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나는 아침 해가 밝자마자 서둘러 아델트 병원으로 향했다.
얼른 유모의 병원비를 해결하고 싶었다. 그녀가 아무 걱정 없이 치료받고. 그래서 하루빨리 건강을 되찾을 수 있도록.
펠릭스의 기분이 상하지 않을 만한 방책을 내내 고민했으나, 별다른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날 키워준 유모잖아. 이건 당연히 내가 해야지.
결국, 뻔하디뻔한 후원금이라는 핑계였다. 그저 펠릭스가 묻거든 ‘익명의 후원자’라고 전해 달라 언질 주고 병원을 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새로 생긴 서점을 발견했다. 거기서 레아가 좋아할 만한 책을 몇 권 사고, 그 옆 가게에서는 레오가 좋아하는 나무 장난감도 잔뜩 샀다.
요 며칠 정신 사나운 쌍둥이를 보지 못했던 터라 그런가. 조그만 꼬맹이들이 자꾸만 내 머릿속을 뛰어다녔다. 그러다 보니 양손에 또 선물이 한가득하였다. 그러자 불쑥 그렇게 돈 쓰다가 인생 망한다던 레아의 말이 떠올랐다.
“크흡…. 귀여워…!”
똑똑한 친구들! 오늘은 언니가 잔뜩 놀아줄게!
나는 레아와 레오를 집으로 초대했다.
점심과 간식까지 배터지게 챙겨먹은 우리는 거실 한가운데에서 평온한 일상을 반복했다. 그러니까, 레아에게 책을 읽어주고. 레오와 함께 검을 휘두르는. 그런 별것 아닌 일상을.
정원에 한가득 만개한 꽃을 바라보던 레아가 때마침 외쳤다.
“언니! 우리 피크닉 가자!”
“피크닉?”
“응! 꽃구경!”
쌍둥이의 두 눈망울에 별이 초롱초롱 빛났다.
“그래. 가자!”
푸른 초원 위에 반짝거리는 은색 돗자리. 블루베리잼을 바른 상큼한 에그 샌드위치와 달짝지근한 오렌지 주스.
상상만으로도 평화로워!
그 이후로 우리는 한동안 계획을 세웠다. 세 사람의 얼굴이 저마다의 기대감으로 벅차올랐다. 현관의 초인종이 울린 것은 노을이 질 무렵이었다.
“누구지?”
펠릭스도 오늘은 병원에 있을 텐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현관으로 향했다.
“누구세요?”
얼굴을 빼꼼 내밀어 보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순간, 문 뒤에 서 있던 누군가가 내 몸을 당겨 나를 껴안았다.
펠릭스였다. 그 행동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나는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힘은 또 어찌나 센지. 몸이 으스러질 것 같았다.
“… 펠릭스?”
“…….”
내 귓가에 그의 호흡이 느껴졌다. 숨소리가 심하게 시근대는 것을 보니 병원에서부터 달려온 모양이다.
“고마워.”
“으응…? 뭐가.”
그는 나를 더욱 힘껏 끌어안았다.
“엄마 병원비. 누나잖아.”
“그게 무슨….”
“원무과에 갔다가 들었어. 후원자가 있다고.”
“…….”
“나한테 그런 게 어디 있어.”
울먹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내 인생엔…. 그런 거 하나도 없었단 말이야…. 진짜로…. 없었다고.”
펠릭스는 울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그의 등을 토닥거렸다. 내 손길이 닿을 때마다, 그는 나지막이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근데 왜 하필 누나야. 왜….”
“…….”
“왜 그게 또 누나야…….”
“미, 미안해. 기분 나빴지. 네 의견을 먼저 물어봤어야 했는데….”
“아니, 하나도. 하나도 안 나빠. 그럴 리가 없잖아.”
내 마음도 그와 함께 먹먹해졌다.
“괜찮아. 유모는 꼭 좋아지실 거야. 네가 그랬잖아. 강한 분이시라고.”
내 어깨에 묻은 그의 얼굴이 한참 동안 위아래로 흔들렸다. 맞다고. 그 말이 당연하다고. 최면이라도 걸듯이.
*
카시안은 시아라에게 다시 전해줄 팔찌를 들고 말 위에 올랐다. 그녀의 집에 한 번 더 찾아갈 구실을 만들기 위해 진즉 건네지 않았던 것이었다. 사실 그 기회조차 없었지만.
