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알버트는 잠을 자는 도중에도 무의식적으로 킁킁거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풍겨오는 낯선 향기에 번쩍 잠에서 깨어났다.
누군가 이 저택에서 마법을 사용했다. 그것도 엄청난 마력을 끌어 모아서!
그의 풀네임 알버트 네블라딘.
그의 가문 역시 대대손손 마법사였다. 그러나 다른 마법사들은 네블라딘 가문을 이렇게 불렀다.
‘반쪽짜리 마법사.’
마법사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먼 과거에는, 그들끼리 모여 만든 마법사 협회가 존재했다. 협회 내부에서는, 개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에 따라 자연스럽게 등급이 나뉘게 되었다.
어느 집단이든 으레 그러하듯, 초기에는 그들 역시 선한 의지가 넘쳤다. 힘을 모으고 능력을 공유하며 어려운 일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한들, 그들 역시 똑같은 인간이었다.
세상을 이롭게 하자던 처음의 의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변질되었다. 협회는 점점 돈이 되는 일에만 관여했고, 그것이 악한 일이라도 서슴지 않았다. 그들에겐 애국심이랄 것도 딱히 없었다. 어차피 전쟁이 터져서 이기는 쪽이 제 나라가 될 테니. 살아남을 것 같은 쪽을 도왔다.
알버트의 조상 중 누군가는, 더 이상 그것을 참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 싸움에서 승리했으면 좋았으련만. 네블라딘은 패배했다. 그 일로 그의 조상은 최말단 마법사로 좌천되어 계급 높은 이들의 뒤치다꺼리를 해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네블라딘 가문의 모든 일원에게 억제 마법이 걸리게 되었다. 그들에게 허락된 마법은 이런 것들뿐이었다.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는 마법.
보고서를 빠르게 작성하는 마법.
상사의 잘못도 본인들이 뒤집어쓰는 호구마법.
자유자재로 불을 다루며 꽤 잘나가던 네블라딘 가문은 빠르게 쇠퇴했다. 대가 지날수록 그 저주는 옅어졌다. 그러나 마법을 쓰지 않으면 마력도 줄어드는 법. 그 결과 본래 타고난 마력 역시 자연스럽게 줄어들게 되었다.
결국, 이제와 알버트 네블라딘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향기로 마력을 감지하는 것뿐이었다.
물론 아델트 공작이 평소 마법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탓에, 그 능력마저도 있는지 모르고 살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알버트는 요새 자신이 마법사라는 사실까지 잊고 살 정도였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달랐다!
어디선가 서늘하면서도 달짝지근한 향기가 풍겨 왔다. 이 냄새는 분명…!
하지만 알버트는 섣불리 기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걱정했다. 이것이 아델트 공작의 마력이 아니라면, 그건 정말 비상사태니까!
그렇게 곧장 3층으로 달려간 알버트가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공작 각하…! 지금 저택에 이상한 기운이…!”
정말 놀랍게도 카시안은 연구를 하고 있었다. 집무실을 그득 채운 마력은 진짜로 그의 것이었다.
‘혹시 헛것을 보는 건가?’
그러나 눈을 뜨고 봐도 감고 봐도, 아델트 공작이 맞았다.
평소에는 지지리도 말 안 듣던 고양이가 오늘은 늠름한 호랑이처럼 보였다.
그의 주인이 힘을 쓰자, 알버트 역시 마력이 샘솟는 기분이었다. 그는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감동했다.
‘그래. 난 마법사였어!’
입을 다물 줄 모르는 알버트를 잠시간 응시하던 카시안은 다시 책을 읽는 데에 몰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다지 마법이 필요 없는 삶이었다. 제 몸 하나 간수하는 일은 식은 죽을 먹는 것보다도 쉬운 일이었으며, 선조들이 세워놓은 방어 결계는 아직 그 쓸모를 다하고 있으니까.
