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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맞고 튀었는데 공작님이 집착한다-32화 (32/135)

32.

“그날 잘 들어갔어요? 자꾸 생각이 나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부쩍 가까워진 카시안의 목소리에 나는 질끈 감았던 눈을 슬쩍 떴다.

“죄송해요. 그날은 제가 좀….”

“좀?”

“… 취했었나 봐요. 아니, 취했어요. 진짜 진짜 죄송해요.”

그러자 그가 능글맞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 나쁘진 않았지만.”

“네…?”

“하나도 기억 안 나요?”

“그러니까 어떤 기억을 말씀하시는 건지….”

카시안이 손가락으로 제 턱을 쓸었다.

“그건 좀 아쉽네. 꼭 기억 해봐요.”

“… 네에.”

“다음부터는 술 마시지 말구요.”

나는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그날 공작님께서 마차도 준비해주신 덕분에 집에 잘 들어왔어요. 감사해요.”

“뭘 그런 걸로.”

느긋한 표정으로 그제야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던 카시안이 펠릭스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친구는 시간이 많은가 봐?”

갑작스러운 그의 질문에 펠릭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요?”

“내가 볼 때마다 같이 있기에. 시간이 남아도는 거라면 내가 일자리라도 하나 알아봐 줄까 하고.”

“그건 제가 묻고 싶은데요.”

펠릭스가 사뭇 날카롭게 대꾸했다.

“아델트는 참 대단한 곳이네요. 공작님께서 이렇게 늘상 여유를 즐기셔도 잘 돌아가는 걸 보면.”

“응. 내가 그 정도로 유능하거든.”

“웃기지….”

삐딱하게 뒤틀린 펠릭스의 입술이 열리려 하자, 내 손바닥으로 그의 입을 다급하게 막았다.

“그만! 그만하고 자리에 앉아. 공작님도, 누추하지만…. 여기 돗자리에 앉으세요.”

두 사람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카시안이 먼저 털썩 앉아, 펠릭스도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야속한 시간은 빠르게 가는 법을 몰랐다.

우리 세 사람 사이에 별다른 말이 없자, 흥미를 잃은 레아와 레오는 그새 꽃밭으로 사라져버렸다.

‘어색해…. 어색해서 죽을 것 같아!’

나는 애꿎은 잔디만 손으로 쭉쭉 잡아 뽑으며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이 날숨으로 땅굴까지 팔 수 있겠다고 생각할 즈음, 펠릭스가 또다시 자신의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래. 뭐든 쓸 만한 것 좀 꺼내봐. 제발!

그가 호기롭게 꺼내든 것은 활과 화살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가 과녁이 그려진 가죽을 들고, 한참 앞에 있는 나무로 향했다. 그것을 나무에 고정시키고 돌아오는 그의 표정에서 사뭇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누나. 활 쏴본 적 있어?”

“아니.”

“그럼 내가 알려줄게.”

“넌 쏠 줄 알아?”

“당연하지! 내가 말 안 했나? 우리 아빠 예전에 사냥꾼이었어. 그러니까 나만 믿어. 나 완전 잘 쏴!”

펠릭스는 몸소 시범을 보여주겠다며 가방에서 화살 한 대를 뽑아 들었다.

“먼저 이렇게 활대를 단단히 잡고, 화살을 시위에 걸어. 그리고 당기면 되는데….”

그는 신중하게 표적을 조준하고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그러나 호기롭던 기세와는 다르게, 화살은 맥없이 아래로 툭, 추락했다.

한 번 더 시도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어라? 뭐가 문제지?”

한참이나 고심하는 그의 눈썹 가운데가 꿈틀거렸다.

“으음…. 내가 한 번 해볼게.”

활을 쏘는 것은 완전히 처음인지라 퍽 낯설었다. 그래도 펠릭스가 일러준 대로 활을 집어 들었다.

한쪽 눈을 지그시 감고 조준할 과녁에 집중하려던 찰나, 언덕 너머 저편에서 새떼들이 줄지어 이동하는 것이 보였다.

문득 그제야, 내게 철새냐고 빈정대던 소피아가 떠올랐다.

“맞다! 펠릭스, 너 소피아 알아?”

“누구?”

“소피아. 소피아 엘링턴.”

그 질문에 펠릭스가 한쪽 눈썹을 위로 치켜뜨며 잠시 생각하더니, 담담하게 답했다.

“응. 아는 것 같은데.”

“같은데? 무슨 대답이 그래.”

