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아주 평온한 날이 이어졌다.
알버트는 어떤 문제가 있건 앞장서서 내 편을 들었다. 말끝마다 “우리는 민트파니까요.”라는 말을 붙이며 나와의 유대를 강조했다.
그러다가 문득 궁금해진 내가 물었다.
“또 누가 있는데요?”
“저랑 시아라 양 둘 뿐입니다.”
“아아…. 그렇구나….”
사실 나는 녹차건 민트건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알버트는 내 뒤를 강아지처럼 쫄래쫄래 쫓아다녔다. 그는 카시안 보다도 내 옆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밥을 먹을 때에도 바로 옆에 앉아 내 접시에 음식을 푸짐하게 덜어주고, 산책하러 나갈 때는 양산을 쥐여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물며 카시안과 단둘이 이야기를 할 때도 그 사이로 얼굴을 내놓고 끼어들었다.
나는 그게 싫지 않았다. 그렇다고 뿌듯하고 즐거운 것도 아니었지만.
그리도 나를 경계하던 사람이 내가 마음을 활짝 열어주었는데 싫을 리가 있나. 오히려 마음을 써주는 것이 고마웠다.
그러나 카시안은 그렇지 않아 보였다. 그는 저 멀리서 알버트의 모습이 보이면, 얼굴부터 찌푸렸다. “하아-.”라며 깊은 탄식을 내뱉고 작게 욕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지금도 2층 복도에서 카시안과 함께 파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때 갑자기 계단을 성큼성큼 오르는 알버트의 머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두리번거리는 양이 먹이를 찾는 하이에나 같았다.
“저게 또…. 방으로 들어가서 얘기해요.”
카시안이 내 방문을 열었다. 들어가서 문을 닫으려는 찰나, 알버트가 문 틈새로 손을 탁 집어넣었다.
“어어! 잠깐! 저도 들어가겠습니다.”
“니가 여길 왜 들어와?”
“왜 그리도 당연한 걸 물으십니까?”
“뭐가 당연해?”
“각하랑 토끼 같은 시아라 양을 어찌 단둘이 한 방에 두나요?”
“…….”
“저는 아주 철저한 사람입니다.”
카시안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나가.”
“아니요! 시아라 양은 절 내쫓지 않을 겁니다!”
나는 고개를 숙여 그에게 인사했다.
“이따 뵈어요, 알버트 님.”
“크으윽! 어찌 제게……. 조심하세요. 각하는 시아라 양이 생각하는 것처럼 순진한…. 크헉.”
카시안은 알버트를 복도로 내던지고 문을 쾅 닫아버렸다. 그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투덜거렸다.
“마음에 안 들어.”
“네…?”
“저 새끼 저러는 거. 자꾸만 받아주지 마요. 버릇 들어.”
“… 아니 저번에는 나쁜 사람 아니라고 그러시더니….”
“아 그거야…!”
이내 답답하다는 듯 머리를 털었다.
“질투 나요.”
“네… 에…?”
“자꾸 알버트랑 있으니까. 질투 나서 미치겠어.”
그는 심각하게 말했지만 나는 쿡 웃음이 나왔다.
“그게 뭐예요 정말. 어린애도 아니고.”
“시아라….”
카시안이 낮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네, 공작님.”
“내가 다른 여자랑 단둘이 있어도 아무렇지 않아요?”
“… 그런 건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지금 생각해봐요.”
카시안이 여자와 단둘이?
사실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까. 아니지. 한 번 있었구나. 엘리나 트리탄과 함께 있을 때 숲속에서 마주쳤었지?
죽은 사람을 떠올리는 것이 께름칙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때의 감정은 확실히 기억났다.
엘리나가 너무 못된 여자였기에. 카시안이 그런 여자를 만나는 것이 싫었다.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면 싫을 것 같아요.”
“좋은 사람이면?”
“으음…. 그건 제가 어쩔 수 없죠. 말 그대로 좋은 사람이잖아요.”
“하아아……. 시아라. 나는….”
