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또맞고 튀었는데 공작님이 집착한다-37화 (37/135)

37.

아나스타샤. 그녀는 아델트에서 일하는 성실한 하녀이자, 엘리나의 충실한 하수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성실한 ‘척’하는 것이었지만.

오래전 그녀는 이름 모를 남작 가문에서 일했다. 그러나 동료 하녀들에게 헛소문을 퍼뜨려 남작 부인을 음해한 죄로, 그곳에서 내쫓겼다.

일하던 가문의 주인을 모독한 전적이 있는 그녀를 받아주는 귀족은 아무도 없었다. 그 때문에 그녀는 한동안 길거리를 나돌던 신세였다. 그런 그녀의 구세주가 바로 엘리나 트리탄이었다.

그녀의 눈에 엘리나는, 앞에서는 깨끗한 척 젠체하던 대다수 귀족들과는 결이 달랐다. 그녀는 마음속에 가진 탐욕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마음껏 드러내고, 원하는 것을 가졌다.

특히나 그녀가 매주 주최하던 무도회는 어떻던가. 그곳에서 매번 새롭게 벌어지는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 비록 지켜볼 뿐이었지만, 그 모든 것은 아나스타샤가 살아갈 동력이었다.

그녀는 엘리나의 모든 점을 동경하며 평생 그녀를 위해 일하겠다고 맹세했다.

아나스타샤가 아델트의 하녀로 들어간 것은 4년 전쯤이었다. 엘리나가 그녀의 과거를 세탁해준 덕분이었다. 공작 저택에서 일하며 착실하게 신뢰를 쌓아왔다.

순진한 루이자를 꼬드겨 아델트 공작의 집무실을 뒤지게 했던 것도 아나스타샤였다. 물론 그 뒤에는 엘리나의 명령이 있었지만.

세 치 혀로 여론을 조작하는 것은 아나스타샤의 취미였다. 그로 인해 사람들이 곤란에 빠지면, 그녀는 뒤돌아서 배를 잡고 깔깔거렸다. 그러다가 일이 엉망이 되어버려도,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체하며 발만 빼면 끝이었다. 모두가 그녀를 신뢰하니까!

그녀는 모두의 앞에서 루이자가 배신자라 낙인찍었지만, 사실 진짜 배신자는 아나스타샤, 그녀였다.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른다고 생각하자 그녀의 온몸에 전율이 돋았다.

엘리나 트리탄의 별장에 들어온 아나스타샤는 꼭 저의 집에 온 것 같은 아늑함을 느꼈다.

두 사람은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았다. 엘리나는 오랜만에 만난 아나스타샤에게 제일 먼저 공작 저택의 상황을 물었다.

“아델트 공작의 움직임은 어때?”

“확실히 무도회 전과 다르게 경계하시는 게 느껴집니다. 집무실에도 아무도 들이지 않으시고요.”

“너 도니?”

“네. 안타깝게도….”

바짝 앞으로 기대어 앉아 있던 엘리나가 실망한 듯 몸을 뒤로 뺐다. 그러자 아나스타샤가 황급히 답했다.

“그, 그렇지만 저를 굉장히 신뢰하십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뭐지?”

“지금은 그 집에서 일하는 누구도 저처럼 밖을 나돌아 다닐 수 없습니다. 거긴 감옥이나 다름없어요. 그렇지만 저는 하녀장이 특별히 허락해 주셨지요!”

그녀가 우쭐거렸다.

“이게 저택에서 저를 신뢰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 아니겠습니까?”

“뭐, 그건 그렇네.”

엘리나는 맑게 웃으며 단단히 팔짱을 꼈다.

“지금은 루이자가 너무 마음에 걸려. 언젠간 죽여야 하는데, 나는 거기에 들어갈 수 없으니까….”

그녀는 느릿하게 말꼬리를 빼며 아나스타샤를 응시했다.

그러자 아나스타샤가 불안한 듯 물었다.

“엘리나 아가씨. 설마 저더러 직접 루이자를 처리하라고 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럴 리가. 너는 앞으로도 아델트에서 큰일을 해야 하잖니. 나를 위해.”

