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다음 주 일요일. 아델트 공작님께서 저택을 비우시는 날이에요. 병사들을 데리고 훈련을 떠나신다고 했어요.”
“훈련이라. 확실해?”
“네, 장담할 수 있어요! 제가 하녀장 침실에 갔다가 달력에 표시된 걸 봤거든요!”
아나스타샤는 하녀장의 침실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하녀도 오직 자기뿐이라며 거드름을 피워댔다.
고작 하녀 따위가 어찌 저렇게 오만할 수 있을까. 라튼 레트랑은 인상을 잔뜩 구겼다. 엘리나 트리탄이 믿는 구석이라는 게, 겨우 하녀 하나가 으스대는 말뿐이라니. 이거 너무 무모한 거 아니야?
그러나 척 보기에도 두 사람 간의 신뢰는 꽤 깊어 보였다. 게다가 그들의 일에 관여하기로 한 이상 별다른 방법도 없지 않은가.
아나스타샤는 그 뒤로도 혼자 신나서 떠벌렸다. 라튼은 착잡한 기분을 애써 지우며 그녀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그녀의 정보에 따르면, 하녀 루이자는 저택 2층 오른쪽 제일 끝의 손님방에 누워있었다.
“그 방 아래에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그걸 타고 오르면 방에 딸린 발코니에 들어갈 수 있어요. 제가 미리 창문을 열어두겠습니다.”
은밀한 모의를 마치고 아델트 저택의 숙소로 돌아가는 내내, 라튼은 묘하게 불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약속한 당일이 되자 그의 조바심은 더욱 커졌다. 애초에 멀쩡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깜냥은 못되던 그였다. 게다가 운 좋게 황실 근위대에 들어가지 않았던가.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된다면?
라튼은 자신의 방 테이블 앞에 앉아 손톱을 잘근잘근 씹고, 다리를 달달 떨었다. 괜한 일에 끼어든 것 같은 불안감이 들어 미칠 것 같았다.
그런 그의 눈에 아직도 손등에 남아있는 구두 자국이 들어왔다. 그러자 갑자기 피가 끓기 시작했다.
[“시아라와 아델트 공작의 더러운 관계를 제 하녀 하나가 목격했답니다. 그걸로 그 애가 시아라를 협박하며 꾸준히 돈을 뜯어냈더군요.”]
[“그게 말이 됩니까?”]
[“못 믿으시겠다면 어쩔 수 없지요. 그러나 생각해보세요. 그녀가 쓰고 있는 돈. 그 돈이 다 어디서 나왔을까요? 이미 약혼녀가 있는 남자를 뺏어간 부도덕한 여자라고 소문이 나도 좋다면, 제 말을 무시하셔도 좋아요.”]
라튼은 엘리나가 시장 레스토랑에서 했던 말을 떠올리며 이를 바드득 갈았다.
‘그래. 이게 나 좋자고 하는 일이야?’
다 시아라를 위해 어쩔 수 없는 거야.
검은 복면을 손에 쥔 그가,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아나스타샤의 말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원래는 정문부터 저택 입구까지 빈틈없던 경계가, 오늘은 얼마 없는 병사들로 조금 느슨해 보였다.
라튼은 정원을 지나 저택 본채의 뒤편으로 향했다. 건물의 제일 오른쪽 끝에 그녀가 언급한 커다란 나무가 보였다.
황실 근위대에 단번에 붙을 만큼 운동신경이 뛰어난 그였기에, 나무를 오르는 것쯤이야 손쉬운 일이었다. 그는 아나스타샤가 미리 열어둔 창문 틈 사이로 몸을 구겨 넣었다.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하녀의 방에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구름에 가려진 달이 실내를 탁하게 비추었다. 어둑한 탓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으나 베게 위에 흐드러진 여자의 금색 머리카락은 유난히 눈에 띄었다.
하녀 루이자 역시 금발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색깔이 시아라의 것과 너무 비슷해서, 라튼은 잠시 멈칫했다.
‘망설이지 마. 그동안 시아라를 협박한 여자라고!’
천천히 침대 가까이 다가갔다. 하얀 이불은 여자의 얼굴을 전부 덮은 상태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위에 올라타 목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누워있던 여자가 살짝 발버둥 쳤다. 끙끙거리던 그녀는 라튼의 팔에 힘이 들어갈수록 저항하지 못했다.
