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미안해요.”
나를 꽉 껴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내는 이 남자에게 내가 해줄 말은 이것뿐이었다.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당신으로 인해 내가 죽지 않았고, 이렇게 다시 당신을 만났다고.
나는 손가락을 들어 그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자 카시안이 놀란 듯 작게 흠칫거렸다. 그러나 곧 그의 커다란 손이 나의 손을 덮었다. 따뜻한 온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그러나 그때,
“에취!”
내 입에서 예고 없이 재채기가 터져 나왔다.
‘이 상황에 재채기라니!’
마치 가을날 바닥을 나뒹구는 낙엽을 밟았을 때처럼, 파스스 분위기가 식어버렸다. 못내 아쉬운 내가 괜히 입술을 툴툴대며 코를 훌쩍거렸다.
그러나 어쩌다 한 번 튀어나온 재채기일 뿐인데도, 카시안의 표정은 영 심상치 않았다.
그는 허리를 굽혀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러더니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져다 댔다.
얼굴 위로 시원한 감촉이 느껴졌다.
“너무 뜨거운데.”
“네?”
“아파 보이고.”
그런가?
머리에 열이 나나?
나는 내 손바닥으로 카시안의 이마가 닿았던 곳을 문질렀다. 뜨겁고 진득했던 주변의 열기를 내가 다 흡수한 것처럼, 불덩이였다.
하지만 지금 온몸에 열이 끓고 있다거나, 긴장이 풀려 머리가 지끈거린다거나 하는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렇게 그를 만났고 그의 앞에 서 있다는 것. 그 사실 자체가 벅찼기에. 어떠한 고통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안 아파요.”
“또 거짓말을 하네.”
“진짜로 안 아파요. 그리고… 상관없어요. 내가 아픈 거, 하나도 안 중요해요.”
“아니. 나한테는 그게 제일 중요해.”
카시안은 나를 안아 올렸다. 내게 열쇠를 건네받은 그가 우리 집 문을 열고 그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나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 그의 목을 꽉 그러안았다.
내 침실로 발걸음을 옮긴 그가 나를 곧장 침대 위에 내려놓으려고 했다. 나는 다급하게 외쳤다.
“자, 잠깐! 옷이 젖어서….”
“아….”
“얼른 갈아입을게요. 어쩌죠, 공작님께 여분으로 드릴만한 옷이 없는데…. 아! 이 수건으로 머리라도 먼저 말리세요.”
“난 괜찮으니까, 천천히 해.”
카시안은 방문을 닫고 거실로 나갔다. 나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고 옷을 골랐다. 너무 편한 옷은 싫어. 그렇다고 과한 것도 부담스럽고. 무슨 옷을 입어야 하지? 그저 집에서 입고 있을 편한 복장을 고르는 것일 뿐인데도 쉽사리 고를 수가 없었다. 그런 내 모습이 신기해 헛웃음이 나왔다. 이게 행복일까? 사랑일까?
“그게 아니면 뭐겠어.”
터져 나오던 재채기를 숨기지 못했던 것처럼. 그를 떠올릴 때마다 심장이 널뛰기하는데, 그걸 어떻게 숨겨. 그러니까 이게 행복이 아니면 뭐겠어? 사랑이 아니면 이 아찔한 마음을 어떻게 설명하겠어.
나는 따뜻한 옷으로 갈아입고 거실로 나갔다.
거실 벽난로에 장작을 때고 있던 카시안이 곧장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침대에 눕혀 줄게.”
“아니요. 여기서 같이 있고 싶어요.”
바닥에 풀썩 주저앉으며 카시안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러자 잠시 고민하던 그 역시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난로 앞에서 열기를 쬐자 고단했던 하루가 떠올랐다. 그 고단함의 끝에 이 남자가 함께 있다는 사실. 그것은 내가 당첨금을 손에 쥐었을 때보다도 더욱 벅차고 설레는 것이었다.
나는 옆에 내려놓았던 상자에서 일기장을 꺼내 들었다. 습기로 눅눅해진 노트 끝자락이 장작불 앞에서 금세 빳빳해졌다. 그 덕분에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부스럭거리는 종이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채웠다.
나는 카시안의 어깨에 기대어 우리가 함께 적어 내려간 일기를 읽었다.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두 소년, 소녀의 얼굴에 그가 피식하고 웃었다.
