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내 머리 뒤에서 들려오는 카시안의 목소리에 나는 토끼 눈을 떴다. 바짝 긴장해서 자세까지 고쳐 앉았다. 아까 내 방에서 있었던 일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맨날 집무실에만 계시던 분이 여긴 또 어쩐 일로 오셨나요?”
“볼 일이 있어서.”
“어라? 어디 가십니까?”
“아니. 여기야, 내 볼 일.”
그러면서 그가 알버트의 옆에 자리 잡았다. 내 맞은편에 앉은 카시안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혹시 아직도 기분이 안 좋으면 어쩌지? 그러니까 왜 솔직하게 말하지 못해서는.
나는 혼자 애태우며 끙끙대다가, 이내 그와 마주했다.
카시안은….
나를 보자마자 웃었다.
좀 전의 걱정은 당치도 않다는 듯, 아주 말갛게 웃었다.
‘아…….’
사실 내게 화를 낸다거나 퉁명스럽게 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과 다른 그의 웃음에, 나는 그대로 정지했다.
그가 저런 미소를 보일 때마다 가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잊게 된다. 전기에 오른 듯 찌릿찌릿하기도 했고. 작은 신발을 억지로 신은 것처럼 발가락이 곱아 들어가기도 했다.
언제부터인가는 그냥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간질거렸다. 문밖에서 풍겨오는 그의 머스크향 만으로도 어느새 미소짓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했다.
나는, 마음의 떨림을 깨닫지 못할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겁쟁이였다.
입으로 내뱉는 순간 변할까 봐. 그게 다 거짓일까 봐. 라튼 레트랑과의 첫 연애는 나를 이다지도 방어적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상처받지 않기 위해 애써 감춰놓은 그 작은 떨림이, 그가 한 번, 또 한 번 웃을 때마다 휘몰아쳐 왔다. 온몸을 뒤흔드는 커다란 파동이 되어 나를 덮치고 있었다.
그럴 때면 난 어쩔 줄 몰라 조바심이 난다. 말을 할까? 너무 설레고, 자꾸만 심장이 쿵쿵 뛴다고. 당신이 웃는 게 나를 미치게 한다고. 그렇게 말을 해볼까?
손발을 꼼질꼼질 거리던 나는 결국, 그의 시선을 피하고야 만다. 그리고는 그의 감정을 모르는 사람처럼 군다. 우리 사이에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오늘도, 내일도.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그를 대하겠지.
바보.
그때, 옆에서 가만히 내 안색을 살피던 소피아가 “어휴.” 하고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난데. 여기도 문제네, 큰 문제야.”
“앗. 엘링턴 영애. 가시려고요?”
여전히 혼자 들떠 있던 알버트가 그녀를 붙잡았다.
“아직 제 얘기 안 끝났습니다! 이런 연애코치는 뒷부분이 제일 중요하다고요!”
“충분해요. 밀어내라면서요? 그 정도는 껌이거든요? 그것도 못하면 바보지. 누굴 바보로 아나.”
그 말과 함께 소피아는 펼쳤던 노트를 탁 접었다. 그리고는 쿨하게 인사하고 응접실을 나섰다. 그녀의 발걸음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당기는 게 제일 중요한데… 요….”
그러나 이미 소피아는 사라진 뒤였다. 그녀에게 닿지 못한 알버트의 마지막 조언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 이후에 방으로 올라와서도, 나는 소피아가 남기고 간 말을 되뇌었다.
‘그것도 못하면 바보지.’
바보. 바보야.
시아라.
너는 바보가 되고 싶은 거야?
마음속으로 묻자 고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아니, 아니야.
그런데 왜 자꾸 모자란 애처럼 굴어? 네 마음이 가는 대로 해. 언제까지 라튼 레트랑 핑계만 댈 거야?
‘핑계….’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쿵, 하고 울리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
내내 밤잠을 설친 것치고, 몸은 꽤 가벼웠다.
