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오늘 내 방에 같이 갈래요?”
“네?!”
나는 양팔을 교차해 감싸며 숨을 들이켰다. ‘그렇게나 빨리요?’라고 반문할 뻔한 것을 겨우 참고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그러자 카시안이 내 볼을 살짝 꼬집으며 놀리는 어조로 말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새, 생각이라뇨.”
“누가 잡아먹나. 엉큼하긴.”
그가 피식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살짝 헝클어뜨렸다.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요.”
“보여주고… 싶은 거요?”
민망해진 내가 눈을 질끈 감으며 탄식했다. 나 진짜 무슨 상상을 한 거야? 나는 카시안 모르게 손부채 질을 하며, 달아오른 낯을 식혔다.
언덕에서 내려간 우리는 곧장 저택으로 향했다. 나는 카시안을 뒤따라 쭈뼛쭈뼛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문 앞에 착 달라붙어 멀뚱히 서서 그곳을 빠르게 둘러보았다.
‘아, 여기…….’
저번에 술 취했던 날이 떠올랐다. 창피한 마음에 카시안 몰래 여기서 나갔었는데. 그게 벌써 한 달도 전에 있던 일이라니….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의 야속함을 탓하고 있을 때, 침대에 걸터앉은 카시안이 자기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여기 와서 앉아요.”
그의 곁에 풀썩 앉자 매트리스가 살짝 울렁거렸다. 어쩐지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이자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직도 기억 안 나요?”
“뭐가요?”
그러자 카시안이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러더니 내 양팔을 들어 그의 목 뒤를 감싸도록 했다.
“공작님……?”
멀거니 나를 올려다보는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자, 그가 몸을 반만 일으켜 앞으로 기울였다. 그는 침대 위에 두 손을 짚고 단단하게 지탱했다.
그의 힘에 밀린 내가 침대 위로 풀썩 쓰러질 뻔했다. 깜짝 놀란 나는 그의 목을 감싼 내 손가락에 힘을 바짝 줬다. 깍지 낀 양손이 그를 옭아맬수록, 그의 숨결이 내 얼굴에 더욱 가까워졌다.
“이래도 기억 안 나요?”
“무, 무슨 말인지 모, 모르겠어요.”
“아쉽네.”
내 떨림이 그의 귓가에 전해질까 봐,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나 밀어낼 거예요?”
카시안이 물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사고 회로가 멈춰서 도무지 어떤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 순간. 그의 입술이 내 이마 위로 닿았다가, 천천히 떨어졌다.
말을 잃은 내가 입을 뻐끔거리자 그가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예뻐서.”
살짝 웃은 카시안이 완전히 일어섰다. 잠시 창가 쪽으로 자리를 옮기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수차례 이마를 매만졌다. 딱 그의 입술이 닿은 부분만, 화상을 입은 듯 뜨거웠다.
다시 침대 가까이 돌아온 카시안이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의 손에는 갈색 액자 하나가 들려있었다.
‘저번에 뒤집혀 있어서 못 봤던 거다! 협탁 위에 올려있던 그거!’
나는 호기심이 들어 액자 안에 있는 그림을 살폈다. 색연필로 칠해진 그것은, 어린아이가 그린 듯 삐뚤빼뚤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영 묘했다.
예닐곱 즈음으로 보이는 그림 속의 아이는, 나와 정말 닮아있었다.
곱슬곱슬한 금발 머리, 새파란 눈동자. 희멀건 한 피부.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나랑 비슷했다.
나는 카시안에게 물었다.
“이게 누구예요?”
내 물음에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예전에 내가 말했던. 내가 정말 아끼던 사람이에요.”
그러자 그가 우리 집에 처음 왔을 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소중한 사람에게 주려고 그 집을 샀다고 했었지. 작고 귀여워서, 자꾸만 신경 쓰였다고.
작고 귀엽다는 말이…. 이렇게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거구나. …… 부럽네, 이 여자.
“되게 어릴 때부터 만나던 사이었나 봐요.”