“나는 꼭 탄 밤 같네.”
“나 그림에 재능이 있는 게 아닐까? 이것 좀 봐요. 하나도 안 변했어. 어쩜 이렇게 똑같이 컸지?”
그림 속 소년의 사나운 눈꼬리를 손가락으로 따라 그렸다. 그러자 그가 내 뺨 위로 흘러내린 금색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너도 똑같아.”
우리는 계속해서 일기장을 넘겼다.
“너무해요, 진짜. 이렇게 무심하게 말하고. 답장이 한 줄을 안 넘겨.”
흙으로 요리해줬다고 바보라고 한다거나, 헤어짐을 걱정하던 내게 어쩔 수 없다고 적어놓은 부분을 읽던 내가 툴툴거렸다. 카시안은 멋쩍은 듯 빠르게 다음 페이지를 펼쳤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그의 화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가 눈꺼풀을 아래로 내리깔며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
“아니…. 이런 거로 사과하실 필요 없거든요!”
“표현하는 법을 잘 몰라서…….”
나는 그의 손바닥 위로 내 손을 겹치고, 손깍지를 꼈다.
“표현은 제가 할게요.”
내가 손가락 끝에 힘을 주자 카시안이 내 손등 위로 작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그가 주머니 속에서 챙겨두었던 목걸이를 꺼냈다.
“팔찌랑 모양이 똑같아서…. 그래서 알아봤어요. 공작님이 이 목걸이 주인이라는 걸.”
“… 엄마가 마지막으로 주고 갔던 거야.”
그는 담담한 어조로 말하며 내 목에 목걸이를 채워주었다.
“이제 네가 주인이고.”
내 눈동자처럼 푸르게 빛나는 보석이 쇄골 언저리에서 반짝거렸다.
“그런데 공작님.”
“응.”
“금방 말을 놓으셨네요?”
카시안이 장작의 열기처럼 따뜻한 내 양 뺨을 어루만졌다.
“그래서, 싫어?”
“그런 게 아니라…….”
“그럼 계속 존댓말을 쓸까요?”
“진짜요?”
“당신이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나는 키득거리며 장난스레 웃었다.
“싫은 게 아니라. 어쩐지 공작님이랑 더 가까워진 것 같아서요.”
그러자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말고.”
“네?”
“공작님 말고.”
“그럼요?”
“오빠라고 불러줘.”
“그래도 사람들 앞에서는…….”
“불러줘.”
“… 오빠.”
카시안이 내 어깨에 머리를 묻었다.
“좋아.”
그 위에서 그가 강아지처럼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나는 그의 뒷머리를 살며시 쓸어내렸다.
“좋아해.”
“저도요.”
“좋아해.”
창밖으로 토독토독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코끝으로 장작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물씬 풍겼다.
보육원에서 함께 있었던 그 시절처럼. 우리는 서로의 어깨를 베개 삼아 나란히 기댔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서로의 세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밤새워 이야기했다.
지펴놓은 불씨가 새벽녘에 모두 사그라들었지만, 전혀 춥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따뜻했다. 이제 더는 혼자가 아니었기에.
나의 가족이자 연인.
그와 함께 있었기에.
*
잠들기 직전부터, 다음 날 해가 뜨기를 기다리는 일이 이토록 설레고 초조한 것이었던가? 머리 위로 떠오른 태양이 지지 않고 온종일 함께하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큰 욕심일까.
왜 낮은 짧고 밤은 그리도 긴가. 시간을 붙잡는 마법이라도 연구해야 하나?
젠장, 집에 보내기 싫어. 더 오랫동안 같이 있고 싶어.
벌써 어둑해진 밤에 시아라를 집에 데려다주며 카시안은 생각했다. 그녀와 저 사이를 질투한 신이 시계태엽을 빠르게 감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렇게 시간이 빠르게 흐를 수 있다는 말인가.
카시안의 하루는 평소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고, 샤워 후에 옷을 갖추어 입고.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한 뒤에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아 업무를 보고. 이따금 정원을 거닐며 꽃향기를 맡는 것.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상이었다. 달라진 것이라면 정오 무렵이면 그녀가 저택을 방문한다는 것쯤일 터였다.
그러나, 시아라 그녀가 제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하루가 달콤했다. 황홀, 그 자체였다.