엘리나의 답에 아나스타샤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녀의 말이라면 뭐든 실행할 것이 분명했지만, 그래도 사람을 죽이는 일은 영 께름칙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설마 널 버리겠어?”

“그럼 루이자는 어떻게….”

“우리 일을 도와줄 사람이 곧 올 거야.”

“누가요?”

“있어. 사랑에 눈먼 등신 같은 인간.”

때마침 저택의 뒷문이 열리고 붉은 머리카락의 남자가 들어왔다.

“아, 오셨어요? 혹시 안 오실까 봐 걱정했답니다. 라튼 레트랑 씨.”

그의 얼굴에는 전에 보았던 최소한의 신사다움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눈은 짙게 가라앉아 있었으며 그새 좀 핼쑥해졌다.

“어떻게, 결정은 하셨나요?”

라튼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하녀가 없어지기만 하면, 시아라는 아델트 공작에게서 자유로운 겁니까?”

“그럼요.”

엘리나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 애가 공작 저택에 몰래 들어갈 방법을 알려 줄 거랍니다.”

*

“됐다.”

카시안 폰 아델트는 며칠 내내 집무실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날이 밝는지 저무는지도 몰랐다.

그 기간에 알버트는 그의 뒷바라지를 착실하게 이행했다.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공작에게 손수 물을 떠먹이고, 밥 한 끼 제대로 먹지 않던 그의 입에 빵조각을 쑤셔 넣었다.

네블라딘 가문 대대로 내려오던 주인을 보필하는 능력이 완벽하게 빛을 발하던 순간이었다.

카시안은 잠도 딱 죽지 않을 만큼만 잤다. 그렇게 여러 날이 흘렀다.

각고의 노력 끝에, 바닥이었던 마력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아직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엄청난 발전이었다.

그것은 마치 오래된 피아노를 조율하는 과정과 비슷했다. 처음에는 불협화음을 내며 삐거덕거리던 마력이, 점차 제 음을 찾아갔다. 어느새 건반 소리는, 온화하고 우아했다.

그의 주변에서 뿜어져 나오던 검은 기운은 역시 사라졌다. 그 대신, 영롱하게 빛나는 푸른 네온이 그를 감싸 안았다.

이제 웬만한 마법은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아델트 가문의 능력인 방어마법만큼은 여전히 불가능했다. 그것만 사용하려 하면 지독한 피 냄새가 그를 덮쳤다.

‘그건 좀 아쉽지만.’

카시안이 자신의 손가락을 맞부딪혔다. 그러자 순식간에 그가 사라졌다.

*

나는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햇살 좋은 정원으로 나왔다. 두툼한 책의 한가운데에는 <멋지게 복수하는 101가지 방법>이라는 제목이 고풍스럽게 박혀 있었다.

서점에서 보자마자 단번에 직감했다. 지금 나한테 꼭 필요하다고! 그래, 이왕 복수할 거 멋진 게 천박한 것보다야 낫지 않겠어?

나는 호기롭게 책을 펼쳤다.

<상대방에게 멋지게 복수하고 싶으신가요? 그렇다면 첫 번째. 용서하세요. 용서는 가장 큰 복수입니다. 두 번째. 사랑하세요. 사랑은 증오를 이기니까요. 세 번째. 웃으세요. 웃으면….>

…….

뭐? 웃으면 복이 와…?

답이 없네.

이게 무슨 복수야?

모름지기 복수란 상대방이 내 대가리 깨면 나도 그의 대가리를 부수고. 나를 할퀴면 나는 난도질하는. 그런 거 아니겠어?

책을 탁 소리가 나게 닫았다.

하. 또 돈 낭비했네. 레아한테 혼나기 전에 불쏘시개로 써야지.

도대체 라튼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테이블 위로 고개를 파묻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몽둥이를 들고 가서 머리통을 휘갈기고 싶었으나. 그에 따르는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모욕을 당하고도 어찌할 바를 몰라 참아야만 한다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속이 뒤틀린 것 같은 기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때, 내 옆자리에서 작은 기척이 느껴졌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검은 눈동자였다. 그다음은 수려하게 뻗은 속눈썹, 산처럼 높은 코. 색소가 진한 입술.

