 귀족들에게 굽신거리던 것이 바로 오늘 아침의 일이었건만. 이렇게 자신을 우러러보는 시선들이란!
오만하게 내리깐 카산드라의 두 눈이 비웃음과 즐거움으로 번득거렸다. 사람들을 쫓아내고 저 혼자 시아라의 돈을 갈취하려던 계획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혹여 이것들이 돈을 받으면 내 수고비로 일부를 내 놓으라 해야겠군.’
카산드라는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을 한 줄로 세웠다. 마치 자신이 이 무리 위에 군림하는 왕이라도 된 것처럼.
그때, 누군가가 물었다.
“당신의 친구가 정말 헤르본 제국 로또에 당첨된 사람이 맞소?”
“그럼요. 여기 제가 걸치고 있는 것 중, 그녀가 사주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애는 정말이지…….”
부채를 펼쳐 입을 가리고 웃는 카산드라의 눈꼬리가 사르륵 접혔다.
“소문대로예요. 너무 착하답니다.”
“그, 그럼 혹시 우리도 도와줄 수 있는 거요?”
“네, 물론 제가 어찌 말하느냐에 따라서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 말만큼은 철석같이 듣는 애거든요.”
그러자 질서를 잃은 사람들이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며 카산드라에게 매달렸다.
“나는 당장 살 곳이 없소!”
“나는 이번 재난으로 농장을 잃었다오!”
“나도요!”
“제발 나부터 좀 구해주시오!”
카산드라는 드레스 자락을 잡고 늘어지는 사람들의 손길을 단칼에 쳐냈다. 더러운 먼지라도 묻은 것처럼 탈탈 털어내는 그녀의 얼굴에 노기가 가득했다. 그러나 곧 표정을 숨기고, 얼굴에 웃음기를 머금었다. 그리고는 최대한 우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제 친구가 어려운 사람들을 물심양면으로 돕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여기 있는 모든 사람에게 돈을 나눌 수는 없겠지요.”
“맞습니다!”
“옳소!”
“그러니 한 사람씩 앞에 나와 자신의 딱한 사정을 이야기하는 것이 어떤가요?”
“이 중 제일 불쌍한 사람을 뽑자는 말이오?”
“네. 제가 여러분의 의견을 잘 모아 집주인에게 전달해보도록 하지요. 아, 물론 최대한 많은 사람이 돈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지만요.”
카산드라의 뻔뻔한 거짓말에 모든 이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서로 눈치만 보던 와중, 배가 불뚝 나온 한 남자가 앞으로 나왔다. 그는 타인에게 자신의 치부를 보이는 일이 영 민망한지 연신 헛기침을 했다.
“크크 흠! 토끼 같은 자식들이 집에서 오매불망 나만 기다리는데. 나는 돈이 없어 고기 한 점 사다 주지 못한다오! 특히 이번 재난으로 꽤 고생하고 있지. 마누라가 바느질한 삯으로 겨우 벌어 입에 풀칠하는 내가, 이 중 제일 불행할 거요.”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이 들려오기도 전에, 뒤쪽에서 한 여자가 큰소리로 외쳤다.
“거짓말하지 마! 얼마 전 당신이 우리 푸줏간에서 고기를 사 갔던 걸 내가 똑똑히 기억하는 데! 그 옆엔 부인도 아닌 여자까지 있었으면서!”
“이, 이 여자가 지금 뭘 안다고 헛소리야?”
“뭐야? 자네 지금 이 중요한 자리에서 거짓말을 한 게야?”
“이런 사기꾼 같으니라고!”
“아, 아니. 나, 나는……!”
급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한 남자가 얼굴을 붉혔다. 그는 뒤꽁무니를 빼며 사람들 틈으로 숨어들었다.
이번에는 남자에게 일갈한 푸줏간 주인의 차례였다.
“다들 아실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델트 시장에 있는 푸줏간을 운영합니다. 제 남편은 아델트 외곽의 농장에서 밭일하는 사람이지요. 그런데 얼마 전! 결계 근처에서 일하던 남편이 갑자기 죽어버렸어요!”
“어머나 세상에……!”
“쯧… 불쌍하군.”
사람들의 동조에 푸줏간 주인이 더욱 크게 발언했다.
“저는 앞으로 어찌 남편 없이 살아야 하나요. 가족밖에 모르던 착한 사람이었는데… 어쩌다 결계 한 번을 잘못 만져서는…….”
“뭐야, 망가진 결계에 손을 대면 안 된다는 사실도 몰랐던 거야? 그걸 건든 사람이 잘못인 거지! 미련한 당신 남편을 탓하라고!”
“그러게, 그런 건 황실이나 아델트 공작한테 직접 상소문을 올리라고. 왜 여기까지 와서 유난이람?”
결국, 푸줏간 주인 역시 사람들을 만족하게 하지 못했다.
그 뒤로도 사람들은 비슷비슷한 사연을 가지고 하소연했다. 하나같이 똑같아 지겨울 정도였다. 카산드라가 딱히 나서지 않아도, 골목에 모인 이들은 타인의 불행을 알아서 순위 매겼다. 그러면서 저들끼리 누군 도와야 하네 말아야 하네 맞장구쳤다. 물론 그중에 다수의 성에 차는 인물은 아직 하나도 없었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산드라가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이대로 이 하찮은 것들이 치고받고 하는 꼴을 보는 것도 재밌겠군.’
그때, 한 여자가 제일 앞으로 나왔다. 천천히, 천천히. 초연해 보이는 발걸음으로.
모자를 깊게 눌러쓴 여자의 얼굴은 붕대로 칭칭 감겨있었다. 그 사이로 보이는 짙은 파란색 눈동자는 지나치게 처연해 보여서, 군중의 이목을 끌기란 당연했다.
마침내 사람들의 앞에 선 여자가 붕대를 푸르기 시작했다. 양파 껍질 벗겨지듯, 한 겹 한 겹 얇아지던 천이 어느새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리고 나타난 여자의 맨얼굴에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경악했다.
여자의 얼굴은 화상으로 전부 짓물러있었다.
징그러운 괴물이라도 본 듯한 사람들의 반응에, 그녀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떨구었다. 낡은 원피스 사이로 보이는 여자의 쇄골에도 짙은 화상 자국이 우물져 있었다. 그러나 흔들리는 그 어깨가 어찌나 가녀리던지. 대다수가 어쩔 줄 몰라 안타까워했다.
사람들의 목울대로 침이 꼴깍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쓰고 있던 모자까지 벗어들었다. 피부와 함께 머리카락도 잃은 것인지. 듬성듬성 자란 짧은 머리카락만이 애처롭게 자리 잡고 있을 뿐이었다.
“… 저는…… 예카틸리나라고 해요…….”
예카틸리나의 구슬픈 목소리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