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카시안이 나가고 난 뒤에, 나는 책상 앞에 앉았다.
낸시에게 부탁해 편지지를 몇 장 받아와 초대장을 만들었다. 내 집도 아닌데 내가 사람을 초대하는 일이 조금 웃기기는 하였으나, 그래 봐야 전부 카시안이 아는 사람들이었다.
쌍둥이와 펠릭스. 아, 소피아한테도 전해줘야지. 그리고 또…. 한나랑 파울도 아이들과 같이 오면 좋을 텐데….
짧은 초대장을 작성하고 보니 편지지가 몇 장 남았다. 그러자 문득, 내가 진짜 편지를 보내야 할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로지 아줌마.
나는 제일 먼저 아줌마께 편지를 보내야 했다.
그간 이곳에서의 생활에 적응한다는 핑계로 잊고 있었다. 아줌마께 연락을 드린다는 것을.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나는 손가락을 말아 쥐고 내 머리를 콩콩 쥐어박았다.
까먹을 게 따로 있지!
사실 처음 도망쳐 왔을 때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연락을 드리지 못했다. 괜히 편지라도 보냈다가 위치가 발각되거나, 내가 로또 당첨자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나서 아줌마가 위험에 처할까 봐.
그래도 라튼에게 이미 사실을 밝혔고. – 물론 지금 그의 처지에 발설하고 돌아다닐 일은 없겠지만 – 벌써 수개월이 지났으니 이제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한 줄 한 줄 적어 내려가며 잡화점을 떠올렸다. 포근한 나무 향기가 나던 곳. 어리고 나약한 나를 자라게 했던 곳. 생각해보면 그곳이 나의 보호막이었다. 그리고 아줌마는 내 앞에서 방패를 들고 나를 지켰다. 아줌마의 남편 그렉 아저씨도 마찬가지로.
나는 그들을 회상하며 내친김에 수도에 갈 계획을 세워보았다. 기차를 타고 가서 잡화점에만 빠르게 들렀다 오는 거야.
‘집 공사가 마무리되는 대로 다녀와야겠어.’
단단히 마음을 먹고 다시 편지를 써 내려갔다. 내 상황을 전부 알려드리지는 못했지만, 잘 지내고 있다는 것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설명했다. 곧 가겠다는 말과 함께.
글씨가 빼곡히 적힌 종이 두 장을 반듯하게 접어 편지봉투에 넣었다. 아직도 익숙한 로지 잡화점의 주소를 적고 나서, 나는 고민했다.
‘우리 집 주소도 적는 게 좋을까?’
한참이나 생각하다가 결국 ‘아델트’라고만 적었다. 그러니까 이건 최후의 보루 같은 것이었다. 아줌마께 내가 있는 위치를 대략적으로도 알리면서, 만에 하나 이 편지가 잘못 가게 될 경우를 생각해서. 뭐, 그럴 일이야 있겠나 싶었지만, 집 주소가 깡그리 알려지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었다.
풀을 발라 봉투를 단단히 붙였을 즈음, 낸시가 방문을 두드렸다.
“시아라 아가씨.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네. 금방 갈게요.”
나는 곧장 식당으로 내려갔다.
카시안은 아직 내려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곳에는 알버트와 또 다른 남자가 있었다. 저번에 우리 집에 쌍둥이를 데리러 왔던 기사 렌이었다.
나는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렌은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시아라 양! 오늘 더 예쁘시네요.”
“감사합니다. 렌 경도 멋지세요.”
그가 하하하 웃으며 멋쩍은 듯 뒷머리를 매만지자 알버트가 투덜거렸다.
“예쁘긴 하다만….”
“네?”
“큼. 아닙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죠. 저희가 아주 심도 있는 토론 중이라.”
“네. 저 신경 쓰지 마시고 마음껏 하세요.”
“그럼 이만.”
내게서 고개를 홱 돌린 알버트는 얄미운 고양이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한 대 살짝 쥐어박고 싶었다. 그래도 어제나 오늘 낮 보다는 훨씬 좋아졌으니까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나 자신을 위로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던가. 씁쓸한 미소를 짓는데 두 사람의 언성이 점점 높아짐이 들렸다.
