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이제야 모든 기억이 떠올랐다.
소년은 마법사였다. 내가 바닥으로 떨어지기 직전, 그는 나에게 보호 마법을 걸어주고 나대신 절벽으로 추락했다. 피 흘린 채 바닥에 쓰러져 있던 사람은 내가 아니라, 소년이었다. 오히려 나는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고 멀쩡했다. 그가 만든 견고한 방어막 안에서, 나는 안전했다.
그 방어막은 아무리 두드려도 깨지지 않았다. 나는 그 너머의 소년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오열하다가, 그대로 정신을 잃고 기절했다.
그 뒤에 어떻게 다시 보육원으로 돌아왔는지는 모르겠다. 사라진 우리를 찾아 나선 어른들이 밤새도록 숲을 뒤졌다는 말만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
내가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이 지옥 같은 다락방에 갇힌 뒤였다.
좁고 습한 다락은 어두웠고 벌레가 바글바글했다. 그것들이 움직이며 내는 기분 나쁜 소리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눈을 뜨자마자 굳게 닫힌 철문을 쾅쾅 두드렸다. 그러나 단단히 잠긴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당시의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내가 왜 여기에 갇혔는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왜 오빠가 내 옆에 없는지.
어떤 것도 알 수 없었다. 심지어 다친 곳 하나 없이 몸이 멀쩡했기에, 사고를 당했다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얼마 뒤에, 문 너머로 짤그랑대는 열쇠뭉치 소리가 들려왔다. 끼익. 쇳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열린 문 사이로 드리운 시커먼 그림자는 좁은 다락을 가득 메울 정도로 커다랬다.
다락을 찾아온 사람은 보육원장 제페토였다.
그는 무척 화가 난 얼굴이었다. 물론 그가 나를 대하는 태도는 평소라고 더 나을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날은 더 달랐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나는 웅크린 몸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성큼성큼 내게 다가온 그가 순식간에 내 머리카락을 낚아챘다.
“아아악!”
제페토는 나를 밝은 복도로 끌고 와 내팽개쳤다. 나는 바닥을 데구루루 구르며 쓰러졌다.
“당장 말해!”
그는 씩씩거리면서 나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폭발 직전의 분노가 일렁거렸다.
“왜 너는 이렇게 멀쩡하지?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 애만 그렇게 다쳤는지 당장 말해!”
다치다니, 누가?
묻고 싶었으나 입을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겨우 일곱 살짜리 아이에게 거리낌 없이 손찌검을 일삼는 눈앞의 남자는, 세상 무엇보다도 가장 두려운 존재였다.
“모, 몰라요.”
“이런 괘씸한 계집애 같으니라고! 사사건건 불행을 몰고 오더니 기어코 내 인생까지 망치려 드는구나!”
너무 무서워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너 때문에! 내가 잃은 돈이 얼마인 줄이나 알아?”
나는 입술을 벌벌 떨며 말했다.
“모, 모르겠어요. 죄, 죄송해요.”
그러자 제페토가 싸늘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잘못한 아이는 벌을 받아야지.”
그리고는 나를 다시 다락방 속으로 집어 던졌다.
나는 제발 이곳에서 꺼내달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제페토는 매정하게 돌아섰다.
“기억을 되찾을 때까지 그곳에 있어야 할 거다.”
문이 닫히고 또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불행하게도 내가 이만큼 자라 어른이 될 때까지, 그날의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이후에,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운 좋게 에벨 가문에 입양될 수 있었다. 양부모님도 유모도. 가문의 모든 이들이 나를 아껴주었다.
그러나 가끔 넘어져 무릎에 피라도 나면, 비참한 기억의 잔상이 불쑥 나타날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이유도 모른 채 덜덜 떠는 나를 감싸 준 것은 나의 가족들이었다.
소년의 소식은 들을 길이 없었다.
그가 나대신 다쳤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기에, 나는 내가 버림받은 줄로만 알고 있었다. 오빠도 내가 미워 떠난 것이라 여겼다.