“내가 그 애를 아는 게, 지금 중요해?”

“그, 그거야….”

미래에 네 여자친구가 될지도 모르는데, 안 중요한가?

“쓸데없는 질문 하지 말고. 앞부분을 더 단단하게 잡아서 고정해 봐. 그리고 이 활시위를….”

시위를 당기는 내 손 위로 펠릭스가 손을 겹쳤다.

그 모습을 옆에서 그저 물끄러미 지켜보던 카시안이, 그 순간 그의 손을 탁, 쳐냈다.

“거기가 아니라.”

갑작스레 내 귀에 와 닿는 그의 숨결에 활대를 쥔 왼손에 힘이 더욱 들어갔다.

“더 아래. 여길 잡고.”

어느새 그의 양손이 내 두 손을 감싸 쥐었다. 그가 내 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천천히 시위를 당겼다. 서서히 내려오던 그의 차가운 손가락이 내 귓바퀴를 스치자,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는 듯했다.

“이렇게 수평이 되면, 자연스럽게 줄을 튕기는 거예요.”

현이 퉁기는 반동과 함께, 쏜살같이 날아간 화살이 과녁 한가운데를 꿰뚫었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에 박혔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화살이 우리 손을 떠난 지 오래였지만, 그의 손은 여전히 내 손 위에 포개진 채였다. 게다가 어찌나 가까운지. 그가 나를 안고 있는 것과 다름없는 자세였다.

나는 어찌할 줄 몰라 허둥대며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뒤로 밀려난 펠릭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넋이 나간 채로 우리를 쏘아보고 있었다.

불쑥 낯이 뜨거워진 내가 재빠르게 카시안의 품을 벗어났다.

“한 번 혼자서 해봐요.”

“네, 네!”

나와 다르게 태연한 그를 보자 살짝 약이 올랐다.

*

“와아아! 또 명중이야! 보셨어요? 펠릭스, 너도 봤어? 지금 계속 가운데에 정확히 맞고 있는 거?”

나는 기쁨에 겨운 어깨를 한껏 들썩거렸다.

카시안과 함께 연습한 뒤로 그의 조언을 따라 차분하게 활을 쏘았고, 결과는 족족 명중이었다.

나 꽤 소질 있는 거 같은데?

옆에 서 있던 펠릭스를 향해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그가 눈을 내리깔며 투덜댔다.

“쳇. 알고 보니까 집에서 혼자 연습했던 거 아니야?”

“오늘이 진짜로 처음이거든?”

“아무리 봐도 이상해.”

“참나. 한 번 더 쏴봐? 보여줘?”

펠릭스는 혹시라도 내가 속임수를 쓴 것은 아닐지 눈을 날카롭게 떴다. 입술을 삐죽거리며 나를 유심히 살피는 그에게 보란 듯, 나는 힘껏 당긴 시위를 한 번 더 가볍게 튕겼다.

“이것 봐! 봤지?”

눈을 질끈 감은 펠릭스가 탄식을 내뱉었다.

“… 말도 안 돼…. 왜 이렇게 잘하는 거야?”

나는 폴짝폴짝 뛰며 카시안을 향해 돌아섰다.

“저 잘했어요?”

그러자 그가 나를 따라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네. 엄청.”

그가 기특한지 내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했다. 그러나 한참동안 아무런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손을 들었는데?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갑자기 확 굳는 것이었다.

“공작님…?”

“시아라. 잠깐만.”

“네?”

“여기. 여기 왜 그래요?”

카시안이 내 목과 쇄골 언저리를 응시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영문을 모르는 나 역시 그의 시선을 따라 목을 만지작거리다가, 목에 남은 상처의 존재를 퍼뜩 깨달았다.

멍 자국이 거의 사라진 터라 나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원피스 카라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것이, 방금 내가 방방 뛰면서 보인 모양이었다.

그가 손가락으로 슬며시 상처를 쓸었다.

“언제 그랬어요, 이거?”

“… 공작님도 모르세요? 안 그래도 여쭤보려고 했었는데.”

“설마….”

“무도회 다음 날 집에서 확인해 보니까 이렇게 되어있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아무 기억도 없고….”

나는 쭈뼛쭈뼛 말문을 떼었다.

“… 엘리나 트리탄….”

그러자 카시안이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 엘리나?”

“아니에요. 하아…. 병원은? 약은 발랐어요?”

“괜찮아요. 약도 잘 바르고, 자국도 거의 다 없어졌는걸요.”