마침내, 여자의 팔이 침대 아래로 축 늘어졌다.
일을 끝낸 라튼의 손이 그제야 덜덜 떨렸다. 그 와중에도 그는 하녀의 얼굴 위 이불자락을 조심스레 쥐었다. 하녀가 정말로 죽은 것인지 확실히 확인해야만 했다.
천천히 천을 내리자 하얗게 질린 얼굴이 드러났다.
“이게 뭐야…?”
그 순간, 침대에 누워있던 하녀가 눈을 번쩍 떴다.
그러니까…. 생각보다 좀 체격이 있는 하녀가….
아니, 하녀? 이건 남자 아니야?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낄 새도 없이, 라튼은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
라튼 레트랑이 하녀 루이자를 찾아가기 몇 시간 전, 카시안 폰 아델트의 기사단장 렌과 비서 알버트가 한자리에 모였다.
공작의 집무실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카시안은 가죽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등을 기대고 한쪽 다리를 꼬았다. 팔꿈치를 팔걸이에 비스듬히 얹은 채로 턱을 괴었다.
평소에는 주로 무뚝뚝한 표정의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흥미로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래서, 누가 쓸 거야?”
알버트와 렌은 힐끔힐끔 눈치만 보다가 서로를 향해 턱짓했다.
“니가 해.”
“알버트. 내 몸을 봐. 나는 안 돼.”
“아니, 나라고 뭐! 너랑 다른 줄 알아?”
어쩐지 의기양양해 보이는 렌의 말투에 빈정 상한 알버트가 그를 흘겨보았다.
본인의 말처럼, 기사 렌은 완벽하게 단련된 근육질 몸이었다. 덩치뿐 아니라 키까지 커서, 그들의 계획을 실행하기에는 확실히 무리가 있어 보였다.
입술을 삐쭉삐쭉 내밀던 알버트가 자신의 몸을 살폈다. 수분이 다 빠져 빼싹 마른 오이 같았다.
그는 땅이 꺼질 것처럼 한숨을 내쉬고 테이블 위에 놓인 샛노란 물체 앞으로 다가갔다. 손으로 들어 올려보자 더욱 해괴망측한 그것은, 기다란 금색 가발이었다.
하녀 루이자의 머리색에 맞추어 알버트가 직접 사 온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걸 쓰는 사람이 자신이 될 거라 전혀 예상 못 했던 그가 이빨을 악 깨물었다.
“좋네요. 아주 좋아요.”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야.”
“아, 예. 그것 참 감사하네요.”
그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나저나 오늘 밤에 확실히 오겠죠?”
“응. 오늘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고 생각할 테니.”
눈을 가늘게 뜬 아델트 공작이 얼마 전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그는. 하녀 중에 엘리나와 내통하는 이가 있을 거란 사실을 오래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누구라고 섣불리 특정 지을 수 없었다. 제 가족인 이들을 함부로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얼마 전, 하녀장 린다가 그를 찾아왔다.
“공작님.”
“무슨 일이지?”
“아무리 봐도 의심스러운 아이가 하나 있습니다.”
“말해 봐.”
린다는 그의 책상에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 하나를 내려놓았다.
“제 밑에서 일하는 하녀의 침실에서 발견했습니다.”
카시안은 반지를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그 아이 형편에 그런 보석을 살 수도 없을뿐더러…. 옷장에도 하녀들에게는 턱없이 과한 드레스가 즐비했지요. 그리고 또….”
“말해.”
“의심스러워 기록을 살펴보니 엘리나 트리탄 아가씨의 추천을 받아 저택에 들어왔더군요.”
“그게 누구지?”
“아나스타샤. 벌써 수년째 이곳에서 일하고 있는 아이입니다.”
“흐음…….”
아나스타샤?
하녀들의 얼굴과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그 역시 그녀에 대해 알고 있었다.
루이자가 자신의 집무실을 뒤지다 걸리고 나서, 그녀를 용서해 달라며 싹싹 빌던 하녀가 바로 아나스타샤였다. 그녀는 꼭 자기가 죄를 지은 것처럼 굴었다. 어쩐지 너무 과하게 행동한다 싶더니.
