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연회가 무르익어갈 즈음, 네 친구 하나를 찔러.”]
[“… 네?”]
[“왜. 못 하겠어?”]
엘리나 트리탄의 하녀 루이자가 덜덜 떨리는 입술을 뻐끔거렸다.
[“아, 아가씨…, 저더러 지금… 사람을 죽이라는… 건가요…?”]
[“그게 싫으면.”]
아직 물기가 촉촉한 엘리나의 머리카락 한 가닥이 하녀의 어깨에 내려와 앉았다.
[“니가 죽던가.”]
루이자는 며칠 전 목욕 시중 도중 엘리나가 제게 내렸던 명령을 떠올렸다.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명이었지만, 그녀는 거역할 수 없었다.
지금껏 제 주인의 말을 어긴 자들이 어떻게 되었던가? 목숨이 끊어졌다면 차라리 다행이지. 대부분은 죽지 못해 살아갔다. 몸 한군데 온전한 곳 없이.
루이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연회는 끝을 향해가고 있었고 엘리나는 즐거운 표정으로 그녀를 독촉했다. 도대체 누구를? 누구를 없애야 한단 말이야?
메이드 옷 안에 숨긴 단도의 서늘한 감촉이 그녀를 덮쳐왔다.
그녀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안나, 헬라, 투리아, 로디안. 모두 그녀가 사랑하는 친구들이었다. 아델트 공작저택에서 일하면서 가족처럼 정을 쌓았던 이들이다. 그런데 누구를?
후회로 가득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때 아델트 공작의 집무실을 몰래 뒤지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쫓겨날 일이 없었다면! 그러면 여전히 저들과 함께 웃고 있었겠지?
‘그러고 보니 그때도….’
전부 다 엘리나 트리탄. 그녀가 시킨 짓이었다. 정보가 될 만한 건 뭐든 찾아오라고! 그러나 곧 고개를 떨구었다. 돈 몇 푼에 바보같이 고개를 주억거린 것은 결국 자신이었기에.
루이자가 벼랑 끝에 선 듯한 심정으로 엘리나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연회장의 벽시계를 올려다보며 구둣발로 바닥을 두드렸다.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에 맞춰 춤이라도 추듯, 여유롭게.
죄책감과 함께 찾아온 모멸감에, 루이자가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겼다. 곧, 연회장 안팎으로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녀는 끝내 별관의 계단에서 스스로 몸을 내던졌다. 저 아래 바닥으로 털썩 떨어져 붉은 피를 흘리는 그녀를 보며, 엘리나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리고 유유히 저택의 본관으로 향했다.
*
별안간 일어난 사고로 인해 본관을 지키던 병사들도 모두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덕분에 엘리나는 아무런 제지 없이 3층에 도착할 수 있었다. 미리 루이자에게 물어 이 집 구조를 알아냈던 것도 한몫했고.
그녀는 곧바로 카시안의 집무실로 향했다.
엘리나 트리탄에게 필요한 것은 카시안의 사랑이 아니었다. 사랑? 그런 하찮은 감정 따위. 그게 무슨 재미가 있겠어.
그녀는 그저 이 아델트를 제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녀가 어렸을 적부터, 엘리나의 부친 트리탄 후작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엘리나. 이 아비가 죽으면 우리 가문을 책임질 사람은 네가 될 거다.”]
그녀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으며 자랐다. 헤르본 제국 동쪽의 광활한 트리탄. 그게 다 제 것이라니!
그러나 어떻게 됐더라? 한참이나 덜떨어진 그녀의 남동생이 트리탄의 새로운 주인이 되어버렸지!
그 후로 남동생을 처리할 계획을 몇 차례 세웠으나 전부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엘리나는 트리탄의 영지에서 쫓겨났다.
남동생 안더스 트리탄은 파문과 재정지원이 끊기는 것만은 막아주겠다며 그녀에게 서약서를 요구했다. 더는 가문에 위해를 가하지 않겠다는 서약이었다.
그 덕에 여전히 트리탄의 돈으로 먹고살면서도, 그녀는 언제든 안더스의 뒤통수를 칠 생각이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아델트가 필요했다.
