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나는 프란츠 레스토랑에서 나와 문 바로 앞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방금 막 사서 나온 와플을 한 입 베어 물자 그 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왜 사람들이 이 조그만 간식 하나에 열광하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만했다. ‘내 인생에 사업이란 없어!’라는 나의 큰 결심마저 포기하고 곧장 투자하고 싶게 만드는 맛이었으니.
꽃구경 간다고 신난 레오와 레아가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여유롭게 커피도 한 모금 마시고 있을 때였다.
바로 옆에서 청과물 주인과 한 손님이 나누는 대화가 자연스레 들려왔다.
“자네, 지난주에 마이크 씨 댁 농장 소식 들었는가?”
“그 멧돼지 떼가 습격한 거 말이지?”
“그래. 그 날랜 놈들 때문에 밭이 아주 만신창이가 되었다는군.”
“쯧. 그게 어디 그 농장뿐이겠는가.”
손님이 시장 벽보 한가운데에 붙은 종이를 가리켰다.
“그러니 포상금이 저렇게 어마어마하지.”
“그것참 큰일이야.”
청과물 주인이 갑자기 나에게 고갯짓했다.
“이봐, 아가씨. 아가씨도 멧돼지 습격 조심해.”
“네?”
“요새는 어디를 가도 기승이라니까, 글쎄.”
“아아…. 그렇구나. 네, 알겠습니다.”
나는 아저씨의 충고를 한 귀로 흘려들었다.
내가 멧돼지를 만날 일이 뭐가 있다고?
잠시 후, 레스토랑에서 쌍둥이가 꼬까옷을 입고 등장했다. 한나는 저렇게 예쁜 옷들을 도대체 어디서 사는 거람? 봄에 맞게 노란색 옷을 입은 아이들이 삐악거리는 병아리처럼 앙증맞게 걸어 나왔다.
한나는 놀러 가서 먹으라며 바구니 하나를 내 품에 안겼다. 방금 먹은 와플을 비롯해 티라미수와 꽈배기 도넛까지. 그 밖에도 어찌나 뭐가 많이 들었는지. 내 체구보다 훨씬 커다란 바구니는 뚜껑도 제대로 닫히지 않을 지경이었다.
때마침 펠릭스 역시 도착했다.
“너는 혼자 어디 이사라도 가는 거야?”
그의 등 뒤로 산봉우리처럼 솟아있는 짐이 보였다. 얘도 로또 된 거 아니야? 어디 잠적이라도 할 기세네.
“손수레를 끌고 오지 그랬어. 아주 어깨 빠지겠다.”
“그런 거 아니거든?”
그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나는 한나의 바구니와 펠릭스의 짐을 번갈아 확인했다. 이미 내가 상상했던 아기자기한 피크닉은 망했지 싶었다.
*
라튼 레트랑은 벌써 나흘째, 아델트 저택 별채의 손님방에 묵고 있었다. 물론 그라고 이 오만하고 거지같은 공작의 저택에 오래 머무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델트에서 시아라를 닮은 여자를 보았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그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서 오기 전부터 결정한 일이었다. 그런데 진짜로, 그녀가 이곳에 있었다. 게다가 아델트 공작과 퍽 가까운 사이처럼 보이지 않았던가.
그는 아델트 공작이 자신을 내려다보며 지었던 표정을 다시 한 번 상기했다. 시아라를 대할 때와는 완전히 상반된 얼굴. 너무도 극명한 차이가 말하는 바를 라튼은 곧바로 알아차렸다. 그녀를 향한 그자의 연정을.
그렇다면 시아라는 어떠했던가? 그녀의 마음도 그와 같을까?
순간, 자선 경매장에서 두 사람이 웃으며 속닥거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나 라튼은 고개를 내저었다. 절대로 그럴 리 없잖아.
힘든 일을 겪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을 베풀기가 쉬웠을 테지. 마음에 여유가 없을 테니까. 분명 아델트 공작이 금전적으로 도움을 준듯하니. 그래서 고마운 마음에 웃어준 것뿐일 거야.
하루빨리 다시 시아라를 만나야만 했다. 그녀가 자신에게 화를 내긴 했지만, 격해진 감정 탓일 거라고. 그저 치기 어린 분노였을 거라고, 그는 스스로 합리화했다.
