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계단에서 추락한 루이자가 깨어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엘리나에게 큰 두려움을 주지는 못했다.
‘내가 뭘? 내가 잘못한 게 뭐라고?’
누가 거기서 뛰어내리라 등 떠민 것도 아니고. 시킨다고 떨어진 놈이 멍청한 거지. 안 그래?
다만 짜증스러운 것은, 그 사건으로 인해 아델트 저택에 마음대로 드나들기가 퍽 어려워졌다는 점이었다. 특히 그녀, 엘리나 트리탄은 공작의 명령으로 아예 출입이 금지된 상태였다.
‘그냥 그 자리에서 죽었으면 얼마나 편해.’
그녀의 고운 미간이 못마땅하다는 듯 무참하게 구겨졌다.
정문에서부터 퇴짜를 맞고 다시 별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하필 말 하나가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엘리나 아가씨. 잠시 마차에서 대기하셔야 합니다.”
마차 안에 홀로 앉아있으면서도 귀족 특유의 우아하고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던 그녀의 눈에, 때마침 한 남자가 들어왔다.
‘저 남자는?’
비록 무도회에서 공작의 뒤를 캐보려던 엘리나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갔지만, 아무 수확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날 그녀는, 아주 흥미로운 장면 몇 가지를 목격했다.
소피아 엘링턴. 그간 세상 똑똑한 척하며 티 나게 엘리나를 무시해오던 그 애가 남자와 함께 등장했다. 엘리나가 몇 번이나 그녀를 비밀무도회에 초대했지만, 그때마다 돌아오던 대답은 한결같았다.
[“제가 그따위 허접하고 천박한 무도회에 왜 가야 하죠?”]
그랬던 그녀가 아델트 무도회에 나타나다니. 그것도 그녀가 진절머리 치던 귀족 영식을 파트너로 삼아서? 붉은 머리와 눈동자라면. 레트랑 가문의 후계자였던가?
그러나 기대와 다르게, 그 둘의 분위기는 김이 팍 샐 정도로 냉랭했다. 오히려 그 남자의 시선은, 노골적이고 집요할 정도로 한 여자에게 향해있었다. 공작과 춤을 추던 시아라, 그녀에게.
‘분명 두 사람 사이에 뭐가 있단 말이지?’
엘리나는 그때부터 라튼의 뒤를 쫓았다.
발코니 바닥에 주저앉은 라튼 레트랑이 질질 짜던 모습. 다시 돌아온 아델트 공작이 그에게 모욕을 주던 것까지 모두 확인한 엘리나가 빙그레 웃었다.
그런 라튼 레트랑이 어딘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숲을 거닐고 있었다. 엘리나는 그가 제 앞을 지나갈 시간에 맞추어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처량하게 눈물을 떨구기 시작했다.
“맞아요. 이게 다…, 시아라. 그 여자 때문이에요.”
일부러 시아라의 이름을 언급하자, 라튼의 새빨간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딱, 그녀가 예상했던 대로.
그 와중에도 기사도를 발휘하며 엘리나를 달래던 라튼이 그녀를 향해 말했다.
“… 여긴 장소가 좋지 않군요. 자리를 옮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엘리나는 자신의 마차로 라튼을 안내한 후, 마부에게 대화를 나눌만한 가까운 곳으로 향하라 명했다. 그렇게 그들은 아델트 시장에 도착했다.
환한 대낮에 옷을 갖춰 입은 귀족들이 시장 한복판을 거니는 일은, 아델트에서 드문 일이었다. 거의 모든 귀족과 부자들은 상업지구를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지금, 다수의 관심이 그들에게 향한 것은 무척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엘리나는 아직까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으니. 이러한 부담스러운 상황 탓에, 라튼은 잰걸음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널찍한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프란츠 레스토랑입니다.”
유명한 곳인지 그 내부는 손님들로 가득했다. 그러나 명석한 가게 주인은, 그들의 옷차림과 울고 있는 엘리나를 보더니 안쪽에 있는 방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커피 주문을 완료하자 주인이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고 나갔다. 문이 완전히 닫히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라튼이 조급하게 물었다.