게다가 지금 이 아델트의 꼴 좀 보라지.
한때 ‘제국의 수호자’라고 불리던 이 가문이. 아델트 선대공작의 혼외자식인 카시안으로 인해 점점 쇠락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그는 마법사의 자질을 타고나지 못했다지?
멍청하긴. 그런 자격 없는 사람이 이 아델트를 이끌다니. 그건 말이 안 되지.
엘리나가 기분 좋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카시안의 약점을 잡을 만한 어떤 것이든 찾기 위해서.
기다란 손가락으로 그의 물건 하나하나를 훑어가는 그녀의 모습은, 숨어든 사람이라 믿어지지 않을 만큼 여유로웠다.
시간이야 많았다. 어차피 지금 연회장은 난장판이 되었을 테니까.
그런데 말이야.
도대체가 이 집무실에서 일하는 게 맞는 거야? 아니면 아예 일을 안 하는 건가?
물건을 뒤지는 엘리나의 손놀림이 점차 짜증스럽게 변했다.
“아니, 어떻게 된 게!”
집무실에 아무것도 없을 수가 있어?
심지어 책상 위에도 서류 한 장이 없이 깨끗했다. 책꽂이에 꽂혀있는 책도 별다를 게 없었다.
“허, 아델트의 역사?”
장난쳐? 내가 지금 이따위 걸 읽게 생겼어?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티 없이 맑아 보이던 그녀의 눈동자에 섬뜩한 기운이 몰려왔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전, 루이자도 똑같은 소리를 해댔었다.
[“엘리나 아가씨…. 집무실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방을 뒤지다가 걸려서 잡아뗀 줄 알았더니. 진짜로 없던 거야?
그녀는 책상 앞에 있던 가죽 의자에 다리를 꼬고 기대어 앉았다.
책상 서랍. 그래, 모름지기 여기에 비밀이 있는 법이거든.
그러나…. 그 안에는 다 구겨진 노란색 편지 봉투 하나가 덜렁 있을 뿐이었다.
“뭐야, 이 구질구질한 건?”
심지어 봉투에 3만 드랑이 있네.
“저금통이야?”
꼴도 보기 싫은 더러운 종이쪼가리를 바닥으로 집어 던지려던 찰나, 문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으어어어어어…….”
이건 또 뭔데? 아무도 없는 거 아니었어?
“무우우우울…… 으어어어어어….”
의문의 발걸음이 해괴한 소리와 함께 그녀가 있는 곳으로 가까워졌다. 게다가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벌컥 열리는 게 아니겠는가?
당황한 엘리나가 편지 봉투를 제 드레스의 속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리고는 태연하게 의자에서 일어났다. 곧, 열린 문 사이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불청객의 머리카락은 어둠 속에서도 금을 뿌려놓은 듯 반짝거렸다. 아아, 시아라. 네가 직접 나를 찾아왔구나?
금발의 여인은 술에 취한 듯 좌우로 몸을 흔들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는 엘리나 트리탄의 눈에 진득한 살기가 서려 있었다.
그녀는 우아한 발걸음을 옮기며 시아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안녕? 이렇게 또 만나네?”
그리고 그 기다란 손가락으로, 그녀의 목을 천천히 움켜쥐었다.
시아라가 양손을 벽에 짚으며 바르작거렸다.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그녀의 어여쁜 얼굴을 보며, 엘리나가 입을 크게 벌려 웃었다.
“이것 봐. 예쁘잖아.”
그때였다.
“엘리나 트리탄.”
땅을 뚫고 들어갈 기세의 낮은 음성이 그녀의 이름을 부른 것은.
*
“하녀 하나가 계단에서 추락했습니다. 다행히 숨은 붙어 있는데, 아직 의식이…. 주치의가 오는 중이랍니다.”
별채로 가는 길에 알버트가 상황을 설명했다.
그의 말대로 한 하녀가 다른 하녀의 품에 안겨 축 늘어져 있었다. 그 주위에 둥그렇게 모인 귀족들은 수군덕거리고, 하녀 네다섯은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품에 안긴 하녀는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채였다. 그 시뻘건 피를 보자마자 카시안의 손이 덜덜 떨렸다.