그녀에게 최대한 불쌍한 척하기 위해 매번 이용하던 눈물 연기를 다 들켜버렸으니. 이제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만 했다. 물불 가리지 않고 그녀를 뺏어 오리라 마음먹은 그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당겨진 살갗 위로 꼴도 보기 싫은 검은 자국이 함께 늘어났다. 또다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건 도대체 왜. 왜 아직도 안 지워지는 거야!”
거세게 손등을 문지르는 라튼의 붉은 눈이 형형했다.
그는 며칠 내내 아델트 공작을 만나려고 시도했다. 시아라와의 관계뿐 아니라, 제 손을 이렇게 만든 이유를 추궁하기 위해서. 그러나 무도회 당일 있었던 사고 때문인지 경비는 날로 삼엄해져 갔다. 그 탓에 선약이 없는 외부인은 저택의 본채에 일절 출입금지 된 상태였다.
정원에서 수차례 그를 기다려도 보았지만, 그의 옷자락조차 볼 수 없었다.
복도로 나온 라튼이 건너편 방을 응시했다.
그 방에 묵고 있는 소피아 엘링턴은, 어찌 된 일인지 무도회 이후로 그에게 단 한마디도 걸지 않았다. 복도에서 그를 마주쳐도 모르는 사람처럼 쌩 지나칠 뿐이었다.
하긴. 저 여자는 원래 자기 멋 대로였으니까. 어차피 그도 그녀와 잘 지내고 싶은 마음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다.
그러나 라튼은, 무도회 다음날 자신의 숙소 창가에서 시아라와 소피아가 서로 부둥켜안고 있던 모습을 목격했다. 이전에는 안면도 없던 사이였으니 분명 이곳에 와서 친목을 다졌을 터. 그런데 도대체 저 둘이 친해질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라튼이 시아라에 대한 기대감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녀들 사이에 공통된 분모는, 오직 라튼 레트랑. 그 하나일 테니. 어쩌면 이 여자가 직접 그녀에게 오해를 설명하고, 시아라는 그것에 감격했던 것이 아닐까?
헛된 바람을 품은 라튼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는 소피아의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저 라….”
문이 열림과 동시에 닫혔다.
그 방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졸지에 쫓겨나 버린 그가 입술을 씰룩거렸다. 그는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해소하기 위해 저택 바깥의 숲으로 향했다.
한참을 길을 따라 걷고 있는데, 숲에서 쪼그려 앉아 울고 있는 아리따운 여인을 발견했다.
“레이디?”
“흐윽…. 어머, 혹시… 레트랑 백작 후계자님 아니신가요?”
“네. 제가 라튼 레트랑입니다. 무슨 문제가 있으신가요?”
그녀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망사 베일이 덧대어진 모자를 들어 올렸다. 그 아래 보이는 애달픈 보랏빛 눈동자가 물기로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저는 트리탄 후작가의 엘리나라고 한답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곳에서….”
“그러니까 그게…. 흐으윽. 저 좀 도와주시겠어요?”
당황하던 그가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지금…. 제 약혼자에게 미움 받아 쫓겨난 신세가 되어버렸어요.”
“네? 쫓겨나다니요?”
트리탄 후작가는 제국의 귀족 가문 중 손에 꼽힐 정도의 부와 권력을 가진 곳이었다. 라튼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과거 레트랑 백작의 뒷배를 자처하던 인물이 트리탄 선대 후작이었으니까.
그런 가문의 영애를 내칠 사람이 도대체 누구란 말이야?
“레이디의 약혼자라면….”
그 질문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던 사람처럼, 엘리나가 재빠르게 말을 꺼냈다. 그러나 크게 상심한 듯 가냘픈 어깨를 한껏 떠는 것을 잊지 않았다.
“카시안 폰 아델트 공작님이요.”
라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장갑으로 가린 손은 파들파들 떨렸다. 손등에 새겨진 검은 낙인 위로 소금이라도 뿌린 듯, 그 상처가 따끔거렸다.
“그 이유가 혹시….”
“맞아요. 이게 다…, 시아라. 그 여자 때문이에요.”
제발 아니길 바랐던 그녀의 이름이 나오자, 그가 피가 날 때까지 아랫입술을 콱 깨물었다.
