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사뭇 가라앉은 내 마음처럼, 말츠강 주변 공기는 서늘했다.
강변으로 내려가자 조금 더 세찬 바람이 치맛자락을 감싸 안았다.
“엄마, 잘 지냈어?”
흐르는 강물을 보며 조용히 인사했다. 수면과 맞닿은 붉은 태양 빛에 강물이 반짝이는 것을 보아하니, 그녀도 나를 반기는 모양이다.
나는 강기슭의 잔디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너무 늦어서 미안해.”
당연하게도,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계속해서 넋두리했다.
“더 일찍 오고 싶었는데…. 그게 마음처럼 쉽지가 않더라.”
주변에 있는 얄팍한 돌멩이 하나를 주워 물 위로 비스듬히 던졌다. 퐁, 퐁, 퐁. 돌멩이가 지나는 자리마다 수면에서 물결이 일었다. 물수제비가 남긴 잔상은 수면 위를 어지럽히다가, 연기처럼 아스라이 사라졌다.
“… 원망했었어. 나를 혼자 남겨두고 갑자기 사라진 엄마를.”
나는 강의 하류를 내다보았다. 엄마의 죽음 이후 레트랑 부인에게 모욕당했던, 라튼이 소피아와 선을 보던 것을 목격했던 그 날. 그때 나는 저곳에서 죽으려고 했었다. 갑자기 들려왔던 복권의 마감 소식이 없었다면 저 찬 바닥 아래로 그대로 가라앉았겠지.
“근데… 엄마가 나를 떠난 게, 내가 미워서가 아니잖아. 나 이제 다 알아. 엄마는……. 엄마도 나를 사랑했으니까. 그치? … 그래도 그렇게 가버리는 게 어딨어 진짜. 나한테 한마디 말도 없이 그렇게 가버리면 어떻게 해. …… 사랑한다는 말 한 번 제대로 못 했는데.”
나는 무릎을 당겨 그 위로 오른뺨을 기댔다. 한 손으로는 애꿎은 잔디만 뚝뚝 꺾으면서, 울지 않으려 애썼다.
“있잖아, 엄마. 나는 요새 사람들한테 미안한 일 투성이야. 그게 다 내가 못나서 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사랑받고 있어서 그런 거더라?”
“엄마, 나는 요새 하고 싶은 게 많아졌어. 예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것들 말이야. 남자친구랑 손잡고 길거리를 걸어보고 싶고, 함께 연극도 보러 가고 싶어. 같이 요리를 해 먹고, 팔베개를 베고 잠들고 싶고.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마시면서 밤새 수다 떠는 것. 감히 내가 상상도 못 해봤던 것들이잖아.”
나는 카시안을 떠올리며 설핏 미소를 지었다.
“엄마도… 그 사람을 봤다면 정말 좋아했을 거야.”
하늘도 먹먹한 내 마음을 아는지, 저 멀리 먹구름이 지고 있었다.
“비가 오려나 봐. 엄마도 슬프구나?”
자리에서 일어나 손으로 치마의 뒷자락을 털었다. 옷에 묻은 흙먼지가 전부 떨어졌음에도 한동안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었다. 발걸음이 무거워서, 자꾸만 뒤돌아보았다.
“다시 올 게. 그때는, 나 진짜 멋진 사람이 되어있을게.”
엄마, 사랑해.
목멘 목소리가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울렸다.
*
더는 시아라가 보이지 않았지만, 로지는 여전히 잡화점 문 바깥에 서 있었다. 그녀는 기민하게 시장 주위를 살폈다. 잡화점 옆 골목까지 살펴 아무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선물처럼 등장한 아이를 보니 그간의 근심 걱정이 싹 풀려 개운했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시아라가 편지를 보냈다고 했지만, 그녀는 정말이지 받은 적이 없었다. 아이가 괜한 걱정을 할까 싶어 우체부의 실수라고 얼버무리기는 하였으나, 요새 잡화점 주변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일을 생각하면 우연이 아니지 싶었다.
시아라가 사라진 뒤부터 골목을 떠나지 않고 세워진 마차라던가. 계속해서 아이의 행방을 묻던 사람들이라던가. 누가 보아도 수상한 자들이 로지, 그녀 주변에 들끓었다.