“아니 그걸 거기에 왜 붓냐고!”
“당연히 부어야지! 너는 도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목소리 톤으로 보아하니 두 사람은 정말 심각한 대화 중인 듯했다.
“이 미개한 기사 같으니라고. 너는 고기 튀김을 먹을 가치도 없어!”
“뭐? 이 멍청한 마법사가? 너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면서! 소스를 부어 먹는 게 맛있는 거거든?”
“하. 그러면 하나도 안 바삭하거든?”
“뭐래. 아주 입천장 다 나갈 일 있냐?”
“이 자식이?”
“지금 해보자는 거야?”
그래……. 심도 있는 대화가 맞았다. 두 사람은 벌떡 일어나 으르릉거렸다. 그러더니 동시에 고개를 돌려 내게 물었다.
“시아라 양은 어쩌시겠어요?”
“네?”
너무 진지한 물음에 나는 눈을 데굴데굴 굴려 식탁 위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기튀김과 달짝지근해 보이는 소스가 함께 올려있었다.
“소스를 부을까요? 아니면 찍어 먹을까요?”
알버트가 근엄한 목소리로 묻자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 그걸 꼭 제가 선택해야 하나요……?”
알버트와 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쯤 되자 누가 부어 먹는지, 누가 찍어 먹는지도 헷갈리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내가 원하는 대로 답했다.
“저, 저는…. 찌, 찍어 먹고 싶어요.”
그러자 알버트가 선홍빛 잇몸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 미소는 내가 본 것 중 가장 밝은 것이었다.
“역시. 믿고 있었습니다.”
렌은 눈을 꾹 감고 탄식했다. 그러더니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내가 편들어 주자 금세 의기양양해진 알버트가 큰소리로 그를 비웃었다.
‘… 이게 이럴 일인가?’
잠시 고민하던 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 그냥 접시에 덜어서 먹고 싶은 대로 먹으면 되지 않을까요?”
렌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짚으며 침울하게 말했다.
“그게 아닙니다.”
“네?”
“전제 자체가 틀린 거예요.”
“…….”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곧이어 카시안이 오고 나서야 우리는 함께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렌과 알버트는 그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서로 단단히 빈정 상한 모양이었다. 나는 혀를 끌끌 차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식사가 끝나자 하녀 하나가 내게 다가왔다.
“아가씨. 녹차를 드릴까요? 아니면 민트차도 있답니다.”
방금 기름진 고기를 먹었으니 개운한 민트차가 좋겠지?
“민트로 주세요.”
그 말과 동시에 알버트가 벌떡 일어났다. 그는 고개를 뒤흔들며 연거푸 박수를 쳤다.
“세상에…….”
“또 무슨…….”
“시아라 양. 당신은 선택받았습니다.”
“예… 에……?”
“크흑. 민트파의 일원이 되신 것을 환영합니다.”
알버트는 입을 틀어막았다. 곧이어 두 팔을 벌려 나를 환영하는 제스쳐를 취했다.
“제가 그간 얼마나 외로웠는지 아무도 모를 거예요. 흐윽.”
그의 눈에서 반짝거리는 별이 쏟아져 내렸다.
나는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아……. 그냥 집에 가고 싶다…….
*
펠릭스는 요새 계속 병원에 살고 있었다. 그의 엄마 마리아가 폐렴까지 겹쳤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날이 좋다며 봉사자의 도움을 받아 휠체어를 타고 산책하러 다녀온 것이 화근이었다.
원래도 좋지 않았던 엄마의 안색이 더욱 파리해지자 그의 낯빛 역시 어두워졌다.
그 탓에 복용하는 약의 가짓수는 두 배 가까이 늘었고, 그녀가 눈을 뜨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엄마가 깨어나면 얼른 시아라를 만났다고 자랑하고 싶었는데. 그 한마디를 전하기가 참 쉽지 않았다.
