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시간이 흘러 어느덧 무도회 당일이었다.
그 사이에 카시안을 만나면 혹시 라튼이 오는지 물어볼까 했는데, 그게 꼭 미련처럼 보일까 봐 묻지 않기로 했다. 준비하느라 바쁜 것인지 코빼기도 안 보이기도 했고.
한나는 양손에 메이크업 도구를 싸 들고 우리 집을 찾았다. 오늘도 예사롭지 않은 그녀의 손놀림은 가히 경이로웠다.
어깨가 드러나는 연노란색의 드레스가 발끝까지 파도치듯 흘러내렸고, 단아하게 틀어 올린 머리카락 위로 얹은 은색 티아라는 영롱하게 빛났다.
그녀는 만족감을 표하며 손등으로 제 이마를 쓸어내렸다.
“와아…. 한나, 이거 정말 나 아닌 것 같아요.”
“시아라. 오늘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있다가 와요!”
나보다도 훨씬 더 열의에 찬 한나가 현관을 나서며 응원의 말을 잊지 않았다.
“공작님이랑 어떻게 됐는지도 나중에 꼭 알려주기에요!”
“… 그런 일은 절대 안…!”
일어날 텐데.
뭐라 변명을 해보았지만, 이미 문은 닫힌 뒤였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 약속 시각에 맞추어 집 앞에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커질수록 긴장으로 물든 내 손바닥에도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나 어리숙한 티를 내고 싶지 않아 최대한 당당하게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전부 부질없는 짓이었다.
내가 선물한 턱시도를 빼입고 등장한 카시안을 보자마자 그 자리 그대로 굳어버렸으니까. 혹시 사람을 홀리는 마법이라도 쓰는 거야 뭐야?
아델트 가문을 대대로 모셨다는 덴버라 씨의 말만큼은 거짓이 아니었는지, 턱시도는 본래 그의 옷이었던 것처럼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현관문 앞에 멀뚱히 서 있는 나를 발견한 카시안이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이 남자를 보며 내가 떠올린 생각은 단 하나였다.
“공작님…. 오늘 아무한테도 공작님 보여주기 싫어요.”
“이상하네.”
“뭐가요?”
“내가 할 말을 당신이 하니까.”
그가 해사하게 웃었다.
“그럼 우리 그냥 가지 말까요?”
“… 아뇨. 저는 예쁘게 차려입어서 자랑하고 싶어요. 얼른 가요.”
그는 내 손을 잡고 능숙하게 마차로 이끌었다.
마차에 올라 카시안이 처음 건넨 말은 조금 뜻밖이었다.
“고백할 게 있어요.”
“네?”
낮고 진지한 그의 음성에 덩달아 긴장한 내가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제가 사려 깊지 못했어요. 그 남자….”
그가 처연하게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레트랑 백작의 후계자, 그 남자를 초대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카시안도 이미 알고 있었구나.
하긴, 그의 엄마에게 했던 짓을 함께 보았는데. 그 존재를 모를 리가 없겠지.
“괜찮아요. 당연히 올 거라고 예상했으니까. 오히려 잘됐어요.”
“괜히 저 때문에 당신이….”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던 카시안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내 손목에 채웠다. 푸른색 오팔 보석이 작게 박혀있는 팔찌였다.
“이거, 잃어버리지 말고 꼭 하고 있어요.”
“혹시…! 보호 마법 같은 게 걸려 있는 선물인가요?”
“아뇨.”
역시. 맞는 게 하나도 없다니까.
*
연회장은 정말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런 화려함 따위는 지금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나의 온 신경은 내게 와 닿는 의문스러운 시선들에 쏠려있었기 때문이다.
“아델트 공작님 옆에 있는 저 여자는 누구지?”
“처음 보는데?”
“혹시 이 무도회에서 약혼 발표라도 하려는 걸까?”
“그럼 트리탄가는…!”
귀족들은 부채로 입을 가리고 속닥거렸다. 그러나 그게 내 귀에 직접 말하는 것처럼 또렷하게 들렸다. 아마 내 오른팔에 단단히 얽혀있는 카시안의 팔이 아니었다면,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겠지.
“긴장돼요?”
그가 나른한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조금요.”
“떨릴 게 뭐가 있다고. 나는 하나도 안 그런데.”
