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자선경매는 계속 진행되고 있었지만, 눈앞에서 환상의 물약을 빼앗긴 나는 완전히 흥미를 잃어버렸다.
내가 볼에 바람을 넣고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자 카시안이 대뜸 다가왔다.
“저 사람. 사기꾼이에요.”
“… 거짓말하지 마세요. 지금 저 달래주려고 일부러 그러시는 거죠?”
“진짠데. 마법으로 만들었다면서, 마력이 하나도 안 느껴지거든요.”
“뜨흑. 그럴 리 없어! 저게 가짜라니!”
나는 테이블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설령 진짜 마법으로 만들었다고 한들. 절대 쓰면 안 돼요.”
“왜요?”
“비밀을 발설하는 마법이라니. 인류애를 지켜야죠.”
… 인류애라뇨?
그간 저한테 “지금 저 사람 죽일까요?”라는 등 으름장을 놓으시던 분이 무슨….
무척 혼란스러운 와중에 카시안의 향기가 코끝에 가까워졌다. 그가 물었다.
“누구 비밀이 그렇게 궁금하길래?”
“… 그냥. 신기하잖아요.”
“나는 그런 거 없이도 내 비밀 다 말해줄 수 있는데.”
“…… 어떤 비밀을 말해주고 싶은데요?”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그의 향이 다시 멀어졌다.
저 멀리 테이블에 앉아있는 소피아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저 여자는 아까부터 계속 혼자 있네. 라튼도 없이. 소피아 레트랑이라는 말에 경기를 일으키더니. 진심으로 싫었나 봐.
그때, 자리에서 일어선 소피아가 당찬 걸음걸이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카시안 폰 아델트 공작님을 뵙습니다. 엘링턴 백작가의 삼녀 소피아 엘링턴입니다.”
“반갑습니다.”
“이렇게 뵈니 영광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공작님 옆에 계신 영애에게 볼일이 있어서요. 잠깐 실례해도 괜찮을까요?”
“그건 제가 아니라 시아라 양에게 직접 묻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그러자 소피아가 나를 또랑또랑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때요?”
아까 한껏 약 올릴 때는 언제고. 무슨 할 말이 있다고 나를 찾는 거지? 떨떠름한 기분과 함께 찾아온 호기심에, 나는 그녀의 제안을 수락했다.
*
“엘링턴 영애. 대체 어디까지 갈 셈이에요.”
“그냥 소피아라고 불러요.”
“… 소피아. 나한테 할 말이라는 게, 꼭 이렇게 어둡고 비밀스러운 곳에서 해야 하는 거예요?”
우리는 사방이 짙은 어둠인 야외정원에 있었다. 정원이 어찌나 넓은지. 아델트 저택이 처음인 나로서는 여기가 어딘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녀가 벤치에 앉기에 나도 따라 앉았다. 그러자 그녀는 들고 있던 가방에서 아까 그 환상의 물약을 꺼내 들었다. 빛이라고는 노란 달빛뿐인 어둠 속에서, 오직 맥컬리만이 뽀얗게 빛났다.
“마셔요.”
엥? 이걸 내가 왜 마셔?
내가 의아해하자 그녀가 맥컬리를 흔들었다.
“당신한테 먹일 게 아니면 제가 이걸 그 돈 주고 왜 샀겠어요? 제가 그렇게 덜 떨어진 줄 아세요?”
할 말이야 많았지만 나는 꾹 참았다.
“그러니까, 그 돈 주고 산 걸 왜 내가 마시냐는 말이에요.”
“잘 알면서.”
“나한테 뭐 궁금한 거 있어요?”
“당연하죠.”
소피아가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내게 물었다.
“펠릭스. 어떻게 알아요?”
“그건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데요.”
“아, 그럼 반반씩 마시면 되겠네. 공평하게.”
소피아가 순식간에 맥컬리 반병을 한 번에 비우더니, 나머지 절반을 내게 내밀었다.
“얼른요.”
그녀의 행동에 나는 홀린 듯 병을 쥐었다. 그리고 나머지를 내 목구멍에 탈탈 털어 넣었다. 따끔한 기포들이 자꾸만 목에서 발차기하는 것 같은, 간질간질하고 요상한 기분이었다.
우리를 감싼 공기가 후끈 달아오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소피아는 달뜬 목소리로 말했다.
