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각하! 안에 계신가요?”
집무실로 향하는 알버트의 걸음걸이가 평소보다 당당했다. 반면, 그 옆에 선 마르쿠스는 고개를 숙인 채로 애먼 바닥만 응시했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옷매무새를 단정히 정리하고 있는 아델트 공작의 모습이 보였다. 공작은 퍽 지친 낯이었다. 힌더베레 숲에서 우연히 시아라를 마주쳤다는 이야기를 전하려던 알버트는 그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저 힘든 얼굴에 더한 근심을 얹어주고 싶지는 않았으니.
“결계를 손보러 다녀오신 건가요?”
“응. 트리탄 영지로.”
“아……. 그러고 보니 트리탄도 피해가 컸죠. 잘 해결하셨습니까?”
“일단 급한 대로 수리는 했어.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다행이네요.”
“아무래도 내일부터 비축해놨던 작물을 푸는 것이 좋겠어. 농민들 움직임이 벌써 심상치 않더군.”
카시안은 답답한지 셔츠의 윗단추를 풀어헤쳤다. 그의 손길에 약간의 조바심이 일었다.
“예. 알겠습니다.”
“더 보고할 것이 있나?”
“마르쿠스를 찾았습니다.”
알버트는 문밖에 서 있는 마르쿠스에게 어서 들어오라고 눈짓했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마르쿠스는 공작의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쭈뼛거렸다. 보다 못한 알버트가 손등으로 그의 옆구리를 툭툭 건드렸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는 듯, 황급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 그동안 펴, 평안히 지내셨습니까. 고, 공작님.”
카시안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그러나 그의 탁한 얼굴 위로 미약한 안도의 빛이 내려앉았다는 사실은, 오직 알버트만 눈치챌 수 있었다.
“마르쿠스 린데베르크.”
“예, 예?”
“일 년 동안 보이질 않던데. 그동안 아주 바빴나 봐?”
“그, 그게…….”
마르쿠스는 머뭇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연두색 머리카락과 똑 닮은 그의 풀빛 눈동자가 세차게 요동쳤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시안이 얕은 탄식을 흘렸다.
“답답한 건 여전하군.”
“죄, 죄송합니다.”
“됐어. 뭐, 어쨌거나 찾았으니 됐어.”
그는 거두절미하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오는 길에 상황은 들었겠지?”
마르쿠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다마다. 알버트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제 눈으로 직접 목격했으니까. 게다가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은, 지금 마르쿠스 스스로가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원인이기도 했다.
‘설마 숲이 말라버린 게 나 때문인가?’
아니야. 물론 결계에 손을 대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까지는…….
그러나 ‘혹시나’하는 생각에, 또다시 죄인처럼 고개를 처박았다. 그런 마르쿠스를 가만히 지켜보던 알버트가 입술을 꿈틀거렸다.
“너 똑바로 말 안 해? 일이 이 지경이 된 거, 다 너 때문이지?”
“아,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각하. 이 자식이 어디에 숨어있던 줄 아십니까? 어이가 없어서 정말. 결계 안에 숨어있었다고요! 주변 마력을 끌어다 쓴 게 분명합니다!”
“그게 정말이야?”
“예. 그것도 딱 그 주변만 파릇파릇해서 겨우 눈치챘다니까요?”
마르쿠스는 다급하게 손사래 쳤다. 저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땅을 황무지로 만들 생각은 절대 없었단 말이다. 그는 그저 숨어있을 만한 장소를 탐색했고, 결계의 틈새가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누가 감히 결계 안에 숨었다고 상상이나 하겠는가?
물론 알버트의 말처럼 주변 마력을 이용하기는 했다. 뒤틀린 틈을 찾기 위해서. 그러나, 티도 안 날 정도로, 아주 살짝! 살짝만 끌어온 것뿐인데……! 게다가 일 년 전만 해도 결계는 나름대로 멀쩡했고, 마력도 꽤 안정적이었다. 그런 힘을 조금 빌렸다 한들, 어찌 이렇게 한순간에?
사색이 된 마르쿠스가 항변하려 했다. 하지만 당황하면 자꾸만 말을 더듬는 탓에, 제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지는 못했다.
“아, 아니. 저, 저는……. 그, 그러니까 그게……!”
보다 못한 카시안이 침착하게 말했다.
“괜찮으니 천천히 말해.”
“… 그, 그저 여, 연구. 연구를 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거짓말하지 마, 이 사기꾼 자식아. 애초에 이 놈을 정화의 마법사라 부른 것부터가 말이 안 됐어요. 씨앗이나 만들어서 팔러 다니는 상인에게 그런 신성한 이름을 붙이다니!”
“그, 그건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알버트, 그만. 그쯤 해.”
연달아 쏘아붙이던 알버트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마르쿠스를 노려보는 시선은 여전했다. 그 눈빛에 바들바들 떠는 마르쿠스를 응시하던 카시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마르쿠스. 어쨌든 네 도움이 필요해.”
“… 네. 뭐, 뭐든 하겠습니다. 제, 제가 어떻게 도우면 될까요?”
“가지고 있는 씨앗들 전부 내놓고. 결계마다 돌아다니면서 청소해.”
“예에……?”
마르쿠스가 울먹거렸다.
*
수도의 시장. 그곳의 가장 허름한 술집에 한 남자가 부리나케 달려 들어왔다.
“여봐, 왜 여태 이러고 있어! 그 소문 아직 못 들었는가?”
술집에 앉아 있던 사내는 제일 싸구려 보드카의 마지막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이미 술잔은 텅 비었으나, 아쉬운지 연거푸 잔을 거꾸로 뒤집었다. 기어코 술잔에서 한 방울이 툭 떨어졌을 때, 아직도 숨을 헉헉거리는 상대에게 물었다.