“그래서…. 시아라가 당신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건가요?”
“네. 맞아요.”
“… 그건 말이 안 됩니다.”
“레트랑 백작 영식께서는…. 그 아이를 얼마나 아신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만큼 그 애를 아는 사람은 이 제국에 없을 겁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물론이죠.”
그러자 엘리나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고개를 좌우로 휘저었다.
“아뇨. 라튼 레트랑,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요.”
그 말에 라튼이 눈을 치켜떴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혹시. 이 제국에서 가장 위험하다는 비밀 무도회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비밀 무도회라면….”
잠시 생각하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를 리가 없지. 그의 엄마 틸다가 그곳에 몇 번이고 다녀온 적이 있으니까.
“소문으로만 들었습니다.”
엘리나가 자신의 분홍색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요염한 눈길로 그를 마주했다. 한참을 울어서 새빨갛게 물든 눈가가 그녀를 더욱 연약한 꽃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 사교 모임의 주최자가, 바로 저랍니다.”
“그게 무슨….”
“제가 시아라를 처음 만난 것도 그 자리였어요.”
“네? 그녀가 거길 왜….”
“아마 그때부터…. 제 것을 하나씩 빼앗으려고 했나 봐요.”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이야기에 라튼은 그저 머리만 흔들었다.
“아뇨. 그럴 리가 없어요.”
그러자 그녀가 눈을 질끈 감으며 다시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 울음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혹여 바깥에서도 다 들릴까 당황한 라튼이 벌떡 일어나 그녀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울지 마시고…. 제대로 설명을 좀….”
어찌할 바를 몰라 머뭇거리던 그가 이내 그녀의 등을 쓸어내리며 위로했다. 어느새 엘리나는 라튼의 어깨에 제 얼굴을 파묻고 더욱 더 진한 눈물을 짜내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그의 하얀 셔츠 앞섶은 이미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한참이나 기대어 울던 그녀가 물기 어린 눈망울로 그를 응시했다.
“혹시…. 저를 의심하시는 건가요?”
“의심이라뇨! 아닙니다. 저는 그저 이해가 되질 않아서…….”
머뭇거리는 라튼을 향해 그녀가 고개를 비뚜름하게 기울이며 물었다.
“어떤 점이 그리 혼란스러우신가요?”
“… 그 무도회는 자격이 있는 귀족만 초대받는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녀가 긍정했다.
“그런데 시아라는…. 그럴 수가 없어요.”
“왜죠?”
“… 그녀는 몰락 귀족의 딸이니까요.”
그러자 갑자기 엘리나의 동공이 커지며, 그녀가 새된 목소리로 되물었다.
“네에에? 몰락 귀족의 딸이요? 그게 정말인가요?”
뜻하지 않게 시아라의 비밀을 발설해 버린 꼴이 되자, 라튼이 진땀을 흘렸다.
무엇보다 좀 전과는 다른 그녀의 태도가 그를 더욱 당황스럽게 했다. 엘리나는 더 이상 울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웃고 있었다. 숨길 수 없는 환희가 만면에 그득 차 있었다.
“아, 아니. 그게 그러니까…!”
뒤늦게 그가 해명하려 했으나, 자신의 머리카락을 지나 귓바퀴 뒤로 살며시 다가오는 그녀의 손길에 그의 말문은 막혀버렸다.
“비밀이군요? 걱정 마세요. 원래 비밀이 재밌는 법이잖아요?”
한 뼘 뒤로 물러난 엘리나가 팔짱을 끼고 조소했다.
그러나 막상 그 소식에 놀란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그녀가 시아라를 처음 보았던 부티크에서, 그녀는 아주 돈 많은 부잣집 귀족 영애처럼 돈을 펑펑 써댔으니까.
물론 시아라의 말씨나 행동거지, 첫 만남 당시의 차림새를 고려한다면 저 남자의 말이 아예 틀린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많은 돈이 어디서 난 걸까?
‘뭐야. 결국 너도, 아델트의 돈이 필요한 거였어? 그 돈으로 여태 놀고먹었나 보구나?’
조금씩 맞춰지는 퍼즐에 엘리나가 입꼬리를 길게 늘였다.