나는 천천히 눈을 껌뻑였다. 다시 봐도 틀림없이 카시안이었다. 그는 내가 테이블에 한쪽 뺨을 붙이고 엎드린 것처럼, 똑같이 엎드려 나를 보고 있었다.

“어… 어…, 어, 엄마야!”

나는 깜짝 놀라 허리를 바로 세워 앉았다.

“… 공작님?”

“잘 있었어요?”

“놀랐잖아요. 대문은 잠가놨는데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문 열리는 소리도 안 들렸는데….”

그러자 그가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혹시 지금…. 마법 쓰신 거예요?”

“네.”

나는 어리둥절했다.

“순간이동을요? 그런 것도 하실 줄 아세요?”

“당연하죠. 마법사잖아요.”

“… 몰랐는데. 한 번도 쓰신 적 없잖아요,”

“이걸 쓰면 같이 못 걷잖아요. 당신이랑 걷고 싶었으니까요. 천천히.”

감미로운 목소리에 넘어갈 뻔하였으나, 짐짓 단호하게 말했다.

“앞으로도 이렇게 불쑥불쑥 나타나실 건 아니죠?”

“저 잘못한 거예요?”

“잘못… 이죠! 그러다가 제 심장이 쫄려서 꼴까닥하면 어쩌시려고.”

그러자 카시안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세요?”

“당신이 죽으면 안 되니까. 초인종 눌러서 들어올게요.”

“아니! 지금은 아직 멀쩡하니까 앉아 계세요.”

나는 다급하게 그의 팔을 붙잡고 의자에 앉혔다. 카시안의 옆얼굴은 여전히 조각상을 깎아놓은 듯 날렵했다. 그러나 어딘지 피로해 보였다.

“요새 저택에 무슨 일이 있다고 들었는데. 괜찮으세요?”

“별일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요.”

“많이 피곤해 보이세요.”

그러자 카시안은 양 손바닥으로 눈가를 쓸어내렸다.

“아, 요새 잠을 좀 못 잤더니.”

“… 분위기가 많이 안 좋은가 봐요.”

“곧 해결될 거예요. 참, 시아라. 내가 줬던 팔찌 잘 가지고 있어요?”

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무도회에서 돌아온 뒤로 아무리 찾아도 없길래, 먼저 사과한다는 걸…!

“죄, 죄송해요. 제가 그걸…, 그러니까 그게 어디로…. 분명 잘 하고 있었는데…. 도망을….”

횡설수설하는 나를 보며 카시안이 풋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그때 그 팔찌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내 팔에 채웠다.

“공… 작님이 가지고 계셨어요?”

“침실 바닥에 떨어져 있었어요.”

“죄송해요. 잘 관리했어야 했는데. 이번에는 진짜 안 잃어버릴게요!”

그는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얹고 턱을 괴었다. 지그시 나를 응시하던 눈동자에는 의아함이 묻어있었다.

“이번에는 안 물어봐요?”

“뭐를요?”

“이 팔찌, 마법 걸려있는지.”

나는 내 손목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얇은 금색 체인에 작게 매달려 있는 오팔 보석. 저번이랑 똑같은 형태였지만, 저렇게 물으니 어쩐지 더 신비하고 영롱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안 속지.

“아니면서.”

그러자 그가 말갛게 웃었다.

“이번에는 맞는데.”

“… 진짜로요?”

“혹시라도 위험한 일 생기면, 그걸 휘둘러요.”

“네?”

“그냥 나 믿고 휘둘러요. 아무렇게나 원하는 대로. 그런 거 잘하면서.”

“제가 언제 그랬다고….”

나는 카시안이 하는 말을 장난스레 여겼다.

위험한 일이라.

라튼 레트랑이 휩쓸고 간 게 불과 며칠 전 일인데. 설마 그보다 더한 일이 또 일어나겠어?

*

새벽달이 어스레한 밤.

검은 복면을 쓴 한 남자가 열린 창틈 사이로 침실에 잠입했다. 어둠이 짙게 깔린 공간에도 베게 위로 흩어진 여자의 금색 머리카락만큼은 확연했다.

그는 여자가 누워있는 침대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여자의 목을 졸랐다. 남자의 팔에 힘이 들어갈수록 그녀는 저항하지 못했다.

마침내, 여자의 팔이 침대 아래로 축 늘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