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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맞고 튀었는데 공작님이 집착한다-43화 (43/135)

43.

햇볕이 쨍쨍하게 내리쬐는 한낮의 정원. 이제 막 개화를 시작한 분홍장미들이 기분 좋은 향기를 내뿜었다.

나는 장미정원 앞에 놓인 벤치에 편하게 자리를 잡았다. 팔다리를 쭉 늘어뜨려 기지개를 켜고, 온 얼굴로 뜨거운 태양 빛을 맞이했다.

슬슬 얼굴에 열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꽃향기와 어우러진 포근한 햇빛 냄새가 퍽 마음에 들었다.

그때, 저쪽 구석에서 슬금슬금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곧 가까워졌다.

나는 무심하게 감고 있던 눈을 슬쩍 뜨고 곁눈질했다. 두세 걸음 떨어진 곳에 알버트가 있었다. 딱 예상한 대로였다. 다시 눈을 감고 모르는 척 시침을 떼자, 그가 큼큼 헛기침하며 중얼거렸다.

“레이디가 양산도 없이 저렇게 앉아있다니.”

“…….”

“큼! 햇빛만큼은 피부에 양보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거늘.”

나는 웃음을 꾹 참으며 그제야 그를 발견한 척했다.

“알버트 님!”

“얼굴이 벌써 새빨갛습니다. 어서 들어가시죠.”

“아…. 저는 이렇게 빛 쬐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신이 나서 그만….”

그는 못마땅한 듯 툴툴댔다.

“그러고 보니 알버트 님은 피부가 참 고우시네요? 어쩜 이렇게 도자기 같지? 혹시 따로 관리하시는 건가요?”

“…….”

“하얗고 뽀얗고…. 정말 매끈한 달걀이 따로 없네! 너무 부러워요.”

그러자 갑자기 알버트의 어깨가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양산을 쥐고 있던 손은 기쁨으로 떨리는 중이었다.

“드, 드디어. 제 노력을 인정해주시는 분을…!”

그러나 제 본분만은 잊지 않겠다는 듯, 재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했다.

“크흠! 어서 들어가시죠. 목욕시중 드는 하녀들에게 특별히 장미꽃잎을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거!”

알버트가 자신이 쓰고 있던 양산을 내게 내밀었다.

“이건 왜….”

“쓰고 가시죠! 피부가 그을리면 따갑습니다! 그럼 전 이만!”

그는 언제나처럼 제 할 말만 남기고 빠르게 사라졌다. 그러나 들썩거리는 뒷모습이 전과는 달라 보였다. 신나서 꼬리를 흔들며 달려가는 강아지 같기도 했다.

나는 알버트가 건네준 양산을 쓰고 장미정원을 마저 걸었다. 나도 모르게 푸스스 웃음이 지어졌다.

[“알버트는…. 못마땅해도 눈 딱 감고 칭찬 한마디만 해줘요. 그냥 ‘피부 참 좋네요.’ 이런 거. 대충 던져도 알아서 잘 물어요.”]

카시안은 조련의 왕이었다.

*

나는 홀로 정원 산책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다.

거울을 확인해보니 햇빛에 그을린 피부가 벌써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살갗이 따끔거려 주변에 있던 물컵을 얼굴에 가져다 대자 몸이 식는 기분이 들었다.

의자에 앉아 잠시 쉬고 있을 찰나,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시아라 아가씨. 안에 계세요?”

“낸시, 들어와요.”

아델트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 낸시였다. 그녀는 의자에 축 늘어진 나를 보더니 싱긋 웃었다.

“산책은 잘 다녀오셨나요?”

“네. 정원에 꽃이 많이 피어서 좋았어요.”

“아델트 저택의 장미정원은 황실의 정원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답니다. 아가씨가 이곳에서 머무시는 동안 예쁜 것만 보셨으면 좋겠어요.”

“고마워요, 낸시.”

“그럼 목욕부터 하시겠어요?”

그녀가 장미 꽃잎을 말려 만든 입욕제를 내게 보이며 물었다. 알버트가 정말로 부탁을 해놓은 모양이다. 물씬 느껴지는 그의 상냥함에 나는 작게 쿡 하고 미소지었다.