개구쟁이처럼 피식피식 웃는 그의 표정만큼은 정말로 여유로워 보였다. 그러나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계속 반복하는 그의 행동은, 보는 내가 다 땀나게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목은 새빨갛게 물들어있었다. 이 남자도 나처럼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고맙게도 나의 위안이었다.
나 역시 푸스스 웃으며 한결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때, 연회장 입구에서 어떤 여자와 팔짱을 끼고 들어오는 중인 라튼을 발견했다.
역시, 왔구나.
그런데 저 여자…,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어디더라?
잠시 멈칫한 나를 카시안이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그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가볍게 쥐었다. 양 볼에 닿은 뜨거운 감각에 라튼에게 향했던 내 눈동자가 그에게 닿았다.
“거기 말고, 나 봐요.”
그에게서 느껴지는 후덥지근한 열기에 민망해진 내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공작님. 그보다 이따가 발 조심하세요.”
“발이요?”
“제가 춤추다가…. 아니에요.”
귀족이라면 어릴 때부터 쉼 없이 연습한다는 춤. 나 역시 배웠었다. 물론 가문에서도 따로 선생님을 붙여주기도 했었지만, 제일 처음은 보육원에서였다.
그것도 내 또래의 소년에게서.
희한하게 그의 얼굴은 기억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흐릿했지만, 그가 했던 말만큼은 여전히 선명했다.
[“겁먹지 말고. 차라리 발을 밟아. 너한테 밟힌다고 누가 죽는데?”]
그렇게 입양된 후, 몇 차례 있었던 꼬마 귀족들의 무도회에서 나는 사내들의 발등을 온 사방팔방 지르밟고 다녔다. 그런 흑역사 이후에 춤을 출 일이 없었으니. 내가 카시안의 발이 온전하길 간절하게 바라는 것도 당연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말했다.
“당신이 밟는다고 안 죽어요. 그러니까, 그냥 밟아요.”
그 말에 어떤 묘한 기시감이 등허리를 타고 흘렀다. 그러나 악단의 연주로 시끌벅적한 무도회에서, 그 감각에 대한 의미를 깊게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숟가락으로 와인잔을 두어 번 두드린 카시안은 회장을 빼곡히 채운 귀족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연회장 한가운데서 내게 손 내밀었다.
우리는 경쾌한 왈츠 선율에 맞추어 제법 그럴듯한 춤을 추고 있었다. 합을 맞추어 본 적이 없음에도, 오랜 시간 함께했던 것처럼 익숙했다.
카시안은 우아하게 발을 움직였고, 능숙하게 나를 리드했다. 무도회는 처음이라더니, 순 거짓말이었나 봐.
그의 품에서 풍기던 포근한 머스크 향이 익숙해질 즈음, 첫 곡 역시 끝에 이르렀다.
그 뒤로는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누군가는 춤을 추고, 어떤 이들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중 대다수는 인사를 하겠다며 카시안을 찾아왔다.
그러나 안부는 뻔한 핑계일 뿐, 그들의 관심사는 나였다.
“레이디께서는 아델트 공작님의 정혼자신가요?”
“어머, 그런 당치도 않은 소리 마세요. 공작님과 저는 그저 친분이 두터울 뿐이랍니다. 그렇죠, 아델트 공작님? 아! 그러지 말고 다들 샴페인 한 잔씩 하시는 게 좋겠어요!”
능구렁이처럼 태연하게 버티다가 결국엔, 카시안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공작님. 저 저쪽에서 쉬고 있어도 괜찮을까요?”
“같이 갈까요?”
“아뇨. 괜찮아요. 너무 부담스러워서요.”
그는 나를, 사람이 많이 없는 발코니로 데려다주었다. 거기에 있는 커다란 소파에 나를 앉히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금방 올게요.”
고개를 끄덕이자 그에게서 풍기던 은은한 머스크 향이 점차 옅어졌다.
연주 소리와 사람들의 환호가 한데 뒤섞인 분위기는 제법 황홀했다. 나는 굽 높은 구두를 벗고 소파 위에 발을 올렸다. 세운 무릎 위로 얼굴을 기대니 첫 춤의 낭만이 다시금 떠올랐다.
“다행이다.”
이번엔 진짜로 내가 상상했던 무도회라서….
아까 마셨던 샴페인 때문일까? 나른하게 잠이 오기 시작했다.
*
“… 시아라….”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무거운 눈을 껌뻑였다. 흐릿한 시야가 조금씩 선명해지자 붉은 인영이 나타났다.