그래서 그녀는 시아라에게 일부러 많은 것을 묻지 않았다. 호기심에 파고드는 것이, 훗날 시아라와 자신에게 독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딱히 자세히 묻지 않아도 아이는 그 자체로 행복해 보였다. 어차피 그녀가 바라던 것은 딱 하나였으니. 시아라의 행복. 그것 말고 다른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
사랑하는 제 연인 생각에 온몸을 비비 꼬던 아이를 떠올리며 로지가 빙그레 웃었다. 어떤 남자인지 제 눈으로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좋은 사람을 만났구나.
로지는 그제야 잡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바람결에 흔들린 종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청아했다. 시아라가 이곳에 있었을 때처럼, 그렇게 맑았다.
한편 맞은편 골목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아리안은 피고 있던 담배를 발로 밟아 껐다. 그의 주변에 쾌쾌한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드디어 찾았다.
그는 틸다 레트랑의 명령에 따라 아델트에 막 다녀온 길이었다. 잠행이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아리안 자신이 원한다고 아델트 공작을 만나는 일이 어디 쉬운가. 게다가 아델트를 들쑤시고 다녔다가는 죽어버리겠다며 협박을 일삼는 머저리 라튼 레트랑 때문에, 움직임은 더욱 조심스러웠다.
아델트의 시장부터 상업지구의 흥신소, 가까운 부둣가까지 전부 수색한 결과, 유의미한 정보 두어 가지를 얻어냈다.
하나는 트리탄 가 여식의 사망이 아델트와 관련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그즈음 아델트 저택에 도둑이 들었다는 것이었다.
흥신소 주인은 그 도둑 또한 귀족 도련님이었다며 오두방정을 떨어댔다. 도둑의 신원을 묻자 그것만큼은 자신도 모른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설마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델트를 다녀온 뒤에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있던 라튼 레트랑.
아리안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턱을 매만졌다.
라튼 레트랑은 제 엄마의 과도한 보호와 관심 아래 자랐다. 아리안보다 새파랗게 어린 부잣집 귀족 도련님은. 어릴 적부터 패악질을 부리는 것이 습관처럼 당연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남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가져야 했고, 문제가 생겨도 돈으로 무마하면 그만이었다.
아리안은 세 아이의 아빠였다.
“아빠!”하고 외치며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자식들을 마주할 때마다, 그는 속으로 감사기도를 올렸다. 주여, 제 자식이 그런 쓰레기와 닮지 않아서 감사드립니다.
그래도 황실근위대에 입단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 좀 사람 구실을 하나 싶었건만. 그 쓰레기가 이제는 하다못해 도둑질까지 한 걸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겠지.”
그러나 말과는 다르게, 그의 머리는 이미 라튼이 도둑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보들을 틸다 레트랑에게 보고해야 할지 고민하던 아리안은, 당연하다는 듯 시장으로 향했다. 며칠간 잠을 자지 못해 몸이 뻐근했다. 그러나 잡화점을 감시하는 일은, 이제 그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눈치 빠른 잡화점 주인이 수상쩍은 움직임을 알아차린 듯 보였기에, 많은 인력을 철수하고 아리안 혼자 그곳을 지키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틸다 레트랑이 애타게 찾던 시아라 에벨이 등장했다.
잡화점 주인에게 작별인사를 마친 시아라는 말츠강으로 향했다. 검은 옷을 차려입은 그녀를 보자, 아리안은 착잡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어째서 저곳으로 향하는지, 그 역시 알고 있었기에.
죄책감?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러나 아리안 그 자신은 주인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리고 제 가족을 지키는 가장이며 세 아이의 아빠다.
사사로운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것. 그게 이 바닥에서 오래도록 문제없이 살아남을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아니던가.
아리안은 또다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들었을 때, 강기슭에 앉아있던 시아라가 일어났다.
폐부 깊숙이 연기를 들이마시고 다시 그녀의 뒤를 쫓았다. 평소와 같던 담배가, 오늘따라 유난히 독했다.
*
나는 다음 날 아침부터 드림캐처 세트를 꺼내 들었다.
로지 아줌마가 쉽다고 했으니까 분명…!
분명……!
부운며어엉……!
완성품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 악몽을 쫓아내…?”
이 자체가 악몽이지 싶은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현실을 부정했다. 그때, 대문 초인종이 울렸다. 거실 창 너머로 확인하니 펠릭스였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모습에 내가 부리나케 밖으로 달려 나갔다.
“펠릭스! 무슨 일이야?”
“그냥. 오늘은 집에 있는 것 같길래.”