내일이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니까 오늘은, 아델트 저택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자 약속했던 파티가 있는 당일이었다. 파티라고 해봐야 조촐한 저녁 식사였지만.
한나와 파울에게는 미리 답장이 왔다. 파울이 또 수도로 내려간 탓에 자신들은 참석하지 못하지만, 레오와 레아를 부탁한다고. 퍽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귀여운 꼬맹이들은 볼 수 있다는 거니까!
친구들을 볼 생각에 신난 내가 방을 부산스럽게 돌아다녔다. 그러자 낸시가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며 울상을 지었다.
“시아라 아가씨. 오늘 밤이 지나면 저랑 헤어지는데. 그렇게 좋으세요?”
“낸시, 그건 당연히 슬프지!”
“또 오실 거죠?”
“응! 내가 맛있는 간식들 잔뜩 사서 올게.”
나는 낸시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그러자 그녀도 나를 꼭 끌어안았다. 고작 2주 만에 이렇게 정이 들다니. 집에 가는 것은 좋지만 낸시를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헛헛했다.
나는 거의 뛰다시피 계단을 내려갔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아침부터 카시안이 궁금했을 뿐. 밤새워 뒤척이던 나는, 내 마음에 조금 더 솔직해지기로 했다.
그러나 카시안은 식당에 보이지 않았다. 조금 시무룩해져 알버트에게 묻자 이른 새벽부터 외출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새벽에요?”
“사냥을 다녀오신다고 했거든요.”
“사냥? 갑자기 웬 사냥을 가요?”
“그러게 말입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갑자기 저러시는지, 원.”
점심이 지난 무렵부터 저택의 하인들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나도 그들을 돕기 위해 정원으로 나갔다.
“아니요, 아가씨는 가만 계세요.”
그러나 낸시가 손사래를 치며 만류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꽃 몇 송이로 테이블을 장식하는 것뿐이었다.
약속한 시각이 되자 마차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거리가 있었지만, 마차에서 내리는 꼬맹이들과 펠릭스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에는 펠릭스의 양손을 잡고 걷던 레아와 레오가, 손을 흔드는 나를 보며 와다다다 달려왔다. 그리고는 내 품에 풀썩 안겼다.
아이들은 쑥쑥 자란다더니. 안 본 사이에 벌써 키가 한 뼘이나 더 큰 것 같았다.
“잘 있었어?”
“시아라 언니! 보고 싶었어!”
“누나. 나도! 나도 진짜 진짜로 많이 보고 싶었어!”
“나도 레아랑 레오 생각 많이 했어.”
귀여운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펠릭스가 성큼 다가왔다.
“나도?”
“너는 뭐?”
“나는 안 보고 싶었어?”
나는 피식 웃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글쎄. 확실히 지금은 레아랑 레오 밖에 안 보이긴 했지. 분발하셔야겠어요, 펠릭스 씨!”
“뭐어?”
“푸흡. 장난이야. 참, 유모는 요즘 어떠셔?”
내 물음에 펠릭스의 낯빛이 잠시간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는 또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훨씬 좋아졌어.”
“그래? 다행이다. 나 내일이면 집에 돌아가니까, 한 번 병원에 갈게. 같이 가는 게 좋겠지?”
“뭐… 알겠어. 그런데, 누나야말로 괜찮은 거야? 도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며칠 내내 코빼기도 안 보이지, 집은 계속 잠겨있지.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사라진 나를 생각했다 말하는 펠릭스가 기특해 그의 팔을 두어 번 툭툭 두드렸다.
“기분 좋네. 나 걱정해주는 사람도 있고.”
괜히 너스레를 떨자 그가 입술을 빼죽 내밀었다.
“이렇게 누나 챙겨주는 사람은 아마 나밖에 없을 걸?”
“그래 맞아, 고마워.”
웃으며 대화를 마무리하는데, 우리 주변에서 갑자기 이상한 검은 기운이 느껴졌다. 유령이라도 지나간 듯 써늘했고 묘했다.
“뭐야…?”
두리번거려도 이상한 것이 없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별안간, 뒤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이….”
