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저기…. 잠시만요….”
간호사들이 나누던 이야기는 펠릭스에 관한 것이 맞았다. 나는 그들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후에 곧바로 1층 원무과로 향했다.
그간 밀린 병원비를 내일 모조리 내기로 약속하고, 그곳에서 나오는 길이 아득했다.
물론 내가 가지고 있는 돈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했지만, 펠릭스가 홀로 감당하기에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음이 분명했다. 지금껏 그를 짓눌렀을 부담감을 어찌 모를 수 있을까.
그러나 다시 4층으로 올라가는 길에, 문득 라튼이 했던 말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내 빚을 없애기 위해 자기가 노력한 거라던. 다시 생각해도 또 따귀를 날릴 것이 분명한, 거지같던 그 말이.
[“아, 아니야! 동정이라니…. 난 그저 널 위해서…! 네 빚을 없애기 위해서 그런 거야!”]
나는 그 말을 떠올리며 잘게 몸서리쳤다.
그러자 순간, 펠릭스가 혹 저를 동정했다고 여길까 걱정스러워졌다. 라튼이 내게 그랬듯, 내 행동으로 나 역시 상처를 줄 수 있으니까.
‘흐음, 그게 아닌데. 오해하면 어쩌지.’
마음이 상하지 않게 그를 돕는 법. 뭐가 있을까.
좀처럼 마뜩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다 보니 어느새 다시 병실 앞이었다.
“마리아 루크…. 마리아….”
병실 앞 이름표에 붙은 이름을 입안에서 굴려보았다. 왜 익숙하지?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녀의 곁에 앉아있는 펠릭스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한없이 움츠러든 그의 어깨를 살포시 쓰다듬어 주었다.
“진찰은 잘 받고 왔어?”
“응. 그냥 감기야. 멀쩡하대.”
“아…. 엄마는 약 먹고 방금 막 잠드셔서…….”
“괜찮아.”
내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 어?”
병상에 누워있는 그의 어머니는 핏기 없이 창백했다. 거죽만 남은 얼굴과 몸은 뼈가 다 보일 지경이었다.
그러나 나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유… 모…?”
마리아 루크. 그 이름이 낯설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분명, 어릴 적 에벨 저택에서 날 돌봐주던 유모였다. 과거의 괴로움에 매일 밤 뒤척이던 나를 한없이 토닥여주던. 가문이 망한 이후로도 유일하게 날 아껴주던.
그런 그녀가 누워있었다.
*
“유모…. 엄마가…, 엄마가 말을 안 해.”
아빠가 돌아가신 뒤, 엄마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나는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하녀들을 대신해 직접 엄마의 식사를 챙겨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 이거 한입 먹어 봐요. 제발요.”
그러나 엄마는 고개만 가로저을 뿐,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하루, 이틀, 사흘, 일주일. 무기력한 시간이 흘러갔다.
그녀는 어떠한 의사도 내비치지 않았다. 내 모습이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그냥 가만히 누워 두 눈만 깜빡거렸다.
시체나 다름없었다. 메말라 다 죽어버린 나무. 그게 엄마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그런 엄마 곁에 앉아 그녀가 정말로 죽지 않기를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유모. 엄마도, 엄마도 죽으면 어떻게 해?”
“아니에요, 아가씨. 마님은 강하신 분이니 그럴 리 없답니다.”
“정말로?”
“그럼요. 우리 아가씨, 그러니 아무 걱정 마시고 오늘은 마음껏 우세요. 이 마리아 품에 안겨서 얼마든지 우세요.”
내가 울어도 되는 걸까? 내가 울면….
[“너 같이 재수 없는 계집애가 울기까지 한다면 우리 보육원도 망할까 봐 무섭구나! 당장 그 눈물을 그치지 않으면 이번에야말로 내쫓을 테다!”]
보육원에서 제페토가 내지르던 고함이 귓속에서 윙윙거렸다.
나는 울어도 괜찮다는 유모의 말에도 확신할 수 없었다. 내가 울면. 그래서 불행이 닥쳐와 엄마마저 죽어버리면…!
곧장 샤워실로 달려갔다. 수돗물을 틀고 얼굴을 벅벅 닦았다. 찔끔 흘렸던 눈물을 씻어내고 다 없던 일로 하고 싶었다.