저번 무도회 때 나를 도왔던 낸시는 이번에도 내 채비를 도왔다. 나보다 약간 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 그녀는, 조금 수다스럽기는 해도 사람을 편하게 하는 법을 잘 알았다.

목욕을 거들거나 옷을 갈아입을 때와 같은 상황에서도, 내가 민망하지 않도록 적당한 주제의 말을 건네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동화책을 읽어주듯 부드럽고 나른했다. 그 때문에 낸시가 말을 많이 늘어놓아도, 거슬리는 것 하나 없이 오히려 기분 좋은 미소가 지어졌다.

가령 목욕을 마친 후 지금처럼 머리를 빗질해 줄 때는, 세심한 손길까지 더해져 까무룩 잠이 들 정도였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꾸벅 떨구자 낸시가 다정하게 물었다.

“아가씨. 많이 피곤하신가요?”

“낮에 햇볕을 많이 쬐어서 그런가 봐요. 목욕까지 했더니 몸이 나른해요.”

“저녁 식사 전까지 시간이 있으니까, 그동안 눈을 붙이셔도 괜찮아요.”

“괜찮아요.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내 대답에 그녀는 멈추었던 빗질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면서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덧붙였다.

“시아라 아가씨는 어딘지 낯이 익어요.”

“네? 제가요?”

“네. 분명 무도회 때 처음 뵈었는데…. 꼭 그 전에도 만난 적이 있던 것처럼요.”

그러나 내 기억에 낸시를 만난 적은 없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그래요? 혹시 길거리에서 마주쳤을까요?”

“으음….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분명히 이 곱슬거리는 금발 머리에 푸른 눈…….”

고민하던 낸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방문 앞에서 큼큼거리며 목을 가다듬는 소리가 났다. 누구라고 밝히지는 않았으나 그게 카시안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외출한다더니, 금방 돌아왔나 보다.

곧이어 그가 문을 두드렸다.

“네.”

“들어가도 괜찮아요?”

카시안의 물음에 나는 낸시를 올려다보았다. 이미 옷도 갈아입고 치장을 마친 상태였지만, 그래도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자 그녀가 내가 원하는 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망울은 호기심으로 똘망똘망 반짝거렸다.

“네, 들어오세요.”

방으로 들어온 카시안은 낸시가 함께 있을 거라고 예상 못 했는지 설핏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금방 다녀오셨네요?”

“일이 빨리 해결됐어요. 혼자 있을 줄 알았는데.”

그 말에 낸시가 조용히 방을 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카시안이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 나갈 필요 없어.”

낸시가 고개를 꾸벅 숙이자 카시안이 내게 작은 선물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밖에 나갔다가 맛있어 보이길래….”

투명한 케이스 안에는 형형색색의 쿠키가 들어있었다. 같은 쌍의 과자 사이에 크림이 풍성하게 발려진 과자는 보기만 해도 달콤했다.

“마카롱이라는 과자예요.”

“아…. 감사해요. 잘 먹을게요. 혹시 지금 먹어봐도 괜찮을까요?”

“얼마든지.”

매듭지어진 리본을 당겨 풀었다. 뚜껑을 열자 달짝지근하며 고소한 풍미가 풍겨 왔다. 내가 먼저 먹기 전에, 나는 초콜릿 크림이 발려진 마카롱을 들어 카시안에게 내밀었다.

“공작님도 하나 드세요.”

카시안은 그대로 멈춰 서서 눈만 껌뻑거렸다.

“아이참. 맛있는 건 나눠 먹어야 더 맛있으니까요.”

보다 못한 내가 마카롱을 카시안의 입 가까이 가져갔다. 그가 천천히 입을 벌리자 나는 그 안으로 마카롱을 쏙 집어넣었다.

그가 오물오물하자 낸시가 놀란 듯 말했다.

“공작님께서 과자를 드시다니요…!”

그 말에 내가 고개를 들어 낸시를 바라보았다.

“과자를 안 먹는 사람도 있나요?”

“아, 물론 저도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공작님께서는 단 음식을 싫어하셔서 입에도 안 대시거든요.”

낸시의 대답에 나는 당황해서 다급하게 물었다.

“앗…. 공작님. 혹시 드시기 싫었는데 억지로 드신 거예요?”