[“오빠…! 어떻게 해…. 나… 나 때문에 오빠가…. 미안해, 미안해 오빠.”]
불쑥 떠오른 기억에 그는 토할 듯이 헛구역질했다.
“공작 각하…. 괜찮으십니까?”
알버트가 휘청거리는 그의 팔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 괜찮아.”
그가 크게 심호흡하며 진정하려 애썼다.
가까이서 본 하녀의 모습은 더욱 참혹했다. 카시안 역시 안면이 있던 여자였다. 그녀가 집무실에 몰래 들어왔을 때, 자신에게 직접 들켰었으니.
“갑자기 왜 떨어진 거지?”
“그게…. 목격자들 말로는 뛰어내렸답니다.”
“스스로?”
“네.”
그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지금 저 아이가 어디에 속해있지?”
“엘리나 트리탄 영애의 밑에서 일한다고 하더군요.”
카시안이 불쾌한 한숨을 토해냈다.
“주치의한테 곧장 치료받게 하고. 깨어나는 대로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알아봐.”
“네. 알겠습니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경고음이 울렸다. 팔찌에 담긴 마력이 이상하게 반응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 기묘한 감각을 알아차리자마자, 그가 본채로 달려갔다.
곧장 자신의 방으로 달려갔으나 시아라는 없었다.
“어디… 어디 간 거야.”
카시안이 불안한 듯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다시 복도로 나가려는데 문 앞에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떨어져 있었다. 오팔이 박힌 팔찌였다. 그것을 주워들고 살피던 찰나. 자신의 집무실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는 재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거기에 그가 애타게 찾던 그녀가 있었다. 그 옆에 초대받지 못한 이도 함께.
“엘리나 트리탄.”
그녀는 지척에서 들려온 카시안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시아라의 목에서 손을 떼었다. 그 소리는 머리칼이 곤두설 정도로 스산했다. 그러나 그녀는 태연한 척 뒤돌았다.
“지금 뭐 하는 거지?”
“어머, 아델트 공작님이시군요.”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물었다.”
그녀가 시아라의 어깨 위를 먼지 털 듯 툭툭 털었다.
“영애가 많이 취한 것 같아서, 걱정되어 따라왔어요.”
소름 끼치도록 맑은 미소를 그리며 덧붙였다.
“아까부터 목이 말랐는지 물을 찾던데…. 왕자님께서 어서 물을 구해 와야 하지 않을까요? 여기 공주님이 기다리시잖아요.”
카시안이 시아라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영애의 하녀에게 문제가 생겼는데. 때마침 그 주인은 여기에 있다니. 정말 대단한 우연이군.”
“제 하녀라니…. 혹시…! 루이자 말씀이신가요? 정말요? 혹시 루이자가…. 죽었나요?”
그녀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과장되게 소리쳤다. 어차피 저 등신 같은 공작은 이 대단한 연기를 알아차릴 리도 없으니.
“흐으윽…. 루이자!! 제 친동생 같은 아이였는데!!!”
엘리나는 한 떨기 꽃잎 같은 눈물을 토도독 흘려보냈다.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드레스 탓에 그녀의 모습은 더욱 처연해 보였다. 어느 남자가 그런 그녀를 안아주지 않을 수 있을까?
“역겹네.”
“아, 너무 슬퍼ㅇ… 네…?”
“연기가 너무 티 나잖아. 역겨워.”
“…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연기라뇨? 제가요?”
카시안이 시아라를 더욱 깊게 끌어안았다.
“오늘 무슨 일이 있던 건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네 불쌍한 하녀가 곧 깨어날 테니.”
“… 깨어나…요…?”
“가봐. 나는 공주님께 물을 구해다 드려야 해서.”
속이 부글부글 끓는 듯한 분노를 애써 견뎌내며 엘리나가 고개를 숙였다.
“다음에 또 뵐게요. 아델트 공작님.”
그가 그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왜?”
카시안의 하대에도 그녀는 꽃 같은 웃음을 잃지 않으며 집무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참. 그쪽이 하녀를 하나만 데리고 이곳에 왔던가? 나는 이름을 말한 적이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