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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맞고 튀었는데 공작님이 집착한다-39화 (39/135)

39.

포승줄로 팔다리가 포박된 라튼 레트랑이 끌려온 곳은 공작의 집무실이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라튼 자신은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었다. 반면 아델트 공작에게서는 여실한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그는 소파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 투명한 유리잔을 들었다. 그 안에 든 갈색 위스키 한 모금을 입술에 적시며 반갑게 웃었다.

“왔어?”

라튼의 양팔을 붙들고 있던 기사 하나가 그의 무릎 뒤를 걷어차자 그가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아악!”

고통스러운 듯 내지르는 소리에 공작은 피식거리며 조소했다. 파도가 집어삼키듯 덮쳐오는 굴욕감에, 라튼이 부르르 치 떨었다.

“늦었네. 막 지루해지려던 참이었어.”

“이, 이게 무슨 무례입니까!”

“살인 미수로 잡혀 온 주제에 말이 많네.”

라튼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너한테 기회를 줄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너 같은 머저리 혼자 이따위 어처구니없는 계획을 세웠을 리도 없고. 네 뒤에 누가 있잖아. 안 그래?”

정곡을 찌르는 말에 라튼이 흠칫 놀랐다. 그러나 엘리나가 당부했던 말이 떠올랐다.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면, 저는 관련 없는 거랍니다. 이 모든 결정은 당신 혼자 내린 거니까요. 알아들으셨나요?”]

라튼 레트랑은 고민했다. 엘리나가 시킨 일이라고 실토하더라도, 직접 실행에 옮긴 사람은 그 자신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겠지.

그러다 엘리나 트리탄이 자신의 가문에 복수라도 한다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 분명했다. 일단은 선을 그어야 했다.

“그런 사람 없습니다.”

아델트 공작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말해 봐. 무슨 자신감으로 이런 짓을 했지? 멍청한 건가.”

그 물음에 라튼이 쌍심지를 켜고 악다구니를 썼다.

“다 당신 때문이잖아!”

기를 쓰고 소리를 지르자 옆에 서 있던 기사들이 그의 앞을 막고 나섰다.

“냅 둬. 계속해봐. 알아듣기 쉽게.”

“… 나는 그저…. 당신한테서 시아라를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런 거라고!”

카시안이 코웃음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에 딱지가 내려앉는 기분이네. 그 소리가 지겹지도 않나?”

“…….”

“그리고 니가 그녀를? 도대체 무슨 수로?”

라튼의 눈가에 시퍼런 실핏줄이 팽팽하게 내비쳤다.

“당신. 시아라한테 돈을 준 거야? 그래놓고 그 애를 그런 추문에 휩싸이게 한 거야?”

“그건 또 무슨 개소린지 모르겠네.”

“… 그 하녀가…! 당신과 시아라가 붙어 놀던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그랬다고! 그 여자의 무도회에서!”

그제야 카시안이 탄식을 내뱉었다.

“그 여자의 무도회라. 하긴, 네 모친도 그곳을 들락거리며 추잡하고 더러운 짓거리를 하고 다녔으니.”

그가 라튼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근데 누가 그래? 내가 거기 갔었다고. 엘리나 트리탄인가?”

“…….”

“그리고 시아라가 거기에 간다고 다 레트랑 부인처럼 행동할까?”

“… 그, 그건…!”

“레트랑 영식은 그녀를 모르나 보네.”

그 말이 라튼의 하찮은 자존심을 긁었다. 아까보다 차분하고 가라앉은 어조로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었다.

“저만큼 시아라를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전 그 애의 모든 걸. 심지어 비밀까지 전부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카시안은 느긋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의 코앞까지 가까워졌다. 주먹을 움켜쥔 라튼의 손을 내려다보니 아직도 제 발에 밟혔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이번엔 어딜 밟아줄까.”

“…….”

“아. 나불거리질 못하게 혀를 잘라 놓을까? 두 번 다시 그따위 소리를 하지 못하게끔.”

서릿발처럼 차가운 목소리에 라튼의 온몸에 털이 쭈뼛 곤두섰다.

