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또맞고 튀었는데 공작님이 집착한다-49화 (49/135)

49.

나는 아직도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여기가 어디지?’

몇 차례 눈을 깜빡이자 몽롱했던 시야가 점차 뚜렷해졌다.

하얀 들꽃이 가득 핀 들판 위를 조그만 소녀 하나가 서성거렸다. 빠삭 마른 몸에 걸친 누더기와 푸석한 금발 머리. 앞코가 다 닳은 구두. 잔뜩 긴장한 것처럼 보이는 소녀의 앞으로 키가 큰 소년이 다가갔다. 몽롱하게 낀 안개 탓에 소년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준비됐어?”

“무, 무서워.”

병아리처럼 작은 소녀의 손을 소년이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겁먹지 말고. 차라리 발을 밟아.”

“그, 그래도. 나 때문에 오빠가 다치면….”

“너한테 밟힌다고 누가 죽기라도 할 거 같아?”

소녀는 소년이 이끄는 대로 발을 옮겼다. 악단의 연주 하나 없었지만, 살랑 불어온 바람과 지저귀는 새소리만으로도 충분했다. 잠시 후, 서툰 동작을 이어가던 소녀가 소년의 발을 밟고야 말았다.

“미안해! 아팠지!”

“하나도 안 아프다니까.”

소년이 맑게 웃었다. 그 순간 희뿌옇던 안개가 서서히 걷히며 소년의 얼굴이 점차 선명해졌다.

‘카시안?’

“!”

정신이 번쩍 들며 튀어 오르듯 침대에서 일어났다.

또 그 꿈이었다. 희미한 과거의 기억은 매번 똑같은 꿈으로 되풀이되어 나타났다.

하지만 지금껏 단 한 번도 소년의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었다. 구멍이라도 난 듯 늘 흐릿했다. 그런데 오늘은…. 분명 카시안이었다.

“카시안이 왜…?”

문득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꿈속의 내 모습이 그가 보여준 그림 속 소녀와 너무도 닮아있었기에.

“에이, 설마.”

나는 머리 위로 이불을 덮어썼다.

*

오랜만에 그네 위에 앉아 늘어지게 하품했다. 가볍게 발돋움하고 있을 찰나, 담장 너머로 내가 기다렸던 노란 머리통 두 개가 흘끗 보였다.

나는 곧장 달려가 대문을 열어 레오와 레아를 부둥켜안았다.

“누나 약속 지켰지?”

레오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맑은 호수처럼 투명한 미소를 지었다.

“산책할 겸, 우리 같이 엄마한테 갈까? 오랜만에 케이크도 먹고!”

“좋아요!”

나는 양손에 아이들의 손을 하나씩 잡고 힘차게 걸었다. 숲에 접어들자 레아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언니는.”

“응?”

“공작님이랑 뽀뽀도 했어?”

“켁.”

기습질문에 나는 사레들려 캑캑거리며 기침을 쏟아냈다. 물이라도 마시고 있었다면 필시 밖으로 뿜었을 테지.

‘이 꼬맹이가 지금 뭐라는 거야?’

그런데 레오가 맞받아치는 말이 더욱 가관이었다.

“누나는 공작님이랑 뽀뽀 안 해! 뽀뽀는 좋아하는 사람이랑만 하는 거잖아!”

“레오는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귓가에 아이들이 ‘뽀뽀뽀뽀뽀뽀.’하는 소리가 맴돌았다. 괜히 양심에 찔린 나는 우지끈거리는 머리를 살짝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아니야! 나는 바보 아니야!”

어느새 저만치 앞서 걷는 레아를, 레오 역시 빠른 걸음으로 따라갔다.

나는 두 팔을 머리 위로 쭉 뻗어 스트레칭했다. 그리고는 나도 질세라, 아이들을 향해 달려갔다.

우리는 제일 먼저 한나의 레스토랑에 들렀다. 거기서 마카다미아가 한가운데에 콕 박힌 초콜릿 쿠키 하나씩을 손에 쥐고 나왔다. 그 뒤에는 함께 시장 구경을 했다.

나는 레아의 머리카락에 여러 가지 머리핀을 대보며 마음에 드는 것들을 골라 담았다.

그 옆에서 길거리 상인 하나는 장난감을 시연 중이었다. 나무로 된 공룡 장난감의 태엽을 감자 공룡의 두 다리가 쿵쿵 움직였다. 레오는 입을 헤- 벌리고 올망졸망한 눈동자를 빛냈다. 그중에서 가장 크고 듬직한 공룡으로 골라 그의 손에 쥐여 주자, 아이가 꺄르르 웃으며 그것을 볼에 비벼댔다.

“누나. 고마워.”