“있잖아요오. 엘리나 트리탄 진짜 재수 없지 않아요?”
마법에 걸린 내 혓바닥도 꾸부렁거렸다.
“맞아!! 완-전 재애수없어어.”
“머리에 똥만 찬 게 아주 맨날 잘난 척이라니까? 아까 언니도 들었죠? ‘설마 의사가 되려는 건 아니죠?’ 이러는 거!”
“아 들었지. 내가 다 들었지!”
“씨이. 나중에 걔 술병 나서 우리 병원 오기만 해봐. 비웃어 줄 거야.”
“푸흡. 겨우 비웃기만 할 거야?”
“언니. 의사는 아무리 꼴 보기 싫은 사람도 차별 없이 치료해야 하는 거거든요?”
“그럼 괴롭혀 주는 건 내가 할게. 나만 믿어.”
이 물약은 정말이지 신통방통했다. 문제는 남의 마음뿐 아니라 내 속마음까지 나불거린다는 점이었다.
“아니 근데 언니. 도대체 라튼 레트랑이랑은 왜 만났대? 소오름…!”
“그럼 너는?”
“아 그렇게 해야! 우리 대단하신 아빠가 나를 밖으로 내보냈으니까!”
너도 고생이 많구나.
나는 안쓰러운 그녀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그녀가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흐어엉. 펠릭스 오빠 보고 싶어.”
“나중에 우리 집에 놀러 와! 걔 내 앞집에 살아.”
소피아가 놀란 듯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 세상에. 정말…?”
“응. 근데 맨날 병원에 가 있으니까….”
“그건 알아요. 그래서 내가 의사가 될 거니까!”
그때부터였을까. 소피아의 몸이 조금씩 흔들리더니, 이내 크게 휘청휘청하기 시작했다.
“아, 왜 그래애…. 정신 사납게….”
곧 몸이 붕 뜨는 기분이 들더니, 하늘 위로 별이 보였다.
*
카시안의 품에 안겨 있는 여자의 체구는 바스러질 것처럼 작았다. 예쁘게 틀어 올렸던 머리카락은 어느새 다 풀어져 그의 목을 간지럽혔다.
“제발 가만히 좀 있어요.”
지금 물속에서 헤엄치는 중인 거야 뭐야?
그녀가 허공에서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그뿐이면 좋으련만. 움직일 때마다 귓불에 와 닿는 숨소리 때문에, 그는 머리칼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카시안은 참담한 심정으로 그녀의 손목에 채워진 푸른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가운데 박힌 오팔이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했다.
사실 처음 팔찌를 채워줄 때만 해도, 그냥 평범한 팔찌였다. 아니, 평범하지는 않지. 시아라의 눈동자를 닮았으니까. 그게 평범할 리가.
라튼 레트랑이 온다기에 거기에 진짜로 마법이라도 담아줄까 했었다. 위급한 상황이 왔을 때,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단번에 알 수 있도록.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게 꼭 그녀를 스토킹하는 것 같았다. 그래, 그는 정말이지 인류애가 있는 남자였다. 게다가 그녀랑 계속 한 공간에 있을 텐데. 설마 그 남자가 몹쓸 짓이야 하겠나 싶었다.
카시안은 그게 자신의 오만이었음을 깨달았다.
라튼이라는 그 작자는 제 엄마처럼 구역질 나는 존재였다. 약한 사람은 괴롭히고, 강한 사람 앞에서 조아리는 쓰레기. 아주 모자가 쌍으로 똑같네.
결국, 시아라가 경매에 눈이 팔린 틈을 타, 팔찌에다가 아주 약간의 마력을 불어 넣었다. 이제부터 그 남자가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못하게 할 요량으로.
그런데 왜….
갑자기 고주망태가 되어있는 거지?
두리번거리던 그가 벤치 옆에서 나뒹구는 빈 유리병을 발견했다.
“…….”
마력은커녕 쌉쌀하게 풍겨오는 알코올 향에 그가 알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그렇게 사기꾼이라고 했건만.
그는 시아라를 품에 안고 저택 본채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녀를 침대에 눕히려는데, 그녀가 그의 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 시아라.”
목 뒤에 채워진 손깍지는, 카시안이 그녀를 내려놓으려 할 때마다 더욱 단단하게 맞물렸다.