얼굴에 시뻘건 손자국이 남을 때까지 계속해서 문질렀다. 하다못해 두 눈가가 퉁퉁 부어올랐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무서웠다.
내가 울어서…. 그래서 또 무언가가 잘못되면…. 나는 아무것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유모는 그런 나를 단숨에 끌어안았다.
“그만…. 다 괜찮아요, 아가씨.”
내 등허리에 닿은 유모의 품은 온기로 가득했다. 벽난로에 장작이 타들어 가고 있었으나 정작 나를 데운 것은 그녀였다. 너무 따뜻해서 타버릴까 무서울 만치. 그 품은 뜨거웠다.
“정말, 정말로 괜찮아요.”
나는 그 품에서 소리 내어 울었다. 목이 쉬어서 더는 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마음껏 울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 내가 그녀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
“… 유모… 라고?”
펠릭스의 고개가 시아라를 향했다. 그의 눈이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물음에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누나가… 에벨? 시아라 에벨?”
“맞아.”
심장은 빠르게 뛰고 벌어진 입은 좀처럼 다물리지 않았다. 누나가 에벨의 딸이었다니.
에벨 가문이 그리되기 전까지, 엄마도, 할머니도. 그 위의 할머니도 모두 그 가문을 위해 일했다.
그의 엄마 마리아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명망 높은 가문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주인 내외에게 실례를 범하지 않으려 늘 노력했다.
백작 부부 역시 그런 마리아를 아꼈다. 무엇보다 그들은 그녀가 펠릭스를 집에 혼자 두지 않도록 배려했다.
덕분에 그가 갓난쟁이일 때, 그는 그 저택에서 자랐다. 그러니 한때는 그 역시 그 가문의 일부였다. 그즈음 주인 되는 이들의 걱정 하나가 있었다. 가문의 대를 이을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아라가 왔다.
집안의 가신들은 남자아이가 아니라는 점을 의아하게 여겼다. 그러나 부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아이가 너무도 사랑스러웠으므로.
다만 아이는 조금 아파 보였다.
마리아는 매일 같이 수건을 적셔 아이의 조그마한 이마에 올려두었다. 그러면 그 침대 아래 주저앉은 펠릭스 역시 아이를 지켜보았다.
분명 자기보다 한 살이나 많은 누나라고 했는데, 아이는 정말이지 작고 왜소했다.
“나보다 더 어린애 같은데.”
“펠릭스, 아가씨가 지금은 아프셔서 그래. 기운을 차리시면 쑥쑥 자라실 거란다.”
“나만큼?”
“응. 물론이지.”
“얼른 눈떴으면 좋겠다. 나랑 놀게.”
펠릭스는 누워있는 아이가 꼭 정원에 핀 한 송이 노란 프리지어 꽃 같다고 생각했다. 작은 요정이 내려와서 피우고 간 선물처럼, 아이는 작고 소중했다.
엄마가 자리를 비우면 어린 펠릭스는 아이의 옆에 홀로 남아 두 손을 잡고 기도했다.
“아프지 마.”
아팠던 아이가 겨우 정신을 차려 눈동자를 깜빡거리기 시작했을 때, 전쟁에 나갔던 펠릭스의 아빠가 귀환했다.
그 때문에 펠릭스는 다시 아델트로 되돌아갔다.
아직 어린 펠릭스의 기억 속에는 눈부시게 노랗던 아이의 머리카락. 그것이 유일했다.
그 후에 마리아는 주말마다 집에 왔다.
그녀는 펠릭스를 무릎에 눕혀 재우고는 했다. 그때마다 그는 늘 아이의 소식을 물었다. 아직도 아픈지, 이제 키가 자랐는지. 혹 벌써 저보다 큰 것은 아닌지.
그러면 마리아는 작은 아씨에 대해 귓가에 속삭였다.
듣기만 해도 사랑스러움이 묻어났다. 자장가처럼 포근하고 솜사탕처럼 달콤했다.
비록 그 가문이 망해버려 그녀의 소식을 알 길이 없었지만.
그 뒤로 그의 엄마는 아팠고 아빠는 집을 나갔다. 그런 해묵은 그림자와 함께 그가 자랐다.