적어도 내가 자랐던 보육원의 아이들에게는, 미움 받고 버려지는 일이 몸에 밴 듯 익숙했기에.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나 스스로가 너무 한심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여태껏 나는…. 나를 떠난 사람들을 원망해왔다. 정말이지 모순적이었지만, 그렇게 나를 방어했다. 정작 나를 구한 소년을, 나를 위로한 내 가족과 유모를.
버려짐에 익숙했던 나는 원망도 쉬웠다.
인생이 잘 안 풀릴 때마다 끊임없이 도망쳤다. 너도 내가 미워? 당연히 그렇겠지. 나는 불행한 아이거든. 너도 나를 떠날 거지? 다들 그랬으니까.
“바보 같아…….”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집에 돌아가야 하는데. 움직일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늘어진 몸을 겨우 일으켜 다시 일기장을 주워들었다. 공책의 첫 페이지에 있던 소년과 소녀의 그림을 손가락으로 연신 매만졌다. 나 때문에 그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숨이 턱턱 막혀왔다. 나는 왜…. 이 소년을 단 한 번도 찾지 않았을까.
공책을 덮어 품에 안았다. 그와 동시에, 얇은 종이봉투 한 장이 중력을 받아 바닥으로 떨어졌다. 일기장 사이에 끼워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게 뭐지……?”
봉투 안에는 가느다란 금색 줄로 만들어진 목걸이가 들어있었다. 그 한가운데에는 푸른 오팔 보석이 박혀 반짝거렸다. 순간 드는 기묘한 감각에 나도 모르게 팔에 차고 있던 팔찌를 확인했다. 목걸이와 팔찌는 모양이 비슷했다. 아니, 똑같았다.
나는 서둘러 봉투 안에 있던 편지를 꺼내 읽었다.
[너한테 주고 싶어. 너는 예쁘니까.]
일기장에서 보았던 소년의 단정한 글씨체였다.
[우리가 헤어져도, 괜찮아. 너는 아무 걱정하지 마. 네가 어디에 있건, 내가 꼭 찾아낼게. 나는 매일매일 너에게 가는 길이야.]
그리고 그 종이의 끝에,
[너의 카시안.]
소년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 카시안?
나를 지켜줬던 소년이. 내가 졸졸 쫓아다니던 오빠가 정말 카시안이었어?
꿈에서 보았던 소년의 얼굴이 더욱 선명해졌다. 정말, 정말로 그였다.
나는 목걸이가 떨어지지 않도록 원피스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일기장과 편지까지 모두 챙겨 서둘러 다락방을 빠져나왔다. 나무 계단을 빠르게 내려갈 때마다 우당탕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러나 정작 내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너무 빠르게 달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그가 보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를 세차게 안아주고 싶었다. 나라고. 나 여기에 있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그에게 입 맞추고 싶었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일기장이 젖지 않도록 품속에 깊이 끌어안았다. 빗물에 젖은 흙이 원피스 치맛자락에 다 튀는 것도 모른 채, 마차를 향해 달렸다.
한참이나 대기하고 있던 마부가 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 아가씨?”
“가요. 얼른, 최대한 빨리. 저택으로 가주세요. 네?”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마부석에 올라탔다.
등 뒤로 보육원이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이제 정말 안녕, 나의 지옥.
*
저 멀리 아델트 저택의 정문이 보이기 시작하자 내 엉덩이가 자꾸만 들썩거렸다. 너무 벅차올라서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정문에서 저택의 현관까지는 또 왜 이리 먼 거야? 평소라면 걸어 다녀도 끄떡없을 거리였지만, 오늘은 영겁의 시간이 지나는 듯 했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말발굽 소리가 멈췄다. 마부가 내려 문 열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나는 스스로 걸쇠를 풀고 마차에서 점프하듯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곧장 저택 안으로 달려갔다.
“시, 시아라 아가씨?”
“세상에! 이, 이게 무슨 일이세요!”