엄마의 옆자리에 앉은 펠릭스가 그녀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아들의 머리카락을 사랑스럽게 넘겨주던 손이 이제는 빳빳하고 거칠었다. 손가락에 붙어있던 살점은 다 떨어져 나가 뼈만 보이는 듯했다.
펠릭스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엄마는 강한 사람이잖아. 일어날 수 있잖아. 얼른. 제발 일어나. 응?
매일매일 기도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누워있었다. 당장 죽더라도 이상할 게 없는 사람처럼.
엄마의 차가운 손을 꼭 부여잡고, 그가 혼잣말로 주절거렸다.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듣고 있을 거라 믿으면서.
“나 드디어 시아라 누나를 만났어, 엄마.”
“여전히 작아. 키도 작고, 몸집도 작아. 있잖아…. 내가 누나를 지켜줄 수 있을까?”
그녀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착각일 뿐이었지만.
“맞아…. 내가 지켜줄 거야. 그러니까 엄마는 그냥 일어나기만 하면 돼. 그래서 우리 다 같이 여행도 가고. 맛있는 것도 먹고…. 또…….”
참았던 눈물 한 방울이 그의 손 위로 떨어졌다. 그는 엄마의 팔을 베개 삼아 이마를 기댔다. 그러자 무너져 내리듯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것이 침대 시트를 흠뻑 적셨고 그의 어깨는 위아래로 흔들거렸다.
“그러니까 제발 좀…. 일어나….”
“제발…….”
그때, 문가에서 무언가 툭 바닥에 떨어지는 마찰음이 들렸다. 그가 곧장 뒤돌아 확인했으나 아무도 없었다.
옷소매로 눈물을 닦은 펠릭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으로 걸어가 병실 바깥을 두리번거렸다.
“뭐야….”
이상 없음을 확인하고 돌아서는 그의 발에, 무언가가 채였다. 명찰이었다.
“소피아 엘링턴?”
그의 예상이 맞다면, 이건 분명 그 여자의 것이었다.
정확히 하는 일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녀는 늘 병원 관계자들과 있었다. 그 사이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여자였다. 단정하게 머리를 틀어 올린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홀로 어두운 잿빛 단발머리. 그게 자꾸만 시선을 빼앗았으므로.
“뭐야. 또 이 여자야?”
꽤 오래전부터 펠릭스의 등 뒤에서는 늘 그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그 시선이 불편했다. 서둘러 병원비를 내라는 압박이 확실했으므로.
게다가 얼마 전 시아라의 도움으로 완납을 하지 않았던가. 펠릭스는 저 여자까지 이용해 독촉해대는 병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짜증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소피아를 찾아갔다. 그녀는 짐을 한 아름 안고 계단을 내려가려 하고 있었다.
펠릭스가 소피아를 멈춰 세웠다.
“저기요.”
그의 목소리에, 소피아가 놀란 듯 뒤돌았다.
“그쪽 맞죠? 소피아 엘링턴.”
“네…! 맞아요! 저에요, 소피아 엘링턴!”
“왜 자꾸만 눈치 주세요? 저 돈 다 냈어요.”
그러자 소피아 엘링턴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네……?”
“도망갈 일 없으니 감시 그만하라고.”
그가 그녀의 짐 위로 명찰을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았다.
단호한 펠릭스의 목소리에 소피아의 머리가 망치로 맞은 듯 정지했다. 하늘이 노래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그가 왜 이 명찰을 가졌는지 알 수 없었다. 왜 저한테 화를 내며 저런 말을 하는지도 당연히 알지 못했다.
“이걸 왜 그쪽이….”
그러나, 펠릭스가 이미 멀어진 뒤였기에. 소피아는 질문을 끝맺지 못했다. 무언가 단단히 오해를 산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계단 벽에 기대어 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겨우 한마디를 나눴는데. 그게 하필….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어깨라도 두드려줄걸.
소피아는 그가 내려놓은 명찰을 소중하게 들어 주머니에 넣었다. 나머지 짐을 가슴팍에 끌어안고 계단을 내려가는 그녀의 어깨 또한 자꾸만 아래로 축축 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