“무슨 소문?”
“아, 이 사람아! 그렇게 소식이 늦어서 어쩔 셈인가! 지금 온 제국에서 자네만 몰라!”
“뭔데 그래?”
“불쌍한 사람들한테 아무런 대가 없이 돈을 나눠주는 여자가 있다더군!”
“뭐? 그게 참말인가? 그런 여자가 있어?”
앉아 있던 사내가 빈 잔을 쾅 내려놓았다. 그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래! 로또 한 방으로 벼락부자가 됐다는구만! 나는 벌써 기차표를 끊어 온 참이라고. 서둘러 가지 않으면 순서를 다 뺏기게 생겼어!”
“그, 그게 어딘가?”
“아델트!”
“허, 그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늦기 전에 어서 가자고!”
두 남자가 아델트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기차역은, 소문을 듣고 몰려온 사람들로 이미 바글바글했다.
*
마차에 마주 보고 앉은 한나와 나 사이에 무거운 적막이 감돌았다. 각자의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기에. 한나는 당장 생계 걱정으로, 나는 곤경에 처한 카시안에 대한 걱정으로.
망가진 결계를 떠올리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카시안이 방어마법을 쓰지 못한다고 했던 게… 절벽에서 떨어졌던 기억 때문일까?’
설마 그때 너무 많이 다쳐서, 능력을 잃어버린 거라면…….
나는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나를 구할 때 썼던 단단한 방어막. 분명 그것이 카시안의 능력이었으리라.
마법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하나 없지만, 어릴 적 백작 가문에서 읽었던 책에서 얼핏 그런 내용을 본 것도 같았다.
[가문을 지배하는 능력은 그 피에 각인 되리라.]
가문의 능력…. 각인…….
그렇다면, 그의 방어능력 또한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내재하여 있다는 것이 아닐까.
그 능력을 어떻게 다시 끄집어내지?
창밖은 이미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선선한 바람이라도 쐬기 위해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마차를 세워 달라 부탁했다. 한나와 함께 골목을 걸으며 차분히 머리를 식히는데, 집 근처 분위기가 영 이상했다.
‘우리 집 골목 앞에 사람이 이렇게 많이 지나다녔나?’
쌍둥이, 펠릭스 그리고 내 집.
이게 전부인데. 이 사람들은 다 뭘까.
수상함을 느낀 것은 한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아라. 이 사람들 다 뭘까요.”“그러게요. 뭔가 좀 이상한데…….”
그때, 한 남자가 우리 집 담장 안을 살피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머릿속에 경보음이 울렸다.
‘설마……!’
나는 다급하게 한나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단단히 일렀다.
“한나. 오늘 밤에 어떤 소란이 들리더라도. 절대로, 밖에 나오지 마세요.”
“응? 시아라,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냥 좀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요. 알겠죠? 절대! 절대로 안 돼요. 그냥 커튼치고 밖에는 살피지 마요.”
“혹시 위험한 일인 거야?”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마지못해 알았다고 끄덕이는 한나를 서둘러 집으로 보냈다.
고민하던 찰나, 누군가가 내 팔을 휙 낚아챘다.
*
“뭐, 뭐야……!”
“쉿!”
어두컴컴한 탓에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았으나, 어둠에 익숙해지며 눈앞의 인영이 선명해졌다. 내 팔을 세차게 낚아챈 이는 다름 아닌 펠릭스였다.
“펠릭스?”
“쉿. 조용히 하고, 이쪽으로 와.”
그는 두 번째 손가락을 제 입술에 가져다 대며 조용히 속삭였다.
펠릭스는 자신의 집 현관문을 열었다. 철문에서 끼이익 소리 하나 나지 않을 만큼, 그의 행동은 조심스러웠다. 나는 영문을 몰랐으나, 덩달아 숨죽여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집 안으로 들어가자 펠릭스는 가능한 모든 문을 다 잠갔다. 그리고 나서야 숨통이 트이는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 누나, 집밖에 이상한 사람들이 있어.”
펠릭스는 나를 데리고 2층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빛 하나 없이 커튼이 처진 공간은 암흑이었다. 그가 커튼을 살짝만 걷었다.
“괜히 뚫어지게 보지 말고. 조심히. 알겠지?”
“응.”
그렇게 조심스레 창밖을 확인했더니, 대략 열 명 남짓의 사람들이 우리 집 현관 앞에 몰려있었다.
“저 사람들 언제부터 저기에 있었어?”
“나도 몰라. 한두 시간 전에는 서넛만 보였는데, 지금은 저러네.”
“하아…….”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잘 봐봐. 꼭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지 않아? 그게 하필 누나 집 앞이라 위험할 것 같아서.”
펠릭스의 말처럼, 창밖의 사람들은 우리 집 울타리 너머를 계속 기웃기웃했다. 아예 진을 치고 앉아 있는 이들도 있었고, 하염없이 벨을 누르는 사람도 있었다.
게다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저 멀리서 몇 사람이 더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그때, 누군가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식겁한 내가 잽싸게 커튼을 닫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막연히 예상했던 직감이 현실로 다가왔다.
라튼, 라튼이다.
라튼 레트랑이 기어코 사고를 쳤다.
나와 펠릭스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맞닿았다. 펠릭스는 내 양손을 움켜쥐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그의 손아귀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금방 돌아갈 거야. 저 사람들 갈 때까지, 여기에 있어. 엄마가 쓰던 방 있으니까.”
나는 얼이 빠진 채로 그저 고개를 끄덕거렸다.
“따뜻한 차 한 잔 마시자. 그러면 괜찮아질 거야, 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