매일매일 아델트 저택을 찾던 시아라가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볼 일이 있다며 수도에 가버렸기 때문이다. 내일이면 그녀가 다시 눈앞에 있을 것이 분명함에도. 견디기가 어려웠다. 자꾸 어리광을 피우며 재촉이나 해대는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았다.
사랑을 하면 머리가 어떻게 되는 걸까. 눈에 딱 하루 안 보인다고 이렇게 멍청이가 되다니. 그러나 그 사실이 썩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만족스러웠다. 그녀의 존재는 그의 목숨 전부를 내던질 정도로 깊숙이 박혀있었다. 그런 그녀로 인해 자신이 모자란 사람이 되었다면, 그것은 오히려 영광이었다.
문득, 아카데미를 다닐 적에 사랑 타령이나 하던 머저리들이 떠올랐다. 하루 종일 저들이 좋아하는 여자애들 이야기나 하면서 울고 웃던 그 머저리들 말이다. 카시안은 이제 자신이 그들과 다른 바가 없음을 깨달았다. 어떤 것도 그녀를 빼놓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는 이마 위로 손을 짚고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연거푸 한숨이 쏟아져 나왔지만, 입꼬리만큼은 위로 솟구쳐 웃고 있었다.
그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평소라면 이 시간에 집무실에만 틀어박혀 있었을 테지만, 마음이 꽃밭이라 그런가. 어떤 것도 집중할 수 없었다.
일층 복도를 지나 괜히 식당을 기웃거렸다. 그곳에서는 점심을 준비하기 직전에 잠시 쉬고 있던 요리사들이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버터를 잔뜩 넣은 샛노란 쿠키를 베어 문 요리사 하나가 크게 감탄했다.
“세상에! 이 쿠키 너무 맛있어!”
“시아라 아가씨가 선물 고르는 안목이 대단하시군. 너무 맛있……. 어라? 공작님? 여기까지 어쩐 일이신가요? 혹시 시장하신가요?”
카시안을 보자마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요리사들을 보며 그가 손사래를 쳤다.
“됐어. 신경 쓰지 말고 먹어. 그냥 둘러본 거니까.”
그는 식당을 빠져나와 응접실로 향했다. 여기에는 하녀 낸시와 알버트가 있었다. 낸시는 창문과 커튼에 달라붙은 먼지를 털어내고, 알버트는 중요한 신문기사를 스크랩하는 중이었다.
카시안이 알버트를 부르려던 순간, 알버트가 낸시에게 말했다.
“아, 이렇게 햇빛이 쨍쨍 비치는 날에는 이게 꼭 필요합니다. 제 피부는 소중하니까요.”
그는 방정맞은 손놀림으로 주머니에서 투명한 유리병 하나를 꺼내들고, 얼굴 위로 연신 뿌려댔다.
“이 민트의 상쾌한 느낌!”
“앗! 그럼 저도 아가씨께서 주신 선물을 뿌려야겠어요. 이 향수는 라일락 향이 물씬 풍겨서 어찌나 고급스러운지 몰라요!”
“이렇게 딱 알맞은 선물을 받아 본 게 언제인지.”
두 사람이 꺄르르 웃었다.
응접실은 곧 빌어먹을 민트 향과 라일락 꽃향기로 가득 찼다. 카시안은 한쪽 눈썹을 치떴다. 그러니까 아까 그 쿠키도, 이것들도. 다 그녀가 건넸던 선물이라는 거지?
그는 입술을 씰룩거리며 다시 집무실로 향했다. 갑자기 짜증이 확 솟구쳤다.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기사 렌과 마주쳤다. 그는 창틀에 엉덩이를 올리고 앉아 여유롭게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있었다. 사색에 잠긴 듯한 그의 눈이 감미롭게 감겼다.
“… 넌 또 뭐야?”
“이거요?”
그가 들고 있는 머그잔이 햇살을 받아 더욱 찬란하게 빛났다.
“아가씨가 주신 선물이죠.”
렌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새초롬하게 말했다. 카시안은 당장이라도 저 잔을 없애버리고 싶었다.
“그냥 부술까?”
“아, 세트라서 하나 더 있습니다만.”
심지어 넌 두 개야?
그의 인내심이 끝에 달했다.
겨우 이까짓 일들로 질투라니. 그는 인정해야만 했다. 자신이 진짜 머저리가 되었음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