“… 미안해요.”

“공작님이 왜요?”

“내가 다치게 만든 것 같아서.”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공작님이 제 목 조르신 거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그럼 미안해하지 마세요.”

“…….”

그때, 한참을 꽃밭에서 뛰어놀던 쌍둥이가 쪼르르 달려왔다.

“펠릭스 형아. 우리 같이 달리기 시합하면 안 돼?”

“달리기?”

“응! 공작님이랑 형이랑 다같이!”

“와아! 레오야, 그거 진짜 좋은 생각이다! 그쵸, 공작님? 펠릭스?”

레오의 부탁에 나는 이때다 싶어 거들었다. 아직 서로를 잘 모르는 카시안과 펠릭스가 조금 친해졌으면 하는 마음이 다분했다.

“저는 여기 정리하고 바로 갈게요.”

“뭐? 싫어!”

“정리는 나중에 하고, 지금 같이 가요.”

“안돼요. 여기 널브러진 화살들 좀 보세요.”

나는 단호하게 대꾸했다.

“그럼 함께 치우면….”

“… 애들이 기다리는데.”

실제로 레아와 레오는 한껏 기대에 들뜬 얼굴로 오매불망 두 사람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알겠어요.”

두 남자는 서로를 흘깃 쳐다보더니 으르렁거렸다. 그 모습이 꼭 늑대 앞에서 깨갱하는 강아지를 보는 것 같아서, 약간은 측은한 마음도 들었다.

펠릭스. 나 누구라고는 말 안 했다?

*

펠릭스는 지금 이 상황이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공작이 도대체 여기를 왜 와?’

저번부터 보자보자 하니까. 이 사람 진짜 시간이 남아도는 거 아니야?

게다가 시아라와 더욱 가까워질 요량으로 꺼낸 활. 그것을 기점으로는 주도권이 아예 저쪽으로 넘어가 버린 것 같았다.

펠릭스는 그녀를 거의 껴안은 자세로 있던 아델트 공작을 보며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마음에 안 들어. 진짜! 너무너무 마음에 안 들어!

레오의 손을 잡고 달리기할만한 마땅한 장소를 찾아 발걸음을 옮기는 중에, 아이가 물었다.

“펠릭스 형아. 형은 달리기 잘하잖아. 그치?”

“당연하지. 저번에 형이 너 안고 엄청 빠르게 뛰었던 거 기억나지?”

“응! 그때 진짜 진짜 빨랐어! 토끼! 완전 토끼였어!”

아이의 긍정에 펠릭스가 만족스러운 듯 우쭐거렸다. 그러자 레아가 카시안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공작님은요? 공작님도 펠릭스 오빠처럼 빨라요?”

“내가 더 빨라.”

“다람쥐처럼?”

“응.”

“참나. 해보지도 않고.”

꼭 저렇게 입만 산 사람들이 나중에 져놓고 울고불고하더라니까?

펠릭스가 투덜거리자 카시안은 그를 비웃었다.

“결과를 안 봐도 뻔한 경기에도 내가 힘을 써야 하나?”

“지금 저한테 도전하시는 건가요?”

“내가 네 도전을 받아주는 거겠지.”

“하…!”

“질 것 같으면 이만 내려가시던가.”

“지긴 누가 진다고!”

“네가.”

펠릭스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억지로 웃어 보였다.

“붙으시죠.”

그의 눈이 승리를 향해 이글거렸다.

그렇게 두 남자가 나란히 출발선에 섰다. 아이들은 심판을 자처했다. 하얀 손수건을 꺼내어 팔을 높이 들어 올리더니,

“준비!”

탕- 소리와 함께 팔을 내렸다.

두 남자가 뒤에서 맹수라도 쫓아오는 것처럼, 정말 빠르게 달렸다. 그러나 어디까지 간 건지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금세 지루해진 레아와 레오는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나비에 홀라당 정신이 팔려 버렸다.

“나비다! 우리는 나비랑 놀자!”

그러다가, 쓰러진 팻말 하나를 발견했다.

“이건 누나한테 선물 주자. 꽃놀이 기념선물.”

“그래! 우리는 얼른 돌아가자,”

레오는 팻말을 바닥에 질질 끌며 걸음을 옮겼다.

잔디가 스치며 팻말을 뒤덮은 먼지를 조금씩 걷어내고 있었다. 그러자 서서히 글자가 보였다.

경고.

이 숲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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