“그런데, 레트랑 영식은 시아라와 무슨 사이인가요? 얼마나 가까운 사이기에 그런 정보를 다 알고 계신 거죠?”
일순 그가 공허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야 제가 남자친구니까요.”
그 말에 엘리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한심해라. 너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고? 그를 한껏 조롱하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그것만큼은 참아냈다.
그래도 이 남자는, 다루기 어려웠던 아델트 공작보다야 훨씬 이용하기 편해 보였으니까.
그녀의 날카로운 웃음소리에 살짝 빈정 상한 라튼이 미간을 티 나게 좁혔다. 그러나 엘리나는 천연덕스럽게 그의 셔츠 옷깃을 정리하며 그를 달랬다.
“죄송해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만.”
“뭐가 말입니까?”
“아니, 그렇잖아요. 시아라 그 애는 남자가 있으면서도 제 약혼자를 뺏어간 거니까.”
그 말에 라튼이 분노로 이를 갈았다.
“라튼 레트랑 씨. 당신은 이 모든 사실을 알고도 그 애를 지킬 건가요?”
“당연합니다.”
확신에 찬 그의 대답에 엘리나가 미묘하게 웃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제 하녀 하나가 말이에요.”
그녀의 말을 경청하던 라튼의 얼굴이 점차 새파랗게 물들어 갔다.
*
자꾸만 들려오는 바스락 소리에 편히 누워있던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필 지금 같은 상황에 멧돼지 조심하라던 청과물 아저씨의 조언이 떠오를 건 또 뭐야?
집중하면 할수록 더욱 가까워지는 수상한 발걸음은, 우리가 올라왔던 곳의 반대편에서 났다. 일단 아이들의 안전을 제일 먼저 확인한 뒤, 사뭇 날렵한 걸음걸이로 한 발자국씩 발을 떼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아래쪽을 살펴보았더니, 검은 제복을 입고 있는 남자의 인영이 나타났다. 점점 선명해지는 그의 모습에 나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 공작님?”
카시안이 눈을 접었다.
“찾았다.”
뭐야, 여기는 또 어떻게 알았지?
영문을 몰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내 눈동자가 펠릭스와 마주쳤다.
그의 표정은 더욱 볼만했다. 그는 뭔가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는지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인상을 찡그렸다.
“누나가 불렀어?”
“뭐? 그럴 리가.”
“그럼 저 남자가 여길 왜…!”
나는 과거에 카시안의 앞에서 실수를 저지르고 쩔쩔맸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한 과오를 펠릭스가 똑같이 범하지 않기를 바라며, 대놓고 적대감을 내비치는 그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그러자 그가 눈을 내리깔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 상황이 불편하고 민망한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시안의 저택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온 이후로 그를 처음 보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저 멀리 조그맣게 보이는 제국의 수도를 응시했다.
그런데, 갑자기 꽃밭에서 아이들이 재빠르게 달려 나왔다.
“공작니임!”
특히 레아는 내가 책을 읽어줄 때나 특별히 보여주는 함박웃음을 머금은 채였다.
그녀는 카시안에게 풀썩 안겼다.
“공작님. 수수께끼 다 풀었어요?”
“응. 너무 쉽던데.”
그러자 그녀가 작게 키득거렸다.
“다음번에는 더 어렵게 할 거예요.”
“그것도 기대할게.”
카시안이 레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상냥한 미소를 머금었다.
“누가 지금 이 상황 설명 좀…?”
내 질문에 카시안이 레아를 바닥에 내려주고, 그녀의 손을 잡고 내게 가까이 왔다.
“초대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누구한테요?”
그가 짧은 머리를 양쪽으로 묶은 꼬마 아가씨의 작은 손을 들어 올렸다.
“우리 다 같이 놀자, 언니!”
카시안을 더 가까이에서 마주하자 내 술주정이 떠올라 부끄러움이 용솟음쳤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깨물며 좌절했다.
내 앞으로 성큼 다가온 카시안이 허리를 굽혀 내 눈과 그의 눈이 평행하도록 만들었다.
“그날 잘 들어갔어요? 자꾸 생각이 나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그의 나른한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