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내 팔에 딱 한 대 맞고 기절한 엘리나를 보며, 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진짜로…. 기절했다고?”
혹시라도 다시 일어나서 덤벼들지 않을까 싶어 그녀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그녀는 눈이 다 까뒤집혀진 채 입에 게거품까지 물고 있었다.
엘리나를 처리한 것에 안심할 새도 없이,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한참 동안 나오지 않자 엘리나의 호위들이 들이닥친 모양이었다.
심호흡하며 침착하게 마음을 가다듬었다.
서둘러 드레스룸의 문을 잠그고 무기가 될 만한 적당한 것을 살폈다. 하지만 암만 뒤져봐야, 이곳에서 건질 것은 오직 마법 팔찌뿐이었다.
나는 손목에다가 팔찌를 다시 찼다. 시험 삼아 쓰러져 있던 엘리나의 머리통을 손등으로 두드려 보았다.
계속 깡깡 소리가 나는 게 아무래도 이상했다. 심지어 내 손과 팔에는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거 설마….’
... 무쇠로 만들어주는 마법이야?
어느새 거실까지 진입한 남자들은 집을 뒤지며 우리를 찾고 있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등골이 서늘해지며 다리가 후들거렸다.
얼마 후, 누군가가 내가 있는 방문을 잡고 흔들었다.
“여기. 여기 있다!”
잠가놓은 문이 열리지 않자 그들은 문을 발로 걷어차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나무 문짝이 둥글게 휘는 것이 보였다.
나는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재빠르게 옷장 옆 좁은 틈새로 몸을 숨겼다.
펑! 하는 굉음과 함께 문이 뜯겨나갔다.
덜덜 떨리는 몸을 웅크려 끌어안고 숨소리가 들릴까 입을 틀어막았다. 공포가 엄습했다. 팔이 무쇠로 변한다 해도 사내 여럿이 덤벼드는 것은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남자 중 하나가 내가 숨어 있는 옷장 바로 옆까지 다가왔다.
저벅저벅 울리는 발소리에 나는 그냥 눈을 질끈 감았다.
무서워….
너무 무서워……!
그 순간, 내 앞으로 따뜻하고 익숙한 머스크향이 밀려왔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그가 있었다. 카시안 폰 아델트. 이 남자가 내 앞에 있었다.
“고, 공작님.”
“잠깐만. 귀 막고 있어요.”
카시안이 커다란 손으로 내 눈을 가렸다. 그러자 우두둑 소리와 함께 남자들이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눈가에 닿았던 온기가 멀어졌다.
“오늘도 노크를 못 하고 왔는데. 화낼 거예요?”
“… 지금은 그런 거 상관없거든요…!”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
“네. 멀쩡해요.”
카시안은 방을 살피다가, 쓰러진 엘리나를 보며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이런 일 겪게 해서 미안해요.”
“공작님이 왜 사과하세요. 저 여자가 이상한 건데.”
“그래도. 내가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무서웠죠.”
“… 아니에요. 이 팔찌 덕분에 무사했어요. 엘리나도 이걸로 때려잡은 걸요.”
“잘했어요.”
그가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나 삐죽 튀어나온 옆 머리카락을 귀에 걸던 카시안이 멈칫했다.
“이거….”
나는 손등으로 내 오른뺨을 쓸었다. 그러자 연한 피가 묻어나왔다.
“아…. 엘리나가 칼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카시안의 얼굴에서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던 그가 그대로 나를 품에 안았다.
“이제…. 이런 거 안 시킬게요. 다 내가 할게. 당신 얼굴에 피 한 방울 안 나게 약속할게.”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빠르고, 불규칙했다.
그러나 나는, 그게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
하루를 꼬박 기절했던 엘리나 트리탄이 드디어 눈을 떴다. 그러나 이전에는 본 적 없던 낯선 공간이었다.
그녀는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허리를 들어 올렸다. 온몸에 쇠로 두들겨 맞은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단단한 쇠창살이었다.
“뭐야. 이게 뭐야! 여기 어디냐고!”
그녀는 창살을 쥐고 흔들었다. 그러나 끄떡없었다. 답답함에 고성을 내질렀으나 들려오는 것은 메아리뿐이었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당장 안 열어? 당장 열라고!! 내가 누군 줄 알고!”