“아뇨. 나 하나 더 먹을 수 있는데.”

“네?”

“이번엔 분홍색 크림. 딸기 맛으로 줘요.”

아, 혹시 단 과자를 좋아하는데 그동안 숨겨왔던 건가?

나는 아예 선물상자 통째로 카시안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휘 내저었다.

“시아라가 줘요.”

“…….”

“얼른요.”

그가 아- 하고 입을 벌렸다. 나는 분홍색 마카롱을 들어 그의 입속에 넣어주었다. 만족스럽게 웃는 카시안을 보자 괜스레 민망해져 시선을 떨구었다.

낸시에게도 하나를 나눠주고 난 뒤에야 나도 한입을 베어 물었다. 설탕의 단맛이 머릿속에 지잉- 하고 울렸다.

‘카시안은 이걸 어떻게 딱 두 개만 먹은 거지?’

지금 당장 열 개라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맛있어요?”

나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카시안은 피식거리며 그제야 내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저는 이만 나가 볼게요. 이따 저녁 식사시간에 맞춰서 모시러 오겠습니다, 아가씨.”

낸시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방을 나갔다. 그녀가 나가자 카시안이 물었다.

“알버트가 아직도 괴롭혀요?”

“아니요! 공작님이 조언해주신 대로 했더니 훨씬 나아졌어요.”

“나쁜 마음으로 그러는 건 아니니까. 너무 미워하지 말아요.”

“하나도 안 미워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내게 양산과 말린 꽃잎을 건네주던 알버트가 미울 리가. 그러나 카시안은 내심 걱정이 되는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지내는 동안 하고 싶은 거 있어요?”

“아뇨, 없어요.”

하지만 곧장 부정한 것과는 달리, 머릿속에 몇 가지가 떠올랐다.

레오와 레아, 펠릭스를 본 지가 언제였더라. 매일매일 우리 집에 와서 지내던 친구들이었는데. 집이 망가진 이후에 이곳으로 곧장 온 터라, 소식조차 전하지를 못했다.

내가 그들이 그리운 것도 당연하지만, 그들도 나를 걱정하고 있지 않을까?

고민하는 나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는지, 카시안이 내 이마를 자신의 손가락으로 콕 눌렀다.

“알겠다.”

“뭐를요?”

“당신이 하고 싶은 거.”

“그런 거 없는데요….”

그러자 그가 맑은 미소를 그리며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우리 파티 할까요?”

“파티……?”

저번 무도회가 생각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한바탕 큰일이 휘몰아친 게 바로 얼마 전인데, 또 그럴 수는 없지.

“아뇨. 파티는 무슨. 괜찮아요.”

“지금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거 말고. 우리끼리 말이에요.”

“우리끼리요?”

“네. 그냥 친구들만 초대해서… 뭐, 저녁 식사. 그게 좋겠네요.”

“좋아요!”

나는 신이 나서 양 손뼉을 짝 치며 대답했다. 물끄러미 나를 보던 카시안이 내게 손을 뻗더니 잠시 머뭇거렸다. 내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그가 물었다.

“머리카락 만져도 괜찮아요?”

“네……?”

“열심히 빗었는데, 싫을까 봐.”

“괘, 괜찮아요.”

그러자 그가 내 머리카락을 부스스 쓰다듬었다.

“귀여워서.”

“…….”

“예쁘고.”

아까 따끔거리던 피부가 다시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귀까지 타들어 가는 기분에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벌떡 일어섰다.

“저, 저는 할 일이 생겨서요!”

“할 일?”

“초, 초대장을 쓸 거예요.”

“그렇게 해요. 아, 그 친구도 오려나?”

“그 친구요?”

“앞집 친구.”

펠릭스를 말하는 거겠지?

“초대해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얼마든지. 우린 다 친구니까.”

카시안이 흔쾌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순간 펠릭스가 일전에 “누나! 그 공작님 진짜 이상해!”라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으휴. 펠릭스도 참. 카시안이 이렇게 좋은 사람인 걸 모르고!’

펠릭스도 곧 알게 되겠지.

나는 카시안이 건네주었던 마카롱 한 개를 입속에 쏙 넣으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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