내색하지 않으려 했으나 입이 저절로 쌜쭉하였다.
“… 어릴 때만 본 거예요.”
“네……?”
“딱 그 그림만 할 때. 그때 본 게 마지막이었어요.”
“아…….”
“우리 저번에 서로 비밀 하나씩 말하기로 했던 거 기억나요?”
내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그가 또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보육원에서 자랐어요.”
물끄러미 그림을 만지작거리던 나는, 고개를 들어 카시안을 바라보았다. 보육원이라니…. 전혀 예상 밖의 이야기였다.
“세 살 때였나, 네 살 때였나. 나를 낳은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거기에 갔어요. 버려진 거지. 웃기게도, 모친 얼굴은 기억이 안 나는데 그 상황은 아직도 또렷해.”
“…….”
“그날은 비가 왔고, 또 추웠어요. 어머니와 나는 검은색 작은 우산을 쓰고 걸었어요. 빗물이 다 튀어서 내 바짓자락이 다 젖었는데.”
“네…….”
“엄마는 어깨가 다 젖었고.”
카시안은 슬프게 웃었다.
“그런데 보육원 입구에서, 그 우산마저 나한테 쥐여 주더라? 참나. 어차피 버릴 거면서.”
“…….”
“자기가 쓰고 갈 것이지…….”
한 마디 한 마디 내뱉는 그가 힘겨워 보여서, 나는 그의 어깨를 연신 쓰다듬었다. 그는 그런 나를 보며 희미한 미소를 내보였다.
“거기서 아무랑 말도 안 섞고 지내던 어느 날, 이 아이가 왔어요. 진짜 조그맣고 사랑스러운 아이가. 저보다 조금 더 커다란 바구니에 담겨서.”
“… 이 애는…. 아기일 때 버려졌나 봐요.”
나는 그림 속 아이의 얼굴을 엄지손가락으로 쓱 훑었다.
“네.”
너도 참 안타깝구나.
“그렇게 아이도 나도 함께 자랐는데. 그랬는데….”
카시안의 목소리가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나 때문에… 다쳤어요. 그러니까 다 나 때문에, 내가…, 내가 잘못해서. 그 애가… 결국 죽게 된 거야.”
“…….”
“내가 그때… 마법만 안 썼어도.”
그가 자기 손바닥을 펼쳐 멀거니 응시했다. 그의 손은 세차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 손을 꼭 잡았다. 그래도 그의 떨림이 멈추질 않자, 아까 그가 했던 것처럼 그의 앞에 섰다. 그리고 허리를 낮춰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공작님 때문이 아니에요.”
그를 끌어안자 귓가에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듯. 그는 숨을 참고 있었다. 나는 그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아프지 마요.”
“…….”
“그러면 나도 아픈 것 같아.”
그 말에 그가 나를 힘주어 안았다. 우리는 한참이나 그렇게 있었다. 창 틈새로 비치는 달빛이 점차 흐려질 때까지.
*
아침이 밝았다.
어쩐지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눈두덩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고 있을 즈음, 낸시가 노크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그녀는 기겁하며 놀랐다.
“시아라 아가씨! 밤사이 무슨 일 있으셨던 거예요!”
“낸시…….”
“설마 괴한이 들이닥쳤나요?”
“그럴 리가.”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했다.
“아니 그럼 대체 왜…….”
그녀는 퉁퉁 부은 내 얼굴 위로 물에 적신 수건을 가져다 댔다. 그것을 몇 번이고 반복하던 그녀가 툴툴거리며 잔소리했다.
“이제 곧 출발하실 텐데. 이런 얼굴로 떠나시면 다들 걱정할 거예요.”
입술을 삐죽거리는 그녀를 향해 나는 그냥 웃어 보였다.
“미안해.”
“그렇다고 저한테 사과하시면 어떻게 해요! 어휴, 정말……!”
핀잔을 늘어놓는 그녀를 가볍게 안아준 뒤에, 카시안의 안부를 물었다.