라튼 레트랑. 그였다.
그는 내가 머리를 기대어 잠들었던 소파 아래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 어째서…. 어째서 시아라 네가 여기에 있는 거야.”
나는 축 늘어진 몸을 제대로 일으켜 앉았다.
그 순간, 그가 내게 허락 없이 손을 뻗어 삐쳐 나온 옆머리를 내 귀에 걸었다.
“보고 싶었어.”
갑자기 다가온 그 소름 끼치는 감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라튼. 지금 뭐 하는 거야?”
나는 아직도 내 뺨에 머물러 있는 그의 손을 힘껏 내쳤다. 당황한 그가 물기 어린 목소리로 내게 호소했다.
“나…. 나 엄마랑 연 끊겠다고 했잖아. 네가 원하면 그런다고 했잖아. 널 찾으려고 내가…!”
흥분으로 언성을 높이던 그가 입술을 꾹 깨물며 멈칫했다.
“그러니까 나랑 같이 돌아가자.”
“내가 너랑? 도대체 왜?”
“늘 함께하기로 약속했었으니까.”
“미안해서 어쩌지? 요새 내가 너무 잘 자서 그런가, 도통 그런 꿈을 꿔 본 적이 없는데.”
“… 뭐?”
“있잖아, 라튼.”
나는 최대한 다정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새파랗게 질린 그의 얼굴이 조금씩 혈색을 되찾았다. 도대체 얘는 나한테 무얼 기대하는 걸까?
“너는 내가 아직도 널 좋아한다고 생각해?”
“… 응. 우리가 노력하면 얼마든지.”
“노력이라니. 너 정말 갸륵하다.”
나는 힘껏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라튼 레트랑 씨.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얘기 하시면서 질질 짜실 거면 얼른 엄마 품으로 가시고요. 저는 댁 없이도 아주 잘살고 있으니 두 번 다시 찾지 마시고요. 똑똑한 분이시니 알아들으셨으리라 믿을게요!”
그의 붉은 머리카락이 좌우로 세차게 요동쳤다.
글렀다. 말귀를 못 알아먹네.
“라튼, 나 너 싫어.”
“… 시아라… 우리….”
“그러니까 착각 금지. 오해 금지. 망상 금지. 알아들어?”
“거짓말.”
“하아. 나 지금 벽이랑 대화하니? 싫어. 싫어. 너 진짜 싫다고.”
갑자기 그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아, 이제야 알겠다. 바로 저거였어, 악어의 눈물.
내가 헤어지자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저렇게 울었지. 내가 어떤 말도 못 꺼내도록.
이 꼴을 보고 있자니 문득, 카시안이 우리 집을 찾아와 옛 연인을 회상하며 그렸던 표정이 떠올랐다.
말 한마디 없이도 보였던 상대방에 대한 진심이, 왜 라튼에게서는 보이지 않는 걸까?
그러자 순간 구역질이 치밀었다.
“라튼.”
나는 무뚝뚝한 얼굴로 그의 얼굴을 가까이 마주했다.
“너 그거…. 진심 아니잖아.”
그러자 어깨까지 들썩이던 그의 움직임이 잠시 멈칫했다. 그 찰나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냉기가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떨구었다.
“… 진심이야.”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솔직히 기대도 안 했지만, 일말의 미련도 없었지만.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정말 지긋지긋했다.
이제 더는 그와 함께 있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드리워진 커튼이 걷히며 카시안의 얼굴이 보였다.
라튼은 아직 그가 왔는지도 모르는지, 계속해서 궁상맞게 어깨를 떨고 있었다.
카시안은 내 발아래 무릎 꿇고 앉아있는 라튼을 보자마자 급격히 표정을 굳혔다.
저 표정은 분명….
“안 돼요!”
나는 혹여 그가 마법이라도 쓸까 펄쩍 일어나 그의 두 손을 붙잡았다. 라튼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고작 라튼 때문에 카시안이 마법사인 게 여기저기 소문나는 것이 싫어서였다.
갑작스러운 내 목소리에 라튼도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제가 잘 말했어요. 그러니까….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아요. 우린 이제 가요.”
나는 카시안의 손을 잡아끌었다.
라튼은 아연실색하여 우리를 번갈아 보더니, 끝내 돌아서는 내 드레스 자락을 붙잡았다.
그것을 세차게 잡아당긴 후에, 아무 미련 없이 그를 내버려 둔 채로 나왔다.