물론 결계가 점점 망가지고 있긴 하나, 당장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카시안이 그동안 시아라 앞에서 사용했던 마법들은, 자연스레 몸에 배 있던 몇 가지를 돌려막기 해왔던 것에 불과했다. 마력도 필요 없는 아주 기초적인 하급마법 따위들. 그간 꾸준히 사용하지 않은 탓에, 마법사로서 그의 몸은 빈 깡통에 불과했다.
그러니 지금 알버트가 저렇게 놀라는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벌써 십 년 넘게 어떠한 연구도 하지 않았으니까.
“저… 각하. 그러면 이제 방어 결계도 금세 고치시는 건가요?”
“그건…….”
급작스러운 알버트의 물음에 카시안의 눈이 잠시간 흔들렸다. 그러더니 고개를 아래로 푹 떨구었다. 시무룩해진 공작을 보며 알버트가 손사래 쳤다.
“괘, 괜찮습니다, 각하! 다시 마도서를 펼치셨다는 것만으로도.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요!”
*
나는 정원 그네에 앉아 라튼과 엘리나의 관계에 대해 고민했다. 그 둘이 무언가 계략이라도 꾸미려는 걸까?
라튼 레트랑의 목적이야 뻔했다. 나를 어르고 달래서 다시 수도로 데려가고 싶은 거겠지.
그렇다면 엘리나 트리탄은?
그녀는…. 내가 자기 자리를 빼앗었니 어쨌니 하는 걸 보면, 나를 없애고 싶은 게 아닐까.
비밀 무도회에서 하인들을 막 대하던 그녀의 행실을 기억해본다면, 말도 안 되는 짓도 얼마든지 벌일 것 같았다.
나는 발을 굴려 그네를 움직였다. 파란 하늘을 도화지 삼아 내가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그려보았다.
각각의 상상마다 결말은 한결같이, 개죽음이었다.
땅바닥으로 풀썩 뛰어내려 먼지 묻은 손을 탁탁 털었다.
“개죽음이라니. 그건 절대 안 되지.”
한참 그럴싸한 방비책을 생각할 때, 대문 밖에서 우체부의 자전거 종소리가 울렸다. 그는 우리 집 우체통에 편지를 넣고 다시 사라졌다.
“편지가 올 게 있나?”
나는 곧장 나가 우편물을 확인했다. 편지의 주인은 다름 아닌 소피아였다.
조만간 만나지 않겠냐는 그녀의 물음에, 나는 약속 날짜와 시각을 정해 답장을 보냈다.
그렇게 며칠 뒤, 소피아를 만나러 상업지구로 향했다.
우리는 작은 골목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그런데, 자꾸만 누군가가 우리를 따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마다 뒤돌아 살폈지만, 주변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요새 너무 예민해서 그런 걸까?’
나는 불안한 감각을 애써 지우며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소피아의 머리카락은 그새 조금 길어 어깨 끝을 살짝살짝 스쳤다. 그녀는 눈앞으로 흘러내린 옆머리를 쓸어 넘기며 미소지었다.
“언니. 잘 지냈어요?”
“응. 너도 별일 없었지?”
“그럼요. 아델트가 수도에 비해 조용하니까 너무 좋네요.”
“다행이네.”
나는 진한 녹차를 한 모금 마신 뒤 그녀에게 물었다.
“소피아, 혹시 말이야. 라튼이랑 엘리나가 서로 아는 사이일까?”
소피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그렇구나….”
“사실 아델트에 온 이후로 그 남자랑 한 마디도 안 섞어 봤거든요.”
“정말?”
그녀는 손으로 턱을 쓸며 할 말을 골랐다.
“네. 뭔가 좀…. 음침해 보인달까. 속을 잘 모르겠어요. 게다가 요새 아델트 저택에서 있었던 사고 때문에, 저는 방 밖으로도 잘 안 나가고요.”
“사고? 저택에서 사고가 있었어?”
“무도회가 있었던 날 밤에, 하녀 하나가 추락했거든요.”
처음 듣는 이야기에 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하녀가 추락해?”
“네. 그때 우리가 취했을 때요. 아, 맞아! 그게 엘리나 트리탄의 하녀였어요.”