“하아…. 미치겠네, 진짜.”
그가 거센 숨을 토해낼 때, 시아라가 번쩍 눈을 떴다. 그녀는 눈앞에 놓인 카시안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말갛게 웃었다.
“공작니임.”
갑작스레 보이는 그 새파란 눈동자에 카시안은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말을 잃었다. 그 순간, 그녀가 그의 넥타이를 아래로 끌어당겼다. 자신의 의지라고는 하나도 없는 인형처럼, 그 이끌림에 그는 그녀의 지척까지 당겨졌다.
“공작님은 왜 맨날.”
그는 그대로 숨을 멈췄다.
“이렇게 얼굴을 들이대요?”
창틈 새로 들어오는 달빛이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완전히 노랗게 물들였다. 그 탓에 안 그래도 하얀 그녀의 얼굴이 더욱 더 창백해 보였다. 작고 도톰한 입술은 유난히 붉었다.
“자꾸 그러면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너무해….”
자칫하면 서로의 코끝이 닿을만한 거리에서, 그녀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시아라의 뺨 위로 그녀의 길고 수려한 속눈썹이 그림자 졌다. 그녀가 숨을 달싹거릴 때마다 그녀를 닮은 꽃향기가 피어올랐다.
그 농도가 짙어질수록 그의 호흡이 역시 점점 가빠졌다. 홀린 듯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던 그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평소와 달리 평정심을 잃은 그의 눈도 서서히 감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그의 품 안에 갇혀있던 그녀의 고개가 풀썩 떨어졌다. 그 바람에 그의 입술에 그녀의 이마가 스치듯 지나갔다. 상상과는 다른 단단한 감촉에 그가 정신을 번쩍 차렸다.
“시아라……? 시아라?”
정적 속에 들려온 것은 그녀의 새근새근한 숨소리뿐이었다. 거세게 넥타이를 움켜쥐었던 손도 언제 그랬냐는 듯 힘을 잃고 떨어진 채였다.
그의 눈이 세차게 요동쳤다.
‘차라리 나도 취할 걸 그랬네.’
이 민망하고 어색한 기류 속에서 카시안이 허망하게 일어섰다. 그녀의 어깨까지 푹신한 이불을 덮어주고 나서야 그가 방에서 나왔다.
어차피 시아라도 여기에 있겠다, 더는 무도회에 볼일이 없어진 그는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복도에서 알버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는 아주 다급한 얼굴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공작 각하! 여기 계셨군요. 큰일 났습니다.”
“뭐야, 무슨 일 있어?”
“갑자기 하녀 하나가 연회장에서…!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들이 서둘러 별관으로 떠났다.
*
… 아… 목말라…….
지금 여기는 사막인 걸까.
나는 목이 쩍쩍 갈라지는 갈증 탓에 눈을 번쩍 떴다.
“물….”
물을 마시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다가, 아직도 세상이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머리는 어찌나 깨질 것처럼 아픈지.
‘분명 이쪽으로 가면 우리 집 거실이 나와야 하는데….’
나는 온전히 감에 의지해 더듬더듬 방문을 찾아 나섰다.
‘여기쯤인데?’
왜 없지?
애꿎은 벽에다가 이마만 콩콩 박기를 수차례. 드디어 문을 찾고 거실로 나왔다. 거실… 이 아니라, 복도?
혼란스럽고 낯선 광경 속에서도 오직 물을 찾아 애타게 돌아다녔다.
“하아…. 주전자가… 도망갔어….”
컵도 같이 갔나 봐…. 여기 뭐야.
그렇게 계속해서 집 나간 주전자와 컵을 찾아다니는데, 내 눈앞에 불쑥 보라색 눈동자가 나타났다.
그녀가 싱그럽게 미소지었다.
“안녕? 이렇게 또 만나네?”
아…. 이거 지금.
“… 악몽이구나, 악몽…….”
나는 이 지독한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세차게 눈을 비볐다가 다시 떠보기도 했다.
하지만 한 인영이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내 앞에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 나를 비웃는 여자가 가느다란 손을 뻗어 내 목을 감싸 쥐었다. 손가락 하나하나 닿을 때마다 느껴지는 써늘한 감촉에 내 온몸에는 전율이 흘렀다.
점점 시야가 흐려지더니, 어느새 암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