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나는 주변 정리를 깨끗하게 마치고 마침내 허리를 쭉 늘렸다.
방금까지 시끌벅적했던 공간에 나 혼자 남으니 이제야 처음 상상했던 피크닉에 온 것 같았다.
풀벌레 우는 소리를 제외하면 고요한. 자연 그대로를 느끼는…! 드디어 내가 진정 원했던 시간이었다.
나는 언덕 끄트머리에 있는 커다란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머리 위로는 분홍색 꽃송이들이 소나기처럼 내렸다. 발아래는 까마득한 세상이었다.
허공에서 두 발을 번갈아 발장구치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 내가 잘 살고 있는 걸까?
처음에 아델트로 왔을 때는, 이제 돈도 있겠다. 마땅히 귀족적인 생활을 하겠다고 마음먹었었다. 보상받고 싶었다. 불우하고 우울했던, 내 모든 과거를.
그러나 그러한 삶의 부질없음을 깨닫고 나는 어떻게 살았더라?
그냥, 시간이 흐르는 대로. 아니, 어쩌면 시간이 흐르는 것도 알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보냈다.
선선한 바람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아델트에서 만난 친구들의 얼굴이 하나씩 떠올랐다.
이 커다란 영지를 책임지는 카시안, 그림 그리는 게 좋다는 펠릭스. 의사가 되겠다는 소피아, 요리하며 행복해하는 한나와 파울. 기사가 되고 싶은 레오와 똑똑한 박사님이 꿈인 레아까지.
다들 나에게는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누군가는 삶의 목표라고 부르는 그것이.
그러고 보면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지. 혹은 무엇을 좋아하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과거에는 그저 하루를 버티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고, 지금은 그저 돈이면 다 해결될 줄 알았으니까. 이런 삶도 의미가 있는 걸까?
감았던 눈을 뜨고 차분하게 앞을 내다보았다. 처음 이 언덕에 올랐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지금은, 내가 모래알보다도 더 작은 존재처럼 느껴졌다.
나는 씁쓸하게 바위에서 일어났다.
내 가치를 찾는 일.
아무래도 꽤나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이 언덕의 정기를 다 흡수하듯 숨을 들이마시고 내 안의 근심을 토해내듯 다시 숨을 뱉어내고 나서야, 나는 돌아섰다.
이제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향하려는데 웬일인지 레아와 레오가 먼저 내 쪽으로 오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보아도 카시안과 펠릭스는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레오는 제 몸집보다도 커다란 무언가를 양손 힘껏 끌고 있는 중이었다.
“누나! 이것 봐봐!”
“이게 뭐야?”
“몰라. 오다가 주웠어.”
“뭐?”
“누나한테 줄 선물이야.”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레오의 말에 나는 시선을 곧장 아래로 떨구었다. 가까이서 확인해 보니 웬 팻말이었다.
심지어 시커먼 흙먼지로 잔뜩 뒤덮인 그것은, 무슨 용도였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피크닉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팻말을 박박 닦았다. 그러자 서서히 글씨가 드러났다.
“경고…. 출입… 금지….”
응? 출입금지?
으음…. 갑자기 온몸에 털이 쭈뼛 서는 게, 뭔가 싸한 기분이었다. 나는 다급하게 아이들에게 물었다.
“지금 공작님이랑 펠릭스 형은 어디 갔어?”
“쩌어기.”
레오가 손가락으로 저 멀리 새카만 숲속을 가리켰다.
“둘이 달리기하다가 사라졌어.”
“뭐?”
그 순간, 두 사람의 목소리가 고요한 산속 가득 메아리쳐 울리기 시작했다.
“누나! 시아라 누나!!”
“시아라!!”
하아…….
뭔데.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인 건데.
*
한나가 비록 남들과 하루 종일 수다 떠는 것을 좋아할지라도, 남의 이야기를 엿듣는 고약한 취미는 없었다. 그것도 누가 보아도 매우 수상쩍은 두 남녀의 대화를!