“소피아?”
그녀는 커다란 나무 뒤에 숨어서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있었다.
“거기서 뭐 해? 얼른 나와.”
그러자 소피아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평소와 아주 다른 모습이었다. 화장기 없이 수수했던 눈은 잉크로 그린 듯 쫙 치켜 올라갔고, 한 올 한 올 추어올린 속눈썹은 소금쟁이 다리를 보는듯했다. 입술 역시 공포 연극에서나 볼 듯 검붉었다.
조금…. 아주 조금 무서웠다. 힘주어 차려입은 검은색 원피스 탓에 더욱 그래 보였다.
그녀는 내 곁으로 쪼르르 다가와 귀엣말했다.
“오늘 아주 확실히 밀어버릴 거예요.”
그 말에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나는 그저 “제발, 적당히. 응?” 하며 그녀를 말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녀는 굉장히 단호했다.
펠릭스는 소피아가 나타나자 당황했다. “엥?” 하고 한쪽 눈을 찡그리는 것으로 보아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게 분명했다.
“소피아 엘링턴? 저 여자가 왜 여기에…!”
“응. 내 친구야.”
“뭐?”
“얼른 앉자!”
나는 레아와 레오의 손을 잡고 준비된 테이블에 앉혔다. 그러나 손님들이 다 왔음에도, 카시안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알버트에게 걱정스레 묻자 그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답했다.
“아, 이제 오셨네요.”
카시안이 도착한 걸 향기로 아나? 의아함도 잠시, 곧이어 그가 나타났다. 정말로 사냥을 왔는지 한쪽 어깨에는 사슴으로 보이는 커다란 짐승이 들린 채였다.
‘저걸 어떻게 한 손으로 들어?’
그러다가 그가 마법사라는 것을 깨닫고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라는 거. 진짜 별 걸 다할 수 있나 보네. 나중에는 막 하늘의 별도 따오고 그러는 거 아니야? 나는 내심 감탄했다.
“다들 도착한 건가?”
서로 인사를 나눈 뒤에 우리는 모두 자리에 앉았다. 카시안의 옆에 내가, 그리고 내 옆으로 나란히 쌍둥이가 앉고. 펠릭스와 소피아는 우리 맞은편에 앉았다.
잠시 후 음식이 속속들이 나오기 시작하자 카시안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거만하게 고개를 까딱거리기도 했다.
“아, 거기 친구. 이거 내가 직접 잡아 온 거야.”
“네. 고생하셨겠네요.”
“전혀. 난 누구랑 달리 활을 잘 쏴서.”
그러자 펠릭스가 신물 난다는 듯 입술을 비틀었다.
“아, 예. 물론 그러시겠죠. 땅속에 파묻혀도 살아남은 분이신데.”
“그렇지. 많이 먹어. 친구.”
카시안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답했다. 그러나 펠릭스는 투덜대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내가 이걸 먹나 봐라.” 그러면서 정말로 고기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입술에 단단히 힘을 준 소피아가 펠릭스를 흘겨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새침하게 말했다.
“혹시 베지테리안이세요? 그럼 이거 드시던가요!”
그와 동시에 그의 접시에 상추 한 장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 으어?”
맞은편에 앉은 모두의 입이 동시에 벌어졌다. 누군가 “얼음!”하고 외친 것 같았다. 펠릭스는 제 접시에 올려있는 상추와 소피아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경악한 모두가 탄식을 내뱉었다. 그 와중에 레오와 레아가 키득거리며 맞은편 두 사람에게 말했다.
“우리 형아 고기 완전 좋아하는데!”
“헤헷. 언니 바보.”
빙그르르 굴러가던 내 눈동자가 알버트에게 가서 닿았다. 그는 연신 뒷머리를 박박 긁으며 내 눈을 피했다.
소피아 엘링턴….
한 번에 의대에 들어갈 정도로 대단한 학습 능력을 갖춘 그녀는, 당기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발로 뻥- 차버리는 법만 알고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