그때, 옆 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가씨? 엘리나 아가씨! 거기 계세요? 깨어나신 거예요?”
“… 아나스타샤?”
“네! 저예요! 아가씨가 왜 여기에…!”
엘리나는 창살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자 정말 아나스타샤의 얼굴이 보였다.
“지금 여기가 어딘데?”
“아델트 공작 저택의 지하감옥이에요.”
“뭐?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딴 곳엘 와! 가만, 그럼 너야말로 왜…….”
엄습한 불안감에 엘리나의 음성이 착 가라앉았다.
“… 설마 일이 잘 안된 거야?”
“저는 정말 하나도 모르겠어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저는 분명 계획대로 했는데…. 잘못한 건 그 귀족 영식분이에요!”
아나스타샤는 이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자신을 변호했다. 그녀의 고음에 엘리나가 피곤한 듯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머리는 쇠방망이로 맞은 것인지 쿵쿵 울렸다.
“하아…. 라튼 레트랑. 그 남자는 어디 갔어?”
“그분은… 따로 끌려가셨어요.”
“도대체 넌 일을 어떻게 했길래!”
“저는 정말 아무 잘못 없어요!”
“그럼 이게 다 누구때문…!”
엘리나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그들 앞으로 검은 그림자가 졌다.
“마침 깨어났네.”
낮은 저음이 지하감옥에 울렸다. 곧이어 아델트 공작의 얼굴을 마주한 엘리나의 두 동공이 놀란 듯 커졌다.
“부, 분명…, 공작님께서는 저택을 비우신다고…!”
카시안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아나스타샤가 있는 방향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자 엘리나가 크게 분노했다.
“저, 저…! 아나스타샤 저 멍청한 년이…!”
“에, 엘리나 아가씨. 지금 설마 저더러 욕을….”
“닥쳐!”
엘리나가 씩씩거리자 카시안이 알만하다는 듯 미소지었다.
“정말 우열을 가리기 힘든 조합이네.”
“… 공작님께서는 무슨 그따위 말씀을 하시나요?”
“자, 이제 두 사람이 더 깊은 대화를 나눠야 하지 않겠어?”
카시안이 턱짓했다. 그러자 그의 옆에 있던 기사 하나가 아나스타샤가 갇힌 감옥의 문을 열었다. 그곳에서 그녀를 끄집어내 엘리나와 같은 방에 가두고, 다시 문을 잠갔다.
“아델트 공작님. 지금 무슨 짓을 하시는 건지 알고 계신 건가요?”
“알지.”
“트리탄 가문은 이 사태를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 해봐. 난 괜찮을 것 같은데. 오랜만에 친우의 얼굴도 보고.”
엘리나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이만 두 사람은 밀린 대화를 하게 둬. 할 말이 많을 테니.”
그대로 뒤돌아 걷던 카시안이 잠시 걸음을 멈췄다.
“아, 이걸 까먹을 뻔했군.”
그는 주머니에서 단도를 꺼냈다. 엘리나 트리탄이 시아라에게 휘둘렀던 그 칼이었다. 그는 그것을 그들이 갇힌 방 한가운데에 던져 넣었다.
“기대할게.”
그 말을 마지막으로, 지하감옥에는 깊은 정적이 찾아왔다.
*
한 방에 갇힌 두 사람 사이에는 이렇다 할 말이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아까 전 엘리나의 모욕으로 자존심이 크게 상했다. 그러나 엘리나는 그녀가 상처를 받건 말건 알 바가 아니었다. 어쩜 이렇게 멍청할 수가 있는 건지!
한참의 침묵 후에 엘리나가 빈정거리며 물었다.
“내가 줬던 독은 어딨어?”
“… 아직 제 주머니에 있어요.”
“이리 줘봐.”
아나스타샤는 허리춤의 주머니를 뒤져 작은 유리병에 든 독약을 내밀었다.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면 루이자에게 사용하라고 엘리나가 건넸던 것이었다.
“왜 이걸 진작 안 쓴 거야?”
“그게…. 상황이 너무 갑작스럽게 돌아가서 정신 차릴 틈이 없었어요.”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해? 그럼 니가 마셨어야지! 뻔뻔하게 살아있는 것 좀 봐.”