그러나 레스토랑의 문을 열고 들어온 커플의 사연 많아 보이는 듯한 행동은, 그녀에게 커다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제일 처음 한나의 시선을 끈 것은 비단결 같은 분홍색 머리칼의 귀족 영애가 걸친 옷이었다.
‘히이이익- 이거 다 자넬 부티크에서 나온 봄맞이 신상이잖아?’
한정판으로 딱 세 벌만 출시 된 옷을 입은 여자가 그녀의 레스토랑을 찾다니!
‘우리 가게 소문 듣고 왔나? 이러다가 분점들도 완전 대박나는 거 아니야?’
한나는 조금은 들뜬 마음으로 검은색 챙모자에 가려진 여자의 얼굴을 슬쩍 확인했다. 그런데, 그녀의 눈은 울고 있었다. 입꼬리는 모순되게 씰룩쌜룩하면서도.
의아함을 느낌 한나가 이번에는 남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새빨간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그는, 으음…. 그래, 잘생겼다. 헉 소리가 나올 정도로 얼굴은 반지르르했다. 그러나 어딘가 좀 단정치 못해 보이는 남자였다.
그는 조급한 표정으로 끊임없이 주변을 의식했다. 옆에 나란히 서 있는 여자에게는 일말의 감정도 없어 보였다. 그저 불안해 보였다.
참으로 이상한 커플이었다.
한나는 그들을 방으로 안내한 뒤, 문을 닫고 돌아섰다. 분명 떠나려고 했지만, 희한하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 뭔가 께름칙하고 수상쩍다고.
잠시 후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그가 시아라를 언급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녀가 저 귀족 여자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지금 이게 다 무슨 소리야?
한나는 두 귀를 의심하며 문 가까이에 더욱 바짝 귀를 가져다 댔다. 그러나 그다음부터는 하도 작게 대화를 나누는 탓에 잘 들리지 않았다. 게다가 곧바로 이어진 여자의 울음소리에, 더는 건질 것이 없었다.
“여 봐, 주인장! 계산해주시오.”
카운터에서 들려온 소리에 하마터면 그 앞에서 크게 대답할 뻔한 한나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는 여전한 의문을 가진 채로 복도를 빠져나갔다.
*
처음에는, 하염없이 나를 찾는 메아리에 모든 사고가 정지해버렸다.
‘설마 진짜 멧돼지라도 만난 거야?’
그러나 곱씹어 생각할수록 아리송했다. 정말 위험한 일이라면 이토록 나를 애타게 찾을 리가 없을 텐데.
게다가 카시안은 마법사가 아니던가?
내가 아는 그라면 야생 곰이 불쑥 나타난대도 끄떡없을 게 분명했다. 도대체 왜 저렇게 소리를 지르는 거지?
애들은? 얘네만 두고 도대체 어떻게 가라고. 진짜 무슨 일이 일어난 건데!
나는 수차례 머리를 쥐어뜯었다.
오도 가도 못 하는 내 눈에 아까 연습했던 활이 들어왔다. 결심한 듯 활을 메고 화살집에 화살을 몇 개 챙겨 담았다. 여차하면 쏴버려야지.
양손에 아이들의 손을 하나씩 잡고 걸음을 서둘렀다.
그들이 향했다던 숲은 생각보다 그리 멀지 않았다. 다만 가문비나무와 전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숲은 입구부터 햇빛 한 자락 없이 어두컴컴했다.
“공작님…? 펠릭스…?”
괜히 우리가 위험해질까 봐, 최대한 조심스럽게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숲의 안자락으로 들어갈수록 공기는 서늘해졌다. 아이들의 발걸음도 음침한 분위기 탓에 조금씩 느려지고 있었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을 때, 머지않아 두 남자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나는 거의 뛰다시피 했다. 그리고 드디어, 카시안과 펠릭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니까….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몰골로.
“대체 지금 이게 무슨….”
정말 장관이었다.
하나는 하늘로 솟아있고, 또 하나는 땅에 박혀 있었으니까.