펠릭스는 늘 아이가 성장한 모습을 그렸다. 비록 상상뿐일지라도, 무너지고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그랬다. 힘들 때면 자연히 떠올랐다.
그러면 그를 할퀴던 두통과 괴로움마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에게 그 아이는 그런 존재였다. 고통에서 데리고 나가고, 늪에 빠져 허우적댈 때마다 빛을 뿌려주는. 그런 구원이었다.
대화 한 번 제대로 나눠 본 적 없는 아이가 어쩌다 저에게 그런 의미가 되었을까 싶었지만. 그래도 인정해야 했다.
그 아이는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동아줄이었으니까. 그의 상상 속에서 절대로 썩을 리 없는.
그런데, 지금 제 눈앞에 있는 그녀라니. 펠릭스는 헛웃음이 나왔다.
“상상이랑 똑같네…….”
“응?”
“아니야.”
그는 그저 웃었다.
그것 말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가 그녀에게 원하는 것들은 모두 허락되지 않은 일이었기에. 한 번 시작한 욕심의 끝이 무엇일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기에.
*
펠릭스와 나는 그 뒤로도 한참이나 병실에 있었다. 그때까지 유모는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많이 야윈 그녀의 얼굴을 보며 여러 못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가 물었다.
“누나. 밖에 나갈까?”
“아니야. 더 있어도 괜찮아.”
“다음에 또 오면 되잖아. 괜찮으니까, 바람 쐬러 가자.”
몸 상태는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보다 훨씬 말짱했다. 다만 아직까지 드는 오한에 코트 깃을 깊숙이 끌어당기고 목도리를 단단히 묶었다.
우리는 병원의 가로수를 따라 걸었다. 걷는 동안 별다른 말없이 그냥 천천히 걷기만 했다.
“많이 아프신 거야?”
겨우 말을 꺼낸 것은 나였다.
“음…. 병원에서도 이유를 모르겠다니까. 그래도 엄마는 강한 사람이잖아. 다시 일어날 거야.”
“강한 사람…. 맞아. 유모는, 꼭 그럴 거야.”
힘들 것이 분명함에도 펠릭스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가 애쓰는 이유가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안다. 내려놓는 순간 무너질 것 같은 그 마음을 안다. 그 또한 나였기에.
순간 감정이 울컥 솟구쳤다. 눈가가 저릿했다. 그러나 그가 하듯이, 나 역시 울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데도 한 방울이 툭 떨어지는 것은 막을 길이 없었다.
“누나가 왜 울어. 울지 마, 누나.”
“미안. 안 울려고 했는데. 미안해. 유모가 아픈 줄은 몰랐어.”
“그게 누나 탓이 아니잖아.”
“그래도…….”
미안해. 난 유모가 날 버리고 간 줄 알았단 말이야. 한때 그녀를 원망한 적도 있었음을 인정하자 더욱 죄스러웠다.
그의 손이 내 어깨 위 허공에서 멈췄다. 하지만 내려오길 주저했다. 그러기를 얼마 후, 그 손이 어깨 끝을 살짝 스치고 떨어졌다.
“울지 마. 엄마 일어나면 내가 누나 울렸다고 혼나겠다.”
그가 먹먹하게 웃었다.
“엄마한테 많이 들었었는데. 에벨가의 작은 아가씨. 그게 누나였구나.”
“내 얘기를?”
“응. 엄청 많이.”
“혹시, 욕… 이라도 하신 건 아니시겠지?”
나는 진심으로 걱정이 되어 물었다. 내 평판에 대해서는 나 스스로가 제일 잘 아니까.
“으음, 글쎄? 어디 한 번 맞춰봐! 그보다. 키는 여전히 작은 것 좀 봐!”
“뭐?”
“나보다 더 클까 봐 긴장했는데. 괜히 걱정했네!”
펠릭스는 저만치 앞서 걸었다.
“빨리 와, 누나. 얼른 집에 가자!”
양 볼에 여물진 그의 보조개가 오늘따라 더욱 깊어 보였다.
아참, 펠릭스한테 소피아 만난 것도 이야기해야 하는데. 조만간 물어봐야지!
상상하니 퍽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의 모습에, 나는 빙그레 미소지으며 빠른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