아이가 내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서점 앞을 지나자 레아의 발걸음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그러더니 내 손을 살짝 잡아끌었다.

“우리 여기 구경하면 안 돼?”

“당연히 되지.”

안으로 들어가자 아이는 분주하게 두리번거렸다. 그녀가 구경을 마칠 때까지, 나 역시 천천히 내부를 둘러보았다.

오래된 책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곳은 아델트에서 꽤 유명한 서점이었다. 온갖 고서부터 흔한 가십지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계산대 옆에서 연극 티켓을 판매하는 부스를 발견했다.

- 내꺼인 듯 내꺼 같은 내꺼 아닌 너 – 라는 제목의 공연은 이틀 뒤 상업지구에서 하는 로맨스 연극이었다. 무려 절찬리 상연 중이란다.

그러고 보니 소피아도 나흘 뒤면 아델트를 떠나 수도 저택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문득 엊그제 식사 자리에서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던 소피아와 펠릭스가 떠올랐다.

제목도 하필…. 나는 쿡 하고 웃으며 티켓 두 장을 구매했다. 무려 커플 좌석으로.

펠릭스가 그녀의 마음을 알아준다면 물론 더할 나위 없겠지만. 사실 그건 내 소관 밖이었다. 그러나 저번 알버트의 조언을 곧이곧대로 따라 하던 소피아를 떠올리자, 참담하고 심장이 아찔하게 내려앉았다.

‘남 연애에 참견하는 거 아니랬는데…….’

딱 이번 한 번만, 안타까운 그녀를 돕기로 했다.

*

“오늘 소피아도 같이 만날 거야.”

“뭐? 그 여자는 또 왜?”

상업지구로 향하는 길에 펠릭스에게 말하자 그가 펄쩍펄쩍 뛰었다.

“내일모레면 수도로 돌아간대. 그러면 앞으로 보기 힘들 텐데……. 내가 좋아하는 친구고…….”

내가 말끝을 흐리자 그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한참 뒤에, 그가 결심한 듯 물었다.

“누나.”

“응?”

“그 공작님 좋아해?”

“그, 그런 걸 왜 물어봐.”

“왜. 난 물어보면 안 돼?”

펠릭스는 내 눈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러나 당황스러운 질문으로 내가 허둥거리자 그가 피식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됐다.”

“그, 그러니까……”

“말 안 해도 알아. 괜찮아.”

“… 응.”

그가 한 걸음 앞서 걷더니 빙그르르 돌았다.

“뭐해. 빨리 와. 누나 친구 보러 가자며.”

나는 소피아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단단히 일러두었다. 밀당이니 뭐니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그냥 너 다운 게 제일 예쁘다고.

내 간절한 바람이 통한 걸까. 그녀는 평상시처럼 단정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목구멍까지 얹혀있던 음식이 단번에 소화되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근처 카페로 들어가서 차 한 잔씩을 마셨다. 진갈색 나무로 장식된 내부는 포근하고 아늑했다. 적어도 이런 분위기라면, 뭘 해도 망치지는 않겠지.

연극이 시작할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계획한 대로 조용히 티켓을 꺼내 테이블 한가운데에 올려두었다.

두 사람은 그런 나를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자연스럽게 벽시계를 확인한 내가 손뼉을 짝 치며 큰 소리로 말했다.

“참! 내 정신 좀 봐! 나 오늘 할 일 있는 걸 까먹었네!”

나는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두 사람이 동시에 외쳤다.

“언니!”

“누나!”

“언니… 혹시 지금 가려는 거예요?”

“아니지?”

“미안. 그건 선물이야. 그럼 안녕!”

혹시라도 그들이 거절할까 봐, 대답을 듣기도 전에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

몇 날 며칠 집구석에만 틀어박혀 있던 라튼 레트랑이 드디어 밖으로 나왔다. 그래 봐야 고작 저택의 정원이었지만.

그는 정원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틸다 레트랑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틸다는 오랜만에 저를 찾아온 아들을 보며 반가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들. 앉으렴.”

그녀가 여유롭게 말했다.

“이제 괜찮아진 거니?”

그러나 라튼은 여전히 냉정했다.

“엄마. 전 이미 시아라랑 끝났어요. 그러니까 그 애를 찾는 건 이제 그만 하세요.”

“라튼.”

그녀가 테이블 위로 커피잔을 쾅 내려놓았다.

“네가 뭘 잘못 알고 있구나. 이 엄마는 모욕을 당하면 견딜 수가 없단다. 어떻게든 두 배로 갚아줘야 해.”

“엄마…. 제발…….”

“제까짓 게 남자 하나 새로 만나서 나한테 돈다발을 집어 던져? 넌 그게 억울하고 분하지도 않아? 자꾸 그렇게 그 계집애 편을 들 거니?”