자신의 침대 위에서 잠들었던 그녀는 아침이 되자마자 안개처럼 사라졌다. 물론 하녀에게 소식을 전해 듣기는 했으나. 아침 식사라도 같이할까 고대하던 그로서는 퍽 아쉬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늘 당당했던 그녀가 부끄러워서 도망쳤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벌써 며칠이 지났건만 그녀의 잔상은 더욱 선명해져만 갔다.
어젯밤에는 그의 창 틈새로 몰래 찾아온 손님까지 있었다. 노란 달빛 한 줄기, 기어코 그것이 그의 밤잠을 설치게 했다.
그녀가 술에 취했던 그 밤. 달빛 아래서 빛나던 그 얼굴이 자꾸만 소환됐다. 도대체 어떻게 잠을 자라는 건지.
그는 얼른 그녀의 집에 도착해서 무한히 떠올렸던 그 얼굴을 마주하고 싶었다. 자꾸만 투레질하는 말을 어르고 달래 그곳에 빠르게 도착했다.
헐레벌떡 달려온 바보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최대한 여유 넘치는 얼굴로 그녀의 집 대문 앞에 섰다.
그러나 카시안이 초인종을 누르기도 전에, 문 틈사이로 정원에 있는 시아라를 발견했다. 분명 친구라던 그 남자가 그녀를 꼭 껴안은 채였다. 어쩐지 자꾸만 거슬리던, 그 남자였다.
“하, 저건 또 뭐야?”
그의 얼굴이 볼품없이 일그러졌다. 미간이 꿈틀거리고 아랫입술이 짓 씹혔다. 그는 주머니 속 팔찌를 굳세게 움켜쥐었다.
양심상 팔찌에 넣었던 마력은 다 제거한 상태였다. … 다시 만들어야 하나? 공격 마법이라도 넣을 걸 그랬나?
“마음에 안 들어.”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당장 들어가 저 둘 사이를 갈라놓고 싶었다. 그러나 그도 알고 있었다. 본인은 아무런 자격이 없다는 것을.
카시안은 결국, 차마 그 문을 열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섰다.
말에 오르기 전 올려다본 하늘에 노을이 내려와 앉았다. 산등성이 너머로 가려진 붉은 태양 주변으로 노란 빛이 넘실거렸다.
짜증스러웠다.
그게 또 하필, 그녀를 떠오르게 했으므로.
*
“펠릭스, 괜찮으니까. 이제 그만….”
“아. 미, 미안해.”
그 말에 한참이나 내 몸을 꼭 붙들고 있던 그의 팔이 맥없이 풀렸다.
펠릭스의 얼굴은 토마토처럼 붉었다. 아직도 식지 않은 땀이 그의 이마를 적셨고 새빨간 눈가는 축축했다.
“엄청 뛰어왔나 봐.”
“병원에서 듣자마자 놀라서.”
“나 진짜 익명으로 부탁드렸는데.”
“간호사분이 그러던데. 어제 왔던 여자친구가 오늘도 왔었다고.”
나는 어제오늘 연속으로 인사를 나누었던 간호사의 의미심장한 눈빛을 떠올렸다.
자꾸 히죽거리면서,
[“펠릭스 씨는 참 좋겠어요.”]
뜻 모를 말을 하길래 그저 걱정거리 하나가 줄어서 그런가 보다 했건만. 여자친구라고 오해해서 그런 거였다니. 복면이라도 쓰고 잽싸게 다녀왔어야 했나!
“근데 누나가…. 그럴 돈이 어디 있다고….”
펠릭스가 우물거렸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일전에 나는 그에게 유산을 상속받아 이 집을 샀다고 말했다. 그러나 내가 망해버린 에벨 가문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모든 것이 의심스러울 터였다.
게다가 병원비가 한두 푼도 아니었고.
“펠릭스. 놀라지 말고 들어.”
나는 사뭇 비장하게 말했다.
“나 사실.”
“응.”
“로또에 당첨됐거든. 헤르본 로또 말이야.”
“뭐?”
“1등에.”
“…….”
그가 가만히 눈만 깜빡거렸다. 꼼짝없이 굳어버린 것을 보아하니, 지금 이 여자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싶은 눈치였다.
“푸핫, 장난이야.”
“아, 진짜인 줄 알고 놀랐잖아! 깜짝이야!”
“바보. 그게 어디 쉽겠어? 그냥. 나 가문이 그렇게 된 이후로 되게 열심히 살았거든. 그래서 좀 돈이 많아, 누나가.”
그가 피식거렸다.
“뭘 했길래.”
“애들은 몰라도 되니까 더는 묻지 마. 유모 병원비는 앞으로도 내가 낼게. 그러니까 걱정하지도 말고.”
“나 그거 다 갚을 거야. 그리고.”