커다란 배신감을 느낀 아나스타샤의 눈이 거세게 뒤흔들렸다.
“… 엘리나 아가씨. 어떻게 저더러 그런 소리를 하실 수 있으세요?”
“그럼 뭐, 네까짓 게 뭐라도 된 줄 알았니? 너 같은 걸 믿은 내가 등신이지!”
그녀는 웅웅 울리는 머리통을 부여잡고 짜증스레 일갈했다.
“너, 너무 하세요. 얼굴만 믿고 나서는 건 아가씨도 똑같잖아요!”
“그 입 안 닥쳐?”
그 뒤로 모든 일은 눈 깜짝할 새 일어났다. 분노한 엘리나는 독약이 든 유리병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는 거침없이 아나스타샤의 얼굴을 향해서 뿌렸다.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 거죽이 녹아 내려갔다. 찌릿찌릿 타들어 가는 감각에 눈을 뜰 수조차 없었다.
“아아아아악!!”
그녀는 고통 속에서 몸부림쳤다. 눈덩이 위의 살갗이 들러붙으며 눈앞이 점점 흐리멍덩해졌다.
“그냥 죽어! 쓸모없는 년!”
아나스타샤는 떠듬떠듬 바닥을 기었다. 그러자 서늘하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손가락을 스쳤다. 아까 아델트 공작이 던지고 갔던 엘리나의 단도였다.
그녀는 칼자루를 손에 쥐고 고개를 들었다. 의식이 흐려지고 있었지만, 자신이 믿고 따랐던 여자의 얼굴만큼은 아직 어슴푸레 보였다.
예리하고 반짝거리는 끝이 허공을 갈랐다.
“컥.”
단 한마디 비명과 함께, 엘리나 트리탄의 인생이 막을 내렸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죽음이었다.
*
나는 카시안의 집무실 소파에 앉아 차분하게 마음을 가다듬었다. 내 옆에 앉은 카시안이 괜찮다는 듯이 어깨를 토닥거렸다.
곧이어 라튼 레트랑이 나타났다.
그는 밧줄에 꽁꽁 묶인 채로 끌려와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나를 보자마자 라튼은 손등을 붙잡고 고통을 신음하며 꽥꽥거렸다.
“어떻게 된 건지 말해.”
“… 니가… 고, 공작의 약혼자 자리를 가로챘다고….”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왔다.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그런 소리를 믿게?”
“…….”
“진짜…. 너랑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돈은… 그럼 돈이 어디서 생긴 건데.”
“라튼.”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응시했다.
“나 로또 맞았다. 어쩔래?”
그 말에 라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옆에 있던 카시안의 시선도 나를 향했으나 그는 곧 담담하게 고개를 돌렸다.
“장난치지 마.”
“장난?”
나는 곧바로 주머니를 뒤져 챙겨온 영수증을 그의 면전에 집어 던졌다.
“너는 이게 장난 같아?”
종이가 팔랑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천천히 그 내용을 읽어가던 그의 표정이 더욱 단단하게 굳었다.
“말도 안 돼….”
“이제 니가 뭔 짓거리를 했는지 알겠어?”
그는 온몸을 덜덜 떨었다.
“알아들었으면, 사과해. 나쁜 놈아.”
“시, 시아라….”
“첫째, 싫다는 데도 내 몸에 손댄 거. 둘째, 나 미행해서 쫓아온 거. 셋째, 나더러 돈 받고 남자를 만나니 마니 헛소리 지껄인 거. 아직 한참 남았는데. 계속해?”
“그, 그건 서로 오해를….”
나는 마법 팔찌를 찬 손으로 그의 머리통을 찍어 눌렀다.
“아아악!”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래. 니 잘난 입에서는 나한테 미안하단 소리가 죽었다 깨어나도 안 나오겠지.”
나는 팔을 공중으로 한 번 더 높게 들었다.
그러자 라튼이 울부짖으며 애원했다.
“미안해! 내가 다 미안해. 제발. 때리지 마. 내가 잘못했어!”
지난 3년을 통틀어, 내가 라튼에게 처음으로 들은 사과였다.
… 생각할수록 더 열 받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