빠르게 돌진하는 나를 보고 저택의 하녀들이 흠칫 놀랐지만,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3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하지만 집무실에는 그가 없었다. 어디 간 거야. 혹시 방에 있는 걸까?
그의 침실 앞에서 노크했지만 아무런 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조바심이 일었다. 왜 아무 말이 없으세요, 네?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려던 순간, 복도를 지나던 알버트가 의아하게 물었다.
“아니, 집에 가신다더니 왜 여기에 계신가요…? 비도 쫄딱 맞으시고!”
“공작님, 지금 공작님은 어디에 계세요?”
“각하라면…. 시아라 양이 몸이 안 좋다 전했더니 곧장… 아가씨 집으로 향하셨는걸요?”
“네?”
예상치 못한 소리에 곧장 몸을 돌려 내려가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나는 카시안의 침실로 들어가 협탁 위에 올려있는 액자를 집어 들었다.
그 그림은, 일기장 속에 그려진 내 모습과 역시나 똑같았다.
“이걸 어떻게 못 알아볼 수가 있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모습을.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나는 액자 속에서 그림을 꺼내어 일기장이 있는 상자 안에 끼워 넣었다.
이제, 집으로 가는 거야.
달렸다.
정말 계속해서 달렸다. 숨이 모자란 것도 모를 만큼.
알버트가 다시 마차를 준비해 주겠다고 했지만, 그것을 기다릴 새가 없었다.
아까보다 거세진 빗줄기가 눈을 가렸다.
아델트에서 카시안을 처음 마주쳤던 언덕을. 그와 함께 걸었던 길을 달렸다.
기나긴 엇갈림 속에 드디어,
그가 보였다. 우리 집 대문 앞에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앉아있는 카시안이.
나는 한결 느려진 발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빗소리에 내 기척을 눈치채지 못한 그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이었다. 고개를 무릎에 묻었다가,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가. 게다가 언제부터 이러고 있던 건지 그 역시 나처럼, 비 맞은 강아지처럼 쫄딱 젖어있었다.
나는 온전히 카시안의 앞에 섰다. 그리고 내 양손으로 그의 양 볼을 감싸 쥐었다. 그의 고개가 천천히 들리며 물기 어린 시선이 나에게 닿았다.
“… 시아라…?”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바보 같아 정말….”
두어 차례 눈을 끔뻑이던 그가 벌떡 일어났다. 이 와중에도 그는, 마법으로 우산을 만들어 내 머리 위에 씌워주었다. 자기 옷이 젖는 것은 상관없다는 듯이.
그런 그를, 나는 단숨에 끌어안았다. 젖은 옷 사이로 서로의 체온이 느껴졌다.
그가 들고 있던 우산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진짜로, 진짜로 나한테 왔어. 오겠다더니, 진짜로 왔어.”
마차에서부터 꾹꾹 참았던 눈물이 수도꼭지처럼 터져 나왔다.
“보고 싶었어요.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요.”
“나도…. 나도 그랬어요.”
그의 뜨거운 숨결이 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당신한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
“무서웠어요.”
“공작님.”
“눈앞에 없으니까 자꾸만 불안해서… 죽을 것 같았어요.”
카시안은 정말로 겁에 질린 사람처럼 떨고 있었다. 목소리 역시 물에 젖은 듯 무거웠다.
나는 그를 안고 있던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오늘에서야 발견한 목걸이를 꺼내서, 그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
허공에서 흔들거리는 목걸이를 응시하던 그의 동공이 커졌다.
“……!”
“… 첫눈에 못 알아봐서… 미안해요.”
“시… 아라…?”
“오빠.”
그는 넋을 놓고 멍하니 나를 내려다보았다.
“다시.”
“오빠.”
“… 정말 너야?”
카시안은 내 팔을 당겨 품에 끌어안았다. 그 안에 갇힌 내가 고개를 들자 밤 호수 같은 그의 눈동자가 보였다. 오직 나를 담고 있는 아득한 그 호수. 그곳에서 물방울 하나가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토르륵. 빗줄기와 함께 바닥으로 낙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