그의 갈색 눈이 이채를 띠었다.
“나 애 아닌데.”
“이렇게 누나한테 쪼르르 달려와서 엉엉 우는 거 보니까 아직 어린애 맞는 것 같은데?”
내가 장난스레 말했다.
그러나 그 말과 동시에 펠릭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무언가 결심한 듯 그의 입술이 단단하게 맞물렸다.
그가 내 앞으로 반걸음 더 가까이 다가와 섰다. 그러자 지척에 선 그의 발이 내 발 끝에 닿았다.
“이제 누나라고 부르지 말까?”
이건 또 뭐라는 거야?
“어린애는 싫어.”
“…….”
“시아라.”
나는 손바닥을 펼쳐 그의 이마를 그대로 팍 밀어버렸다. 그 바람에 펠릭스가 중심을 잃고 뒤로 휘청거렸다.
“이게 자꾸 까불고 있어.”
“아, 누나!”
“그래. 꼬박꼬박 누나라고 해야지. 또 그런 낯간지러운 소리 하기만 해봐. 그때는 이마를 확 때려버릴 테니까.”
“와, 진짜!”
이마를 붙잡고 씩씩거리는 그를 뒤로하고 현관문을 열었다.
“뭐해, 들어와. 밥이나 먹자.”
*
무도회가 끝난 뒤 아델트 공작가의 분위기는 썩 좋지만은 않았다. 연회 막바지에 하녀가 추락했던 사건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그 자리에 있던 다수의 귀족은 그게 별일 아니라는 양 태연하게 굴었다. 여자의 몸에서 쏟아져 나온 선혈을 보며 “징그러워!”, “끔찍해!” 따위의 탄식을 흘렸을 뿐. 그들은 그저 그 하녀가 그럴만한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라 여겼다.
반면에 그 자리에 있던 하녀들은 크게 동요했다. 그 모습이 언제든 자신들의 미래가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그들에게 공포로 다가왔다.
루이자는 저택 본채의 2층 손님방에 있었다. 과거에 그녀와 함께 일했던 아델트의 하녀들이 번갈아 가며 그녀를 돌보았다. 그러나 좀처럼 눈을 뜨지 못했다.
알버트는 차도를 보고하기 위해 카시안을 찾아갔다.
“공작 각하. 루이자는 아직 의식이 없는 상태입니다.”
“곧 엘리나 트리탄이 찾아 올 거야.”
“트리탄 후작 영애께서요?”
“저 애를 죽이려고 하겠지.”
“… 그렇다면….”
카시안이 눈을 날렵하게 떴다.
“저택 안팎으로 보안강화에 힘쓰고. 외부인들, 특히 별채에 머무르는 귀족들 관리 철저하게 해. 혹시 알아? 그중에 첩자라도 섞여 있을지.”
“네. 알겠습니다.”
“절대로. 죽게 두면 안 돼. 그 여자의 속셈이 뭐였는지 알아내야 해.”
“받들겠습니다.”
용무가 끝났음에도 알버트가 집무실을 나가지 않고 그의 곁을 서성거렸다.
“그런데 각하. 그새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저택이 혼란에 빠진 이유는 하녀의 추락 말고도 한 가지가 더 있었다.
무도회에 그의 파트너로 등장한 금발의 여인 때문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술에 취해 공작의 침실에서 자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람?
루이자 사건의 뒤처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던 알버트는 아무런 궁금증도 해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 물어볼 요량이었는데.
왜 또 저기압인 거야?
“… 없어….”
카시안이 비에 쫄딱 젖은 개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저런 주인의 모습을 처음 보는 알버트가 내심 감탄하며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사탕이라도 하나 드려야 하나?’
그런데, 그의 바지 주머니에서 빳빳한 종이 감촉이 느껴졌다.
“아! 이거 말입니다. 어차피 곧 잿더미로 변할 테지만. 아무래도 수상해서요.”
그가 하얀색 종이를 꺼내 들며 말했다.
“뭐가?”
“정체를 알 수 없는 편지가 왔거든요.”
카시안이 그 종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혹시 자객이 보내는 경고장 같은 게 아닐까요?”
알버트의 말에 카시안이 편지봉투의 앞뒷면을 유심히 살폈다. 확실히, 발신인이 적혀있지 않은 이 편지는 매우 의심스러웠다.
그는 봉투를 뜯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거기에는 아주 삐뚤빼뚤한 글씨로 수수께끼 같은 말이 적혀있었다.
- 우리는 토요일에 분홍색 별똥별이 떨어지는 곳으로 떠납니다! 공작님의 큐피드 –
이게 대체 뭔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