“니가 아는 그녀의 비밀이 뭔지 관심 없거든.”

“저, 저번부터 도,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설마 진짜로 그 애를 좋아하시나요?”

“응, 맞아.”

카시안이 생긋 웃으며 저번에 밟았던 손등을 또 한 번 밟았다. 그러나 저번과는 차원이 다른 고통이었다. 살이 짓무르고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심지어 불에 타들어 가듯 뜨거웠다.

“… 끄아아악!”

“앞으로 그녀 곁에 다가갈 때마다, 지금처럼 고통스러울 거야. 그러다 살이 다 녹아 뼈만 남으면, 그때쯤 괜찮아지겠네. 아프면 잘라. 그럼 편하겠네.”

바닥을 뒹굴며 발버둥질하는 라튼에게 그가 상냥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너는 지금 안 죽어.”

고통을 신음하던 와중에도 그 소리에 정신을 붙들었다.

“… 요, 용서해주시는 건가요?”

“착각이 심하네. 너는 내가 안 죽인다는 말이야.”

“그게 무슨…!”

“널 죽이고 싶은 사람이 따로 있을 것 같거든.”

때마침 요란한 굉음이 카시안의 머릿속을 스쳤다.

“아, 저기도 일이 생겼네. 그럼 이만.”

*

나는 카시안이 손목에 채워준 팔찌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푸른색 오팔은 여전히 영롱하게 빛났다. 그러나 여기에 무슨 마법이 걸려있는 것인지 도무지 예상할 수 없었다.

“설마 내가 보이는 거 아니야?”

잠들기 전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려던 나는, 괜스레 민망해져 팔찌를 풀었다. 드레스룸 화장대 위에 그것을 올려두고, 욕실로 들어갔다.

모처럼 아기 분 냄새가 나는 입욕제를 풀어 여유롭게 목욕을 즐겼다. 포근한 향기가 코끝에 찌르르 풍겼다.

콧노래까지 불러가며 상쾌하게 머리를 말리는데,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거실로 나가 대문 너머를 확인해 보았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 밤에 올 사람이 있나?”

순간, 카시안에게 다음부터는 초인종을 누르고 들어오라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으음…. 아무리 그래도 설마 이 시간에?”

나는 입고 있던 옷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막 씻고 나와 가벼운 잠옷 차림이었다. 그러나 무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커다란 벨 소리는 쩌렁쩌렁 연달아 울렸다.

하는 수 없이 기다란 가운을 챙겨입고 급한 대로 정원으로 나갔다.

“누구세요?”

대문 앞에서 물었으나 대답이 없었다. 담장 너머로 고개를 살짝 내밀어 확인해 보았지만, 여전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나는 아예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주위를 두리번거린 뒤에 다시 문을 닫으려던 찰나, 골목에서 새까만 장정들이 튀어나왔다.

“… 뭐, 뭐예요?”

“잡아!”

당황한 내가 눈을 굴리며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자 그들의 뒤로 엘리나 트리탄이 보였다. 그녀는 뒷짐을 진 채로 사뿐사뿐 내게 다가왔다. 결 좋은 분홍 머리카락이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흔들렸다.

“마차로 끌고 가.”

그녀의 기사처럼 보이는 남자 두 명이 각각 내 팔을 붙들었다. 졸지에 허공에 둥둥 떠서 끌려가게 된 내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아, 안 돼요. 잠시만요. 잠깐!”

그러나 그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제발. 뭐라도 좀 생각해 봐!’

나는 아무 말이나 생각나는 대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제, 제 발로. 제가 직접 걸어갈게요. 네?”

그러나 소용없었다.

“아, 아무리 그래도 오, 옷을 좀 입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 차림으로 밖에 나갈 수는 없어요!”

내가 애타게 하소연하자 엘리나가 비웃었다.

“그래. 그 정도는 해야지. 아무리 몰락 귀족의 딸이래도, 아리따운 숙녀니까.”

나는 그 말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엘리나가 저걸 어떻게 알지?

“잠깐 여기서 기다려.”