무언가 말하려던 카시안이 그저 입을 달싹거리다가 이내 눈을 감았다.
“아니에요. 이만 쉬어요.”
나는 문을 닫고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가 사라지고, 그대로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다른 여자와 있으면 어떻겠냐니.
그런 걸 왜 물어볼까.
당연히 싫은데.
내가 잘못한 걸까? 괜스레 마음이 울적해졌다.
*
틸다 레트랑의 호위기사 아리안은 말츠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 있었다.
분명 봄이 왔다. 강가에는 분홍 벚나무가 만개했고 초록 잔디는 무성하게 자라났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얇아졌으며 거리마다 봄을 축복하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추웠다. 특히 이 다리 위에 서 있을 때면, 심장에 서릿발이 내려앉은 것처럼 얼어붙는 듯했다.
죄책감일까, 아니면 불안함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혹은 두려움일지도.
또 한 번 차갑고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리 건너편에서 그의 밑에서 일하는 기사 하나가 달려왔다. 다급하게 오는 것을 보아하니 전달할 소식이 있는 모양이다.
“대장님!”
“루카스, 무슨 일이야?”
“드디어 편지가 왔습니다! 역시 잡화점 앞에서 몇 달째 기다린 보람이 있군요!”
루카스는 마침내 걷어 올린 수확에 만족한 듯 편지봉투를 건넸다. 반면에 아리안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봉투를 살폈다.
겉면에는 ‘시아라’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틸다 레트랑이 내내 찾던 그녀의 이름이.
“수고했어. 이만 들어가 봐.”
“네? 대장님은 같이 안 가시나요?”
“바로 갈 거야.”
“알겠습니다.”
아리안은 편지를 뜯어 내용물을 살폈다. 정성스럽고 빽빽하게 적힌 글씨를 읽어 내려가던 그가 결국 거친 신음을 토해냈다.
그는 멍하니 강 아래를 응시했다.
“… 미안합니다. 용서하십시오.”
시아라의 편지를 구겨 겉옷 안주머니에 넣은 아리안이 레트랑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곧장 틸다 레트랑을 찾아갔다. 그녀는 홀로 응접실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마님.”
아리안의 부름에 틸다가 휙 고개를 들었다. 원래도 표독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얼마 전 라튼 레트랑의 일까지 더해져 더욱이 사나웠다.
“뭐야?”
“전해드릴 게 있습니다.”
그녀의 호위가 편지를 건네자 틸다가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시아라 양이 보낸 편지입니다.”
“그게 정말이야?”
“예.”
틸다 레트랑이 재빠르게 편지를 빼앗아 들었다.
“나가 봐.”
“예.”
응접실을 나가는 아리안의 뒤로 다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참, 아델트는 언제 간다고?”
“나흘 뒤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래. 이 계집애를 처리하는 건 그다음에 얘기하자고.”
그는 고개 숙여 인사하고 복도로 나왔다. 뚜벅뚜벅 걸어가는데 뒤에서 그를 부르는 중저음이 들려왔다.
“아리안.”
라튼 레트랑이었다.
“너 그게 사실이야?”
“무슨 말씀이신지.”
“방금 루카스한테 들었어. 편지 왔다는 거. 그거 진짜 시아라한테 온 거냐고.”
“예.”
“너 미쳤어?”
라튼이 험악한 인상으로 물었다.
“그걸 엄마한테 주면 걔가 어떻게 될지 뻔한데. 제정신이야?”
“… 저는 할 일을 했을 뿐이지요. 마님께서 도련님 걱정이 많으십니다. 다시 밖으로 나가셔야죠.”
그 말에 라튼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미친 새끼.” 그러더니 붉은 눈을 치떴다.
“앞으로는 다 나한테 말해. 그 애랑 관련된 전부다. 빠짐없이.”
그러나 아리안은 무감하게 답했다.
“저는 마님이 고용한 기사입니다. 시키시는 일을 거절할 순 없습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라튼 레트랑은 씩씩거리며 머리를 박박 긁었다.