… 정확히 말하자면, 펠릭스는 그물 덫에 걸려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카시안은 땅에 파놓은 땅굴에 처박힌 채였다.
왜 이러고 있는 거야…?
설마 달리기하다가 덫에 걸린 거야? 그것도 둘이 같이?
“시아라. 나 좀. 나 좀 구해줘요.”
내가 가까이 있던 카시안에게 손을 뻗으려던 찰나, 펠릭스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누나! 안 돼. 저 사람, 아니. 저 공.작.님. 진짜로 제정신 아니야. 나 구해줘. 나! 저 사람 구하지 말고! 애초에 구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야!”
“…….”
펠릭스를 올려다보면, 이번에는 카시안이 가지 말라 외쳤다.
순간 눈앞이 아득해지며 현기증이 밀려왔다. 하아…. 그냥 이 두 사람한테 활을 쏴버릴까?
당장이라도 화살을 꺼내 들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누르고 그대로 뒤돌았다. 레아와 레오 역시 나와 같은 마음인 걸까. 아이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혀를 끌끌 찼다.
“가자, 얘들아.”
우리는 아무도 구하지 않고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창피해….
너무 창피해서 죽을 것 같아!
*
시아라와 아이들이 떠나고 난 숲은 무거운 적막만 감돌았다.
“… 이제 만족하시나요?”
“그닥.”
이 상황에서도 차분함을 유지하는 남자를 보며, 펠릭스는 진심으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확실해. 미친놈이야. 진짜 미친놈.’
그는 분노의 한숨을 내쉬며 아까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갑작스레 불타오른 승부욕으로 경쟁을 펼치던 카시안과 펠릭스. 그들은 왜 반환점도, 결승지점도 정하지 않았을까?
너무 열정적으로 달리기에 몰입한 그들은, 서로가 멈추거나 되돌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앞만 보고 계속 달렸다.
그렇게 그들은 순식간에 울창한 나무들이 동굴처럼 지붕을 만든 다른 구역에 도착했다.
앞서 뛰던 사람은 카시안이었으나 펠릭스 역시 빨랐다. 그들은 계속해서 엎치락뒤치락 반복했다.
“어?”
그때, 펠릭스는 본능적으로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어어? 어어어어?”
멈추려고 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그는 멧돼지 포획용으로 설치한 그물 덫에 걸려서 순식간에 나무 위로 빨려 올라갔다.
아델트 공작은 그제야 달리는 것을 멈추고 펠릭스의 아래에 섰다. 공작의 얼굴에는 조롱과 비웃음이 한껏 걸려있었다.
“꼴 좋네.”
“… 그러지 말고 도와주시죠?”
“공손하게 말해 봐.”
“…….”
“싫으면 어쩔 수 없고.”
카시안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아! 자, 잠깐만요!”
다급한 그의 외침에 카시안은 느긋하게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펠릭스의 얼굴을 보자, 얼마 전 그가 시아라를 껴안고 있던 장면이 불쑥 떠올랐다.
“… 도와주세요.”
“공작님도 붙여야지.”
“도와주세요, 공작님.”
“싫은데?”
“하. 저 봐. 내 저럴 줄 알았다니까?”
그 말에도 카시안은 태연하게 웃을 뿐이었다. 가볍게 돌아서는 그를 보며 잔뜩 약이 오른 펠릭스가 이기죽거렸다.
“가세요. 저는 누나 부를 거니까.”
남자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 누……!”
펠릭스가 힘껏 소리치려던 순간, 갑자기 아델트 공작이 땅바닥에 있던 나뭇가지를 발로 쓱 치웠다. 그러자 깊게 파놓은 구덩이가 나타났다.
카시안은 그 안으로 쏙 들어갔다. 품위를 잃지 않겠다는 듯 여유롭게 제복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기까지 했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행동에 펠릭스가 눈을 수차례 비비고 다시 떴다.
아델트 공작이 시아라를 목청껏 부르기 시작했다. 펠릭스는 이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