카시안이 쯧 하고 혀를 찼다.
“그 여자의 동태를 살피고, 수상한 점은 바로 보고해.”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차근차근 덫을 팠다.
린다는 눈에 잘 띄는 새빨간 잉크로 달력에 공작의 부재를 표시했다. 그 후에 일부러 그녀를 자신의 방으로 초대했다.
아나스타샤는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며 자신이 돋보이는 것을 즐겼다. 그러한 그녀의 성정을 잘 아는 린다는 여러 자리에서 티 나게 그녀를 칭찬했다.
그 이후로 그녀는 자기도취에 빠져 이리저리 날뛰었다. 사리 분별을 할 수 없던 그녀는 휴가 승낙 역시 자기가 잘나서라고 착각했다.
저택 외부로 향한 그녀가 엘리나의 별장으로 향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제, 그물을 걷어 올릴 차례였다.
*
노란 가발을 쓴 알버트가 조용히 침대에 누웠다. 그는 이마까지 이불을 끌어 올리고 숨 참는 연습을 반복했다. 어쩐지 진짜 죽음을 목전에 둔 더러운 기분이었다.
루이자는 다른 방으로 진즉에 옮겨졌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아나스타샤는, 조용히 들어와 몰래 창문을 열어두고 나갔다.
이불을 슬쩍 내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알버트가 소리 없는 탄식을 흘렸다.
‘각하 말씀이 진짜였잖아?’
자객, 아니. 라튼 레트랑은 그들이 예상한 시간에 맞춰서 정확하게 등장했다.
이 쓰레기 같은 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알버트의 목을 졸랐다. 알버트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죽을힘을 다해 버텨냈다. 그가 손가락을 축 늘어뜨리자 라튼 레트랑의 손이 멀어졌다.
라튼이 천천히 이불을 젖히자 기다렸다는 듯 알버트가 눈을 떴다. 몇 차례 캑캑거리던 그가 곧장 정신을 차리고 일갈했다.
“이 개자식아! 진짜 죽을 뻔했네!”
뒤집어쓴 검은 복면 사이로 라튼의 붉은 눈동자가 요동쳤다. 이러한 상황을 상상도 못 했다는 듯, 그의 몸은 돌처럼 굳어 정지했다.
“이, 이게 뭐야…? 당신 뭡니까! 대체 무, 무슨 일이…!”
“뭐긴 뭐야. 망한 거지.”
그 틈을 타 알버트가 라튼의 몸통을 발로 확 차버렸다. 그러자 그는 단번에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머리를 부딪친 충격이 큰지 허우적거리는 꼴이 퍽 우스웠다.
동시에 방문이 열리며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제일 앞에 있던 렌이 포승줄로 라튼을 단단히 포박했다.
죄인을 끌고 복도로 나가자, 소란에 모여든 하녀들이 구경이라도 난 듯 웅성거렸다. 그중에는 물론 아나스타샤도 있었다.
아직도 상황파악이 되지 않아 어안이 벙벙한 라튼을 향해, 아나스타샤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허어억! 어쩜, 귀족 도련님께서 저런 끔찍한 짓을! 어디 세상 무서워서 살겠어?”
그러자 옆에 있던 하녀장 린다가 그녀의 연기가 같잖다는 듯 비웃었다.
“아나스타샤.”
“네, 하녀장 님!”
아나스타샤는 순진한 척 대답했다.
“나는 네가 이토록 네 역할을 잘 해낼지 몰랐단다. 아주 기특하구나.”
“네?”
“왜 아직도 그러고 서 있니? 너도 함께 가야지.”
“네……?”
린다가 복도 한복판으로 아나스타샤를 밀어 넣었다.
그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나머지 기사들이 그녀의 손 역시 꽁꽁 묶었다.
“… 하녀장 님…? 어째서 제게…!”
린다가 기가 막혀 코웃음 쳤다.
“우매한 것.”
끌려가는 와중에도 그녀는 꽥꽥 소리 질렀다.
“저는 아무 잘못 없어요! 이건 다! 다 모함이에요. 저는 그냥 사주 받았을 뿐이라고요!”
복도를 가득 채우던 고음이 천천히 멀어지더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적막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