*
카시안이 나간 이후 혼자 방에 누워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주무세요?”
“아니요. 들어와요, 낸시.”
그녀가 얼굴을 빼꼼 내밀고 내게 말했다.
“소피아 엘링턴 아가씨께서 방문하셨어요. 아가씨를 뵙고 싶으시대요.”
“앗! 소피아가요?”
나는 서둘러 일 층으로 내려갔다. 낸시의 말대로 응접실에는 소피아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안색은 오늘따라 더욱 창백했다. 어깨도 축 처진 것이 평소와 달리 의기소침해 보였다.
“소피아?”
“… 언니이….”
그녀가 힘없는 목소리로 내 어깨에 풀썩 기댔다.
“무슨 일 있어?”
“얼마 전에 펠릭스를 만났는데….”
“응.”
“뭔가 단단히 오해한 것 같아요.”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오해? 무슨 오해를?”
우리가 소파에 앉자 낸시가 따뜻한 차를 내왔다. 소피아를 달래고 이야기를 들으려던 찰나, 복도를 지나가던 알버트가 나와 소피아를 보고 응접실로 들어왔다.
“시아라 양. 여기 계셨군요. 아까는 별일 없으셨나요?”
“네. 아무 일도 없었어요.”
“다행이군요! 아니 그보다. 엘링턴 영애는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보이시나요?”
알버트가 허리를 굽혀 소피아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으신가요?”
“네.”
“혹시 무슨 고민이라도?”
소피아는 고개를 절레 저었다. 나 역시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그러자 알버트가 손가락으로 제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아, 감이 옵니다. 감이 와요. 제 머리가 비상하게 움직이고 있어요.”
그가 유난을 떨자, 나와 소피아는 동시에 그를 바라보았다.
“이건 연애문제군요!”
그 소리에 놀란 소피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어떻게 아셨어요?”
“척 보면 척입니다. 제가 이런 쪽에는 전문가라.”
알버트는 어느새 맞은편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낸시, 나도 차 한잔 부탁해.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네.”
잠시 후 낸시가 차를 내오자 그가 여유롭게 한쪽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가 너무 자신만만해 보여서 나는 내심 불안하긴 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그만두라고 할 수도 없고…. 일단 알버트의 조언을 들어보기로 했다.
“그럼 시작해 보도록 하죠.”
한참을 고민하던 소피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예.”
“엊그제 처음 대화를 나눠봤어요.”
“오호라. 예.”
“그런데…. 저한테 화를 냈어요.”
그녀의 말에 나도 덩달아 놀랐다.
“뭐어? 펠릭스가 화를 냈어?”
“그게… 오해를 한 것 같아요. 아마 저를 병원 직원으로 착각한 모양이에요. 병원비 문제로 많이 시달렸을 걸 아니까. 그래서 예민하게 반응했을 거라는 거 아는데, 그래도….”
소피아가 고개를 떨구며 마른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알버트가 자신의 턱을 매만지며 심각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제가 보기에는.”
“…….”
“이게 다 밀고 당기기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네?”
“사연을 들어보니 지금은 영애가 밀어야겠어요. 아주 확실히 밀어내야 합니다.”
“밀다뇨?”
소피아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노트와 펜이 들려있었다.
“타이밍을 잘 노린 뒤에. 아주 쌀쌀맞으면서도 다정하게 대해야 합니다.”
괴상망측한 조언에 내가 미간을 찌그러뜨렸다.
“그게 아닌 것 같은데요….”
그는 두 번째 손가락을 좌우로 요란하게 흔들었다.
“저로 말하자면. 아델트 공작 각하의 연애코치 경력도 있습니다.”
점점 그의 신뢰가 바닥으로 향하고 있을 때, 내 옆에서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각하?”
“누가 누굴 코치해.”
“그야 제가…!”
“넌 그냥 조용히 해.”
카시안이 갑자기 등장했다. 그 순간, 아까 그를 내쫓은 기분이 들어 괜스레 민망해졌다. 허공에서 허둥거리던 내 시선이 곧 그와 맞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