물론 라튼도 억울했다. 시아라만 생각하면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미칠 것 같았다. 그러나 제 엄마를 말려야만 했다. 그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여기서 엄마를 말리지 않으면, 그나마 붙잡고 있는 모든 것들이 산산이 조각날 거라는 것을.

지금만 해도 벌써 그렇지 않은가. 망가져 버린 손 때문에 라튼은 황실 근위대에 입단하는 것도 미루고야 말았다. 제 인생을 망쳐버린 그 남자만 생각하면 아직도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그러나 그는 도무지, 그 공작을 상대할 자신이 없었다. 떠올리기만 해도 끔찍하고 소름이 끼쳤다.

그러니 시아라가 그 남자 곁에 있는 동안만큼은 절대로. 엄마가 그 애를 건드리게 놔둘 수 없었다.

“… 남자한테 돈을 받은 게 아니에요!”

아들의 대꾸에 틸다가 가늘게 눈을 떴다. 그녀는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라튼이 뭔가를 알고 있다는 것을.

“너 혹시 그 애를 만났니?”

라튼은 고개를 돌려 틸다를 외면했다.

“그만하세요. 충분하니까!”

그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라튼. 그 계집애를 만난 거냐고 이 엄마가 묻잖니.”

틸다가 낮은 목소리로 그를 채근했다. 입술을 잘근잘근 짓씹던 그가 결국, 참았던 말을 내뱉었다.

“… 남자를 꾄 게 아니라. 로또에 당첨돼서 돈이 생긴 거라고요!!”

대나무 숲에 가서 소리라도 지른 듯 속이 다 시원했다. 그러나 맞은편에 앉은 엄마를 보자마자, 덜컥 겁이 났다.

“그게 정말이니?”

“… 어… 그… 그러니까 그게….”

한쪽 입꼬리를 흉측하게 비틀어 올린 틸다 레트랑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라튼이 뒤늦게 양손으로 입을 막아 보았으나, 이미 쏟아진 물을 주워 담을 길이 없었다.

*

나는 카페를 빠져나와 곧장 상점 거리로 갔다. 펠릭스와 소피아 두 사람만 남겨두고 나온 것이 내심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지. 이걸로 내가 할 일은 끝인 거야.

골목마다 자리한 상점들을 돌아다니며 선물을 골랐다. 그간 애써준 저택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먼저, 낸시를 위해서 향수 하나를 골라 예쁘게 포장했다. 투명한 유리병에 든 보라색 액체는, 진열장에 나열된 것 중 제일 예쁜 색이었다. 테스터를 칙칙 뿌려보자 그녀를 닮은 따뜻한 라일락 향기가 났다.

기사 렌은 늘 ‘스타별스’ 라는 카페의 물건만 사용했다. 그래서 그곳에 들러 예쁜 머그잔 세트를 샀다.

알버트는…….

그가 소피아에게 건넸던 조언만 생각하면 사실 입에 물리는 재갈이 딱 적당했지만. 그래도 그 역시 최선의 노력을 다했을 테니. 아무래도 이건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줄 것 같았다.

흐음…. 그래, 이거다!

피부관리를 하는 그를 위해 건조할 때 뿌리는 미스트를 선택했다. 알싸한 민트향이 나는 것이 딱 그의 취향이지 싶었다.

그리고 그들을 비롯해 저택의 모두가 양껏 먹을 수 있는 고급 과자까지!

나는 딱 한 가지 선물만을 남기고 쇼핑을 마쳤다. 마지막은….

카시안을 위한 것이었다.

그에게 어떤 선물을 해야 할까? 한참이나 고민해보았지만, 도무지 선택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 것은 잘만 골랐는데. 내가 받은 것이 너무 많아서, 나 또한 주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러나 무엇을 골라야 그가 좋아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왕이면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었다.

고급 부티크에도 들어가 보고, 시계 상점과 보석 가게도 둘러보았지만 마땅한 것이 없었다. 이것들보다도 훨씬 비싸고 대단한 것들이 가득할 텐데.

문득 그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좋아하는 게 뭔지. 싫어하는 건 또 뭔지.

터덜터덜 걷다가 정신을 차리니 모르는 골목에 들어와 있었다.

‘여긴 어디지?’

그 골목을 끝까지 빠져나가자 처음 보는 장소에 도착했다. 내가 알던 세련된 상업지구가 아니라, 허름한 건물들이 줄지어 세워진 곳이었다.

‘잘못 들어 왔구나…!’

다시 골목을 빠져나가려던 내 뒤로, 여자 하나의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저 사람! 로또 당첨자야!”

나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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