“앗, 그러고 보니 공작님께서는 아직도 안 일어나셨네요?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채비를 마친 나는 3층 그의 침실로 향했다. 아직도 자고 있으려나? 설마 불쑥 찾아왔다고 싫어하진 않겠지?
나는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한참이 지나도 아무 말이 없기에, 조용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공작님-. 주무세요?”
들려오는 답이 없어 돌아선 순간, 내 등에서 철컥 문이 열렸다. 나는 다시 뒤를 돌아보려다가, 내 어깨를 감싸 안는 팔에 갇혀버렸다.
“잘 잤어요?”
“아직 주무시는 줄 알았어요.”
“목소리 듣고 일어났어요.”
“저는 잘 잤어요. 공작님은요?”
“나도.”
목덜미 위로 그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
“벌써 준비도 다 마쳤네. 그렇게 빨리 집에 가고 싶은가.”
“아이참. 그런 게 아닌 거 잘 아시면서.”
나는 그의 팔을 풀고 뒤돌아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어! 공작님 눈 퉁퉁 부은 것 좀 봐!”
“자기는 뭐 안 그런 줄 아나.”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우리는 푸흐흡 웃음을 터뜨렸다.
아델트 저택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감사 인사를 전하고, 밖으로 나왔다. 나는 대기 중인 마차에 카시안의 손을 잡고 올라탔다.
이제 막 마차가 출발하려는데, 다들 밖으로 나와서 나를 배웅했다. 특히 알버트와 낸시는, 누가 더 많이 우는지 경쟁이라도 하듯 토끼 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나는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마차의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흔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집이다! 드디어 집이야!
나는 대문을 열고 만세를 부르며 환호를 내질렀다.
그러자 카시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집은 언제 망가졌었냐는 듯 말끔히 수리되어 있었다. 처음 이사 왔을 때처럼 새집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그러나 카시안의 얼굴에는 여전한 근심 걱정이 서려 있었다.
그는 대문의 걸쇠를 잡고 흔들어보고, 현관문의 잠금장치를 시험하고. 창문 또한 아무 이상 없음을 연거푸 확인했다. 그럼에도 못 미더운지 방안 구석구석을 꼼꼼히 살폈다.
나는 검이 전시된 방문을 열어 그에게 보여주었다.
“이것 봐요. 저 누가 불쑥 쳐들어와도, 무기 엄청 많아요. 나 되게 씩씩한 사람인데-.”
“그때는 뭐 이런 거 없었나.”
“그거야, 그때는 드레스룸에 갇혀 있었으니까 그런 거예요.”
“흐음…….”
“그리고 이 팔찌도 잘 있잖아요.”
나는 팔찌를 차고 있는 팔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팔짱을 낀 채로 미간을 찌푸리던 그가 넌지시 물었다.
“나도 그냥 여기서 살까?”
“네?”
“그게 좋을 것 같아.”
“아,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나는 그의 등을 떠밀어 다시 돌려보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혼자가 되었다.
물론 그와 같이 있는 시간이 분에 넘치게 좋았지만. 가끔 이런 날도 필요한 법이니까!
나는 곧바로 침실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침대 위로 펄쩍 뛰어 올라가 그대로 누웠다. 입고 있던 원피스 치맛자락이 이불처럼 쫙 펼쳐졌다. 아늑하고 포근한 내 집…….
팔다리를 쭉쭉 늘려 뻗었다. 그동안 저택에서 있었던 일이 꿈만 같았다. 특히 어제는….
떠올리자 다시 귓바퀴가 달아올라서,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내일부터는 뭘 하지?’
나는 머릿속으로 계획을 세워보았다. 일단 아델트 저택 사람들에게 줄 선물을 고르고. 레아랑 레오랑 놀아줘야겠다. 참, 곧 로지 아줌마도 만나러 가야지. 그나저나 편지는 잘 도착했을까?
그리고 또…. 한나의 케이크부터 먹어야겠다. 달콤한 초코케이크. 내일 당장 먹으러 가야지.
나는 깊은 단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