엘리나는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린 뒤에 나를 보며 턱짓했다.

“뭐해? 들어가.”

그녀는 내 뒤를 따라 집으로 들어왔다. 그러더니 집 안 구석구석을 여유롭게 훑어보았다. 가구부터 물건까지 부드럽게 쓸어 만지던 그녀가 빈정거렸다.

“가난한 몰락 귀족 영애가 돈이 많이 생겼나 봐?”

“…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네 남자친구가 떠벌리고 다니던데?”

라튼 레트랑….

이제 그 이름만 생각해도 넌더리가 다 났다.

나는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옷장을 열었다. 그 순간까지도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내 손에 익숙한 무기들은 전부 다른 방에 있었다. 게다가 엘리나를 어찌어찌 처리하더라도, 바깥에 있는 그녀의 기사들까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때, 카시안이 선물한 마법 팔찌가 곧바로 눈에 들어왔다. 저게 도대체 무슨 용도인 줄은 모르겠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나는 이제 드레스룸까지 따라 들어온 엘리나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화장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이거 찾아? 이게 뭐 길래?”

나보다 엘리나가 한 박자 빨랐다. 그녀는 손에 든 팔찌를 의아한 눈으로 주시했다.

“그닥 예쁘지도 않은데. 엄청 비싼 건가?”

그녀는 그것을 나에게 흔들어 보였다.

“가져가 봐.”

나는 힘껏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녀가 주먹 속으로 그것을 휙 감추고 돌아섰다.

그녀의 손에서 낚아채기 위해 무리해서 움직이던 내가 치렁치렁한 가운 탓에 휘청거렸다. 그리고는 결국 우당탕 넘어졌다.

다시 일어서려는데 그보다 빠르게 엘리나의 손이 내 목을 죄었다. 언제 꺼냈는지 한 손에는 단도를 쥔 채였다.

“나는 네가 좀 고분고분했으면 좋겠는데.”

나는 벗어나려 애썼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녀의 기다란 손톱이 더욱 깊숙하게 목을 파고들었다. 날렵한 칼날은 목 언저리에서 반짝거렸다.

“저번처럼 말이야.”

저번? 저번이 언제지?

온 신경이 칼끝에 쏠려 있으면서도 떠올렸다.

… 설마! 술 취했던 날!

그 순간, 가물가물하던 잔상 속에서 엘리나의 얼굴이 또렷이 보였다. 그때도 비슷했다. 이 손으로 나를 조여 왔지. 소름 돋게 웃으면서!

“왜 내 것을 자꾸 뺏는 거야?”

“제가 뭘 뺏었다고 그러는 거예요.”

“내 동생이 내 자리를 훔쳐갔을 때, 내가 어떻게 한 줄 알아?”

그녀가 갑자기 칼을 든 손을 허공으로 높게 들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나는 죽을힘을 다해 그녀를 밀쳐냈다. 그녀가 떨어져 나가며 손에 쥐고 있던 칼이 멀찍이 날아갔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팔찌. 팔찌는 어딨지?’

그것은 단도 가까이서 함께 빛나고 있었다. 엘리나와 나는 동시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마법 팔찌를 손에 넣었다.

칼을 다시 찾은 엘리나가 내게 그것을 휘두르려고 했다. 나는 카시안이 했던 말을 되뇌었다.

[“휘둘러요. 있는 힘껏.”]

눈을 질끈 감고 팔찌를 쥔 손을 인정사정없이 내둘렀다.

“으아앗!”

그러자 내 팔에 엘리나의 머리가 정통으로 맞았다.

깡!

응? 깡?

분명 팔에 맞은 건 엘리나의 머린데, 웬 깡?

이해할 수 없는 효과음에 한쪽 눈을 슬며시 떴다. 그와 동시에 엘리나의 몸이 바닥으로 기울고 있었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그녀가 쥐고 있던 칼이 맥없이 떨어졌다. 그녀는, 두 눈이 뒤집힌 채 기절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천천히 손바닥을 펼쳤다. 그 안에서 보석은 여전히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 나한테 도대체 뭘 준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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