*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잎이 울려 퍼질 이 언덕은 아델트에서 제일 높은 곳이었다. 이곳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면, 세상 꼭대기에 선 듯한 기분이라고 파울은 말했었다.
그래서일까. 언덕을 오르는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애초에 이건 언덕이 아니라 산이잖아. 산.
모처럼 놀러 간다고 입고 나온 꽃무늬 원피스가 걸을 때마다 발목에 감겨 나풀거렸다. 그냥 운동복 입고 나올 걸 그랬나? 나는 사냥개보다 더 큰 들숨 날숨을 쉬며 한 걸음씩 발걸음을 옮겼다.
저 앞에서 깡충깡충 가볍게 뛰어오르는 레아가 보였다.
“언니. 언니는 혹시 거북이야?”
“그게 아니라….”
내가 멀거니 그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자 펠릭스도 뒤돌았다.
“맞네. 거북이.”
라고 거들던 그도 총총총 사라졌다. 내 옆에는 나와 속도를 맞추며 걷고 있던 레오뿐이었다.
“레오. 너도 힘들구나?”
“누나. 진짜 거북이야?”
레오도 순식간에 앞서 나갔다.
간식 덜 먹고 꼬박꼬박 운동하기. 새로운 목표가 생긴 내 눈이 의지로 활활 불타올랐다.
열심히 그들의 뒤를 쫓아 겨우 정상에 도착했다.
“우와……!”
제일 먼저 나를 맞이한 것은 시원한 바람이었다. 그다음은 꽃향기, 지저귀는 새 소리. 그리고 분홍색 벚꽃잎이 별처럼 쏟아져 내리는 광경.
나는 빙그레 웃으며 언덕의 끄트머리에 섰다.
분홍의 벚나무들 사이로 손바닥 하나에 다 가려지는 아델트 시내가 보였다. 저 멀리는 제국의 수도도 보이는 듯했다. 진짜로, 정말로 세상의 꼭대기에 서 있는 것 같잖아.
상쾌한 숲 공기를 들이마시며 찌뿌듯한 몸을 주욱 늘어뜨리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우리는 볕이 잘 드는 자리를 잡아 돗자리를 깔았다. 정성스레 준비해 온 음식을 꺼내어 하나둘 그 위에 올려두었다. 그 양이 어찌나 많은지, 우리가 앉을 자리는 작은 모서리뿐이었다.
결국, 음식에 자리를 내어준 우리는 돗자리 바깥의 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대형 돗자리라 고 하지만, 생각보다 비싼 가격에 구입했다. 아무렴 어때. 운동 후 진수성찬은, 늘 성공적이니까.
점심까지 먹고 나니 몸이 금세 노곤해졌다. 나는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옷에 녹색 풀물이 들었지만 상관없었다. 코끝에 스치는 바람이 이렇게나 싱그럽고 좋은걸.
레아와 레오는 바로 옆에 있는 꽃밭을 뛰어다녔다. 개나리 옆을 지날 때마다 누가 꽃이고 사람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아이들은 이 언덕의 일부처럼 보였다.
펠릭스는 또다시 주섬주섬 짐을 풀기 시작했다. 마법 주머니도 아니고. 그의 가방에서는 손수건, 모자, 양말 등의 잡동사니들이 끊임없이 나왔다. 그러더니 이내 돌돌 말린 하얀 도화지와 물감, 붓이 등장했다.
“그걸로 뭐 하려고?”
그는 말없이 빈 도화지를 펼치더니, 그 위로 망설임 없이 붓칠을 하기 시작했다.
“그림?”
“응. 취미였거든.”
처음 알게 된 사실에 새삼 감탄하며 그의 종이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래서 뭘 그릴 건데?”
“… 꽃.”
한참이나 도화지에 얼굴을 묻고 있던 그가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다 그리면 꼭 보여줘.”
나는 그를 향해 생긋 웃어 보이고 다시 풀썩 드러누웠다.
그래, 너는 그림을 그려라. 나는 잠을 청할 테니.
평온하다. 평온해. 아주 살만한 세상이야.
까무룩 쏟아지는 잠을 애써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기민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리 주변으로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낯선 발소리를.
[“아가씨도 멧돼지 습격 조심해.”]
순간 떠오른 충고에 눈이 번쩍 떠졌다. 나는 곧장 일어서서 주위를 경계했다.
언덕 아래서, 새까만 형체가 점점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