“들어와.”
펠릭스는 미적 감각이 뛰어나니까. 도움을 구해야겠다.
나는 잘됐다 싶어 그에게 질문했다.
“뭐가 문제인 거 같아?”
“… 그러니까 이게 지금…….”
“응. 좋은 꿈을 꾸게 하는 거래.”
“……?”
그가 의아한 듯 토끼 눈을 떴다가, 이내 초승달 모양으로 눈을 접어 웃었다.
“잘했네.”
“진짜?”
“응. 머리 옆에 두고 자면 진짜 도움 되겠다.”
“이상하지 않아?”
펠릭스는 조금 과장되게 목소리를 높였다.
“저언-혀. 밖에 나가서 팔아도 될 정도야. 예술의 혼이 느껴진달까? 이것 봐. 도무지 뭘 표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름답잖아.”
“정말 그래 보여?”
“그렇대도? 이거 그 공작님 드리려는 거지?”
“응.”
“너-무 부럽다. 앞으로 좋은 꿈만 꾸시겠네.”
생각지도 못한 칭찬에 들뜬 내가 신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럼 너도 하나 만들어 줄까?”
“나는 악몽 꾸기 싫…. 아니, 나는 괜찮아. 이미 너무 잘 자거든!”
펠릭스는 연신 손사래를 쳤다. 나는 입술을 삐죽거리다가 그간 궁금했던 것이 떠올라 손뼉을 짝 쳤다.
“아! 소피아랑 연극은 잘 봤어?”
그 말에 펠릭스가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
“설마 안 보고 그냥 헤어졌어?”
“보긴 봤는데….”
“그런데?”
“하아, 됐다. 누나는 진짜….”
그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매만지며 콧김을 내뿜었다.
“진짜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튼, 이제 그런 거 하지 마. 어색해 죽는 줄 알았잖아.”
“그래도 친구 정도는…….”
“그런 거는 내가 알아서 할거 거든?”
휙 고개를 돌려버리는 탓에 나는 툴툴거리며 알았다고 답했다.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신 후에 펠릭스는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손수건과 드림캐처를 챙겨 들고 아델트 저택으로 향했다.
이상한 물건들만 잔뜩 건네주는 게 아닌가 싶어 걱정했는데, 로지 아줌마도 펠릭스도 너무 예쁘다 칭찬해주니 힘이 솟았다. 뿌듯한 마음에 괜스레 어깨도 들썩거렸다.
저택의 가신들과 반갑게 인사하고 카시안이 있는 집무실로 올라갔다.
똑똑. 문을 두드리자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혹여 그가 업무 중일까 싶어 문을 약간만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서로 눈이 마주치자, 카시안은 한달음에 내게 달려와 나를 안았다.
“기다렸어.”
그는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더욱 깊이 끌어안았다.
“공작님, 드릴 게 있어요.”
나는 정성껏 포장한 선물을 내밀었다. 카시안은 정말 감격한 것처럼 보였다. 벌어지는 입을 한 손으로 가렸음에도 광대가 씰룩쌜룩했으니까. 그는 곧장 리본을 당겨 포장을 풀었다. 내용물을 보고 잠시 갸웃거리더니, 곧이어 큭큭 거리며 웃었다.
“이게 정말 내 선물이야?”
“… 네. 혹시 마음에 안 드시면….”
“그럴 리가. 고마워.”
그 순간, 복도를 지나던 알버트가 코를 킁킁거리며 우리에게 돌진했다.
“앗! 공작 각하! 위험합니다! 그거 당장 내려놓으십시오!!”
“뭐?”
“언제 또 이런 물건이 배달된 건지! 이건 저주가 걸린 물건이 분명합니다!”
나는 넋을 놓고 알버트를 응시했다.
“이 해괴망측한 마법진부터 시작해서. 요상한 깃털까지.”
그는 내가 선물한 드림캐처를 아예 코에다 박고 냄새를 맡았다.
“아무 냄새도 안 나는 것을 보아하니, 엄청난 주술이 분명해요. 무향은 처음입니다. 누군지 몰라도, 아주 사악한 놈이 틀림없다고요! 당장 태워야 합니다!”
세상 선한 얼굴로 나를 칭찬하던 로지 아줌마와 펠릭스의 얼굴이 번뜩 떠올랐다 사라졌다.
세상에나….
다 거짓말이었나 봐….
현기증이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