“… 전혀 몰랐어.”
“뭐, 좋은 일이 아니니까. 아델트 공작님도 밖에서 떠벌리고 다닐 필요가 없었겠죠.”
“그렇긴 하지만….”
엘리나 트리탄의 하녀….
그 순간 내 머릿속에, 표독스럽게 웃는 엘리나의 얼굴이 빠르게 지나갔다. 어두컴컴한 와중에도 빛나던 그녀의 머리카락 역시 함께였다. 그녀가 서 있던 자리 뒤로 검은색 소파와 책상이 보였다.
뭐지? 지금 이게 어디였지?
분명 처음 보는 곳인데.
나는 멍이 들었던 목 주변을 매만졌다. 이제 다 아물었음에도 괜스레 통증이 느껴지는 듯했다.
‘… 설마 이거…….’
내 표정이 점점 심각해지자 소피아가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요?”
“아, 아니야. 그냥 좀…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무슨 생각?”
“… 아직 잘 모르겠어. …그보다! 여기 와서 펠릭스는 만나 봤어?”
그 말에 소피아의 어깨가 단번에 땅으로 꺼졌다.
“… 그… 건….”
“설마 아직도 못 본 거야? 왜. 여기까지 왔는데 만나야지.”
그녀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물었다.
“혹시…. 언니가 좀 잘 되게끔 도와줄 수 있어요?”
“내가?”
“네. 언니가 오빠랑 친하니까.”
“잘 들어, 소피아.”
내 단호한 말투에 그녀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부탁 했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되는 거야.”
“네?”
“진짜라니까. 내가 읽어 봤던 소설에서는, 그거 금기어야. 그 말 하면 다 망했어.”
“… 나, 나는 그런 거 안 믿어요!”
그러나 소피아의 눈동자는 허공을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강단 있고 똑 부러질 것 같던 첫인상과는 다른 귀여운 모습에, 나는 실없이 웃었다.
“그래도. 나중에 다 같이 밥 한 끼 정도 먹는 건 괜찮겠지.”
우리는 카페에서 나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그러자 또다시, 아까와 같은 찝찝한 시선이 느껴졌다. 영 불안한 마음이 들어 소피아에게 주의를 당부하고, 그녀가 타고 온 마차가 사라질 때까지 배웅했다.
그 길로 나 역시 마차에 올랐다. 얼마 뒤, 마차의 유리창 너머로 집이 보이자 무사히 도착했음에 안도했다.
그러나 대문에 열쇠를 끼워 넣으려던 순간, 등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시아라.”
“… 라…튼?”
갑작스러운 라튼 레트랑의 등장에 나는 경악했다.
“니가…. 니가 여기를 어떻게 알고 왔어?”
나는 너무 놀라 열쇠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짤그랑 울리는 쇳소리가 내 몸을 꽁꽁 휘감았다.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온 라튼이 내 어깨를 붙들고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시아라. 나한테 확신을 줘.”
그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
며칠 내내 방에만 틀어박혀 있던 소피아 엘링턴이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라튼 레트랑은 그녀가 방을 나서는 순간부터 그녀를 미행했다. 아델트에서 저 여자가 만날 사람이 누가 있겠어. 뻔하지.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약속 상대는 시아라였다. 이제 더는 소피아의 뒤를 밟을 필요가 사라진 라튼은 시아라를 따라갔다.
그렇게 그녀가 사는 곳까지 알아냈다.
그러나 그녀의 집은 라튼이 생각했던 것보다 좋았다. 아니, 상상 초월이었다. 그녀의 형편으로는 절대로 구할 수 없는 수준이 분명했다.
그 으리으리한 집을 보자, 돈이 필요해서 자신의 약혼자를 빼앗은 거라던 엘리나의 말이 떠올랐다.
너무 터무니없는 말이라 전혀 신뢰가 가지 않았었으나,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그 말이 정답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라튼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그녀가 겁먹은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라튼의 입꼬리가 만족스러운 듯 활처럼 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자꾸만 선을 